일러스트=이철원

여름을 쓰고 읊은 문인(文人)들은 휴가 때 어떤 책을 읽으라고 추천할까? 이 물음에 대해 여름을 주제로 작품을 쓴 적 있는 시인과 소설가 5인이 답했다. 소설가 이꽃님·이정명·조해진, 시인 안희연·황인찬이 ‘여름의 쉼표’를 주제로 폭염 한가운데 서늘한 그늘을 드리울 만한 책을 각각 두 권씩 골랐다. 가파른 빙벽을 오르는 사내의 분투, 여름 햇살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소녀들의 우정…. 가지각색 이야기의 향연이 펼쳐진다.

[“네, 할게요”에 지쳤다면 “못해, 안 할거야” 외쳐봐]

못해 그리고 안 할 거야

리디아 데이비스 소설|이주혜 옮김|에트르|376쪽|2만1000원

춤을 추었어

이수지 글·그림|안그라픽스|66쪽|3만원

책임, 의무, 속박과 같은 무거운 단어는 잠시 서랍에 넣어두고 쉼표의 시간을 마련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두 가지를 제안해 본다. 하나는 ‘못해 그리고 안 할 거야’라고 말하는 리디아 데이비스처럼 생각해 보기. 리디아 데이비스는 여러모로 희귀한 작가다. 그의 글은 장르를 규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저 이야기라 잠정하면서 경계 없이 뻗어 나가는 입담과 상상력을 즐기는 수밖엔. 책에 수록된 이야기 122편은 어디를 펼쳐 읽든 괜찮아 보인다. 오늘 불쑥 펼친 페이지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나이가 들어 세상을 더 명료하게 보기 시작하면 행복할 일이 별로 없다.” 어쩌면 당신의 문제는 세상을 너무 명료하게 보기 때문이라는 말. 이 문장은 이렇게도 읽힌다. 현실이라는 덮개에 감춰져 있던 삶의 비밀스러운 힘을 체감하세요. ‘네 그리고 할게요’ 말하느라 지친 당신, 오늘만큼은 ‘못해 그리고 안 할 거야’ 말하세요. 가장 깨끗한 맨발이 되세요. 그리고 우리 함께 춤을 춥시다.

둘째 제안은 바로 그것, 춤을 추는 일이다. 그림책 작가 이수지의 신작 ‘춤을 추었어’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라는 물음에 대한 복합적 답변이 담겨 있다. 책을 펼치면 한 소녀의 얼굴이 화면 가득 등장하고, 음악이 시작된다. 소녀는 맨발로 춤을 추며 물속과 들판, 하늘을 종횡무진 누빈다. 혼자 추기 시작한 춤은 삼라만상과 추는 춤이 된다. 어김없이 밤은 찾아오고, 소녀는 덮개로 덮이지 않는 현실의 곪고 아픈 부위를 목격하기도 한다. 이 춤의 끝, 우리에겐 새로운 질문이 남는다. 세상을 명료하게 보는 일은 왜 필요한가.

의식적으로 명료해지지 않으려는 노력과 새로 획득한 명료함 사이, 당신의 여름을 상상한다. 짧았던 휴가가 끝나면 우리는 집으로 돌아오겠지만 마음만큼은 예전 같지 않을 것이다. 시간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국을 남기게 되어 있으므로. 돌아온 일상의 속도는 제각기 다를지라도 그 곁엔 내내 책이 놓여 있기를 바란다. /안희연, 시인·'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저자

[힘찬 여름의 일기장 엿보듯 두 소녀의 ‘찬란함’ 속으로]

프리워터

아미나 루크먼 도슨 소설|이원경 옮김|밝은미래|488쪽|1만7500원

나의 눈부신 친구

엘레나 페란테 소설|김지우 옮김|한길사|456쪽|1만6000원

아미나 루크먼 도슨의 ‘프리워터’는 짙은 숲내음과 초록 빛깔 습지의 향연으로 독자를 마치 깊은 숲속 습지에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만드는 소설이다. 2023년 뉴베리 대상 수상작으로 어린이 독자들을 위한 책이지만, 자유를 찾아 농장을 탈출한 노예들이 진짜 자유를 되찾을 때까지 숨 막히는 추격과 아슬아슬한 모험까지 담겨 있어 어른이 읽어도 충분히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처절한 삶과 목숨을 내놓고서라도 되찾아야만 하는 간절한 자유에 이르기까지, 이야기는 생의 투쟁으로 이어진다. 자유를 찾았음에도 언제 다시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가던 이들은 진짜 자유를 되찾기 위해 두려운 습지의 생태를 존중하고 스며들기 시작한다. 이야기에 빠져 정신없이 읽다 보면 어느새인가 그들을 힘껏 응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때로는 아슬아슬하게 때로는 지혜롭게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바라보면서 목숨을 내건 희생과 용기로 자유를 찾아가는 모습을 통해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진면모를 다시금 상기할 수 있다. ‘진정한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새로운 구원자가 될 아이들을 위해, 그리고 우리의 자유를 위해 잔을 높이 들고 건배를 건네고 싶은 이야기다.

한 사람의 생애를 사계절로 나눈다면 가장 눈부시고 찬란한 때를 여름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엘레나 페란테의 ‘나의 눈부신 친구’는 두 소녀의 ‘여름’ 같은 나날들에 대한 이야기다. 매력적인 인물들로 가득 차 있는 이야기는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쉽사리 책을 덮지 못하게 만들고, 유년 시절부터 청년에 이르기까지 두 소녀의 생애를 따라가다 보면 마치 오래된 친구의 일기장을 엿보듯 이야기에 흠뻑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햇살에 반짝이는 힘찬 여름의 순간을 만끽하게 되는 두 소녀의 이야기야말로 가장 찬란하고 눈부신 시절을 함께한, 이 여름과 가장 잘 어울리는 이야기가 아닐까.

책을 덮는 순간 잔상처럼 떠오르는 두 소녀의 이야기에 힘껏 미소 짓다 보면 덥고 끈적이는 여름의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서 찬란함으로 뒤바뀌고 언제고 다시 떠올려도 되돌아가고 싶은 추억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꽃님, 소설가·'여름을 한 입 베어물었더니’ 저자

[눈보라·추락이 두려워도 인간은 상승을 욕망한다]

고독한 얼굴

제임스 설터 소설|서창렬 옮김|마음산책|288쪽|1만5000원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소설|곽광수 옮김|민음사|전2권|2만3000원

산이냐? 바다냐? 휴가철이 다가오면 반복되는 진부한 승강이다. 익숙한 자신을 벗어나 새로운 자신을 찾으려는 쉼의 대이동은 여름마다 이어진다. 강렬한 태양 아래서 서핑을 즐기며 자신의 신체 구석구석을 재발견하고 해변 파라솔 그늘에서 읽은 책 한 구절에서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깨닫고 돌아오는 우리는 이전과 다른 인간이다. 좀 더 너그럽고 지적이고 균형 잡힌 인간. 그러니 진정한 쉼은 산과 바다가 아니라 우리 내면을 향한 여정이 아닐까?

‘고독한 얼굴’은 산을 향해 떠난 한 남자의 치열한 욕망과 좌절에 관한 이야기다. 일상에 염증을 느끼던 지붕 수리공 버넌 랜드는 까마득한 암벽을 오르던 전율을 찾아 샤모니로 떠난다. 알프스 고봉의 암벽들에 도전하며 성공과 좌절을 겪던 그는 악명 높은 암벽 드뤼에서 두 조난자를 구한다. 잠시 몰려드는 매스컴과 명성을 즐기지만 그는 곧 고독한 등반가로 돌아가 유명한 그랑드조라스 북벽 등정에 나선다. 혹독한 눈보라와 얼음투성이 수직 빙벽, 추락의 두려움 속에서 상승하려는 인간의 욕망과 좌절이 ‘미국 문학 영웅’의 간결하고 강렬한 문장 속에서 날카롭게 빛난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은 하드리아누스가 아니라 프랑스 소설가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가 그려낸 이율배반적 인간의 초상이다. 로마 전성기를 이끈 하드리아누스는 현명한 정치가이자 지적 철학자인 동시에 까탈스러운 예술가이자 충동적 관능주의자였다.

소설은 말년의 하드리아누스가 병상에서 지난날을 회상하며 어린 손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이다. 삶과 죽음, 선과 악, 권력과 투쟁에 대한 통찰과, 사랑하는 소년에 대한 내밀한 감정과 육체에 대한 성찰이 품격 있는 문장으로 펼쳐진다.

집필 과정을 기록한 ‘작가 노트’는 소중한 덤이다. 스무 살 무렵 구상한 소설을 마흔여덟에야 완성한 작가의 27년에 이르는 실패와 포기, 다시 쓰기는 다시 시작할 힘과 위안을 준다. 그것을 읽는 장소가 산이든 바다든 아니면 어느 낯선 도시의 좁은 방이든…. /이정명, 소설가·'부서진 여름’ 저자

[그리움이 뒤섞인 그 시절… 당신에게 ‘지난 여름’이란]

두고 온 여름

성해나 소설|창비|172쪽|1만4000원

파도

버지니아 울프 소설|박희진 옮김|솔|332쪽|1만4800원

여름은 불확실성과 성장의 계절이다. 청명했던 하늘이 순식간에 먹구름으로 가득 채워지는가 하면, 눈 깜작할 사이 나뭇잎은 무성해지고 작물은 무르익어 간다.

성해나의 ‘두고 온 여름’은 그런 여름을 닮은 두 소년의 성장기다. 소설은 사진관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단둘이 살던 ‘기하’가 ‘재하’라는 동생과 그의 어머니를 새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과정부터 보여주는데, 모르는 사람들과 가족이 된다는 게 당연히 쉽지 않다. 기하는 재하에게 다정하게 구는 아버지가 밉고, 재하는 기하를 품으려 하는 어머니를 제대로 대우해 주지 않는 기하가 못마땅하다.

재하의 친부가 등장하면서 이들의 갈등은 커지고 가족은 결국 해체된다. 십오 년여가 훌쩍 넘어 기하는 재하를 만나러 가지만 둘 사이의 묵은 감정은 ‘미처 못다 한 말이 봉해진 편지’처럼 남겨진다. 그리움과 원망이 뒤섞인 ‘지난여름’이라면 누구나 품고 있을 것이다. 소설을 읽으며 이제야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은 그 시절과 그때 사람들을 떠올리고 추억하는 건 여름을 나는 한 방법이 될지도 모르겠다.

여름은 바다의 계절이기도 하다. 버지니아 울프의 ‘파도’는 한 친구의 죽음을 기억하는 여섯 인물이 눈앞에 펼쳐지는 파도를 보며 마치 독백 같은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채워지는데, 빛의 강도에 따라 변화하는 풍경을 묘사하는 모든 언어가 시적이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그 풍경은 삶의 흐름에 조응하게 되고 죽음에 대한 성찰로 확장된다.

‘파도’를 읽은 이후, 나는 좋은 문장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이 소설을 추천하곤 했다. 여름이라는 계절을 지나며 저마다의 파도 앞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문장을 읽는 건 특별한 경험이 되리라 믿는다. 파도는 끊임없이 반복되지만 그 파도를 남들과 다른 내면의 카메라에 담는 건 우리에게 주어진 고유한 특권일 테니. /조해진, 소설가·'여름을 지나가다’ 저자

[무더운 여름에도 때로는 따듯한 위로가 필요합니다]

여름외투

김은지 시집|문학동네|140쪽|1만2000원

제비뽑기

셜리 잭슨 단편집|김시현 옮김|엘릭시르|436쪽|1만5000원

휴가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시간이리라. 우리의 일상은 너무나 치열하기에 팽팽한 긴장을 잠시 누그러뜨릴 잠깐의 여유가 무엇보다 절실하다. 그런 사람들을 위한 시집으로 김은지의 ‘여름 외투’를 추천하고 싶다.

“내가 쓰고 싶은 건/ 여름 외투/ 겨울보다 추운 실내에서/ 어깨를 감싸주는/ 그런/ 시”라는 시인의 고백은 이 시집이 다정하고 따뜻한 위로에 어울린다는 증거가 될 수 있겠다. 이 시집의 가장 큰 미덕으로는 시인이 우리 삶의 작고 사소한 순간들을 편안한 언어로 그려내고 있다는 데 있는데, 시인의 언어에 마음을 기울이며 시집을 읽다 보면 마치 따뜻한 여름 외투를 걸친 것처럼 포근한 위로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한 편씩 읽고 가볍게 덮을 수 있다는 점에서 시집만큼 휴가철에 어울리는 책도 없지 않을까?

휴가철에 어울리는 또 다른 책으로는 앞서 소개한 것과는 정반대의 책을 제안하고 싶다. 미국 고딕 소설의 대가 셜리 잭슨의 단편집 ‘제비뽑기’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감각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여름에 맞춤한다. 셜리 잭슨의 소설은 평범한 인간에게 숨겨진 악의와 공포를 끄집어내는 데 있어 탁월함을 보이는데, 그의 소설을 읽으며 귀신보다 무서운 것은 인간이라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절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셜리 잭슨의 소설은 공포를 그려내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으로 확장시킨다. 인간에 대한 작가의 예리한 통찰이 우리 사회에 대한 이해로 이어지는 것이다. 특히 이 책의 표제작인 ‘제비뽑기’는 영문학사에서 빠지지 않는 고전이기에 아직 읽어보지 않았다면 꼭 추천하고 싶다. 25편이나 되는 작품이 수록되어 있기에 조금은 버겁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여유로운 휴가철을 충실하게 보낼 수 있는 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황인찬, 시인·'여름 연습’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