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이철원

추석이다. 귀성·귀경길은 지루함과의 싸움. 기차 안에서 후루룩 읽으며 길동무하기 좋은 책 10권을 추석 특집으로 소개한다. 출판·문학·학술·어린이 책 담당 기자들이 열띤 논의와 고민을 거쳐 골랐다. 기차가 배경인 시와 소설, 뉴욕을 배경으로 청춘들의 분투를 그린 그래픽 노블 , ‘가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에세이 등이다. 정보가 많은 책을 선호하는 독자를 위한 학술서, 아이와 함께 여행하는 부모들을 위한 그림책도 함께 준비했다.


묵묵히 나아가는 기차처럼 우리의 삶도 전진하고 있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정호승 시집| 창비|102쪽|9000원

리스본행 야간열차

파스칼 메르시어 장편소설| 전은경 옮김|비채|608쪽|1만9800원

문학작품에서 기차는 ‘떠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팍팍한 현실을 등지고 싶거나 새로운 변화가 절실히 필요할 때, 가상의 인물은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난다. 막다른 골목에서 길이 보이지 않아 기차를 타기도 한다. 기차는 철로를 따라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눈을 감고 가만히 몸을 뉜 채 실려 있기만 해도 좋다. 기차의 구동 방식이 누군가에겐 위로가 된다.

정호승 시인이 1999년에 펴낸 시집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를 펼쳐본다. 화자는 인생의 무정함에 지쳤다. ‘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 나는 몇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를 위해 단 한번도/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술 한잔’ 중에서). 눈물이 터져나올 것 같아 기차에 몸을 싣는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선암사’ 중에서).

사실 열차에 오르는 순간부터 이미 삶은 바뀌기 시작했다. 새로움을 원하는 열망이 나를 기차에 태웠기 때문이다. 파스칼 메르시어(본명 페터 비에리)의 장편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스위스 베른에서 평생을 고지식한 고문헌 학자로 지낸 그레고리우스가 어느 날 갑자기 리스본행 열차를 타고 떠나는 내용. 삶에 정체 모를 회의를 느낀 주인공은 낯선 도시에 도착해 생경한 언어를 더듬으며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 목적지를 알 수 없는 그레고리우스의 여정을 따라가며 독자는 자신의 삶을 톺아보게 된다. ‘이게 맞나?’ 하면서 말이다.

문학 속 기차는 위험하다. 떠나는 순간 삶이 송두리째 바뀌고,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을 향해간다. 명절에 타는 기차는 안전한 편이다. 왕복표를 끊었으니 며칠 뒤엔 반드시 돌아와야만 한다. 아마 도넛이나 호두 과자, 계란 같은 명랑한 간식도 준비했을 것이다. 그러니 안심하고 위험한 책을 읽어도 된다. /황지윤 기자


친구의 원고를 손에 넣었다… 나도 인기 작가 될 수 있을까

옐로 페이스

R.F. 쿠앙 소설|문학사상|444쪽|1만8000원

아래층에 부커상 수상자가 산다

케이트 가비노 지음|윌북|280쪽|1만7800원

기차에 올라 이 책들을 펼친다면 차창 밖 풍경을 살필 여유 따위는 없을 것이다. 첫 장을 넘기는 순간 아껴둔 초콜릿을 혀 끝에서 녹여 먹을 때처럼 남은 페이지가 줄어드는 걸 안타까워하며 잠시도 책에서 눈을 뗄 수 없을 테니.

중국계 미국인 작가 R F 쿠앙의 소설 ‘옐로 페이스’는 요즘 서구 문화계의 주요 이슈 중 하나인 ‘정치적 올바름’을 이리저리 비튼다. 주인공 주니퍼는 자신이 백인이라 작가로서 불리하다 생각한다. 주니퍼의 눈에 미국 출판계는 유색인 여성 작가가 쓴 유색인의 서사에만 호의적인 듯 보인다. 베스트셀러 작가로 승승장구하는 대학 친구 아테나를 볼 때마다 그가 아시아계 여성이라 유리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아테나가 돌연사한 후 그의 미발표 원고를 손에 넣은 주니퍼. 미들네임 ‘송’을 응용한 필명으로 아시아계인 척하면 작가로 성공할 수 있을까?

‘아래층에 부커상 수상자가 산다’는 필리핀계 미국인 작가의 그래픽 노블. 뉴욕대 영문과를 갓 졸업한 세 아시아계 여성 니나, 실비아, 시린이 브루클린의 한 집에 모여 살며 출판 편집자, 작가 등의 꿈을 향해 달려가는 이야기다.

괴팍한 상사, 적성에 맞지 않는 업무, 쥐꼬리만 한 월급…. 혼란과 고민으로 점철된 이 사회 초년생들에게 아래층에 사는 92세 할머니 베로니카가 정신적 지주가 되어준다. 알고 보니 베로니카는 수십 년 전 부커상을 받았지만 지금은 잊힌 소설가. 베로니카의 자서전을 출간하려는 삼총사의 프로젝트가 꿈을 향한 이들의 분투와 어우러져 펼쳐진다. “우리 모두 주석, 아니 주석의 주석이 될 운명이라 한들 어떤가요? 나는 지금도 날마다 글을 써요.” 자신이 세상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좌절하는 청춘들에게 베로니카가 건네는 이 위로를 마음에 새긴다면, 친척들의 명절 잔소리도 상처 받지 않고 흘려들을 수 있을지도. /곽아람 기자


“오지마, 힘들다”는 사랑의 말…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이 ‘가족’

엄마의 마지막 말들

박희병 지음ㅣ창비ㅣ404쪽ㅣ1만6000원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김하나·황선우 지음ㅣ이야기장수ㅣ320쪽ㅣ1만8500원

“피곤한데 또 왔나? 욕만 보인다.”

이번 추석, 부모님 댁에 들어서자마자 이런 말을 듣는다면, ‘사랑’이다. 명절을 잊지 않고 찾아와 준 자식에 대한 고마움, 흐뭇함 그리고 걱정이 섞인 말이리라. ‘엄마의 마지막 말들’을 쓴 박희병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가 말기암에 알츠하이머성 인지저하증을 앓았던 어머니에게 자주 들었던 말이기도 하다. “오지 마라. 힘들다” “니가 나 때문에 에비따(여위었다)” “니가 요새 마이 말랐다. 밥은 묵나?” 등 저자가 어머니를 간병하며 1년간 기록한 165개의 말들은 임종을 앞두고도 아들을 걱정하는 ‘사랑의 말’이었다.

투병 중인 어머니가 툭 내뱉은 말들을 자칫 의미 없다며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었지만, 평생을 가족이라는 특별한 관계 속에 살아온 자식에게는 이별의 시간 속 어머니의 말들은 그 의미가 남달랐다. 누구나 마주하게 될 가족과의 이별과 그 소중함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에세이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는 가족의 정의를 곱씹게 한다. 부산이 고향인 두 명의 40대 여성이 서울에서 고양이 네 마리와 함께 ‘조립식 가족(DIY FAMILY)’을 이루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룬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처음 알게 된 두 사람은 더 나은 주거 조건과 안정적인 동거인을 찾던 중 서로 잘 맞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망원동의 30평대 아파트를 공동명의로 매매한다.

20·30대 때 “혼자가 아니면서도 결혼도 아닌 삶의 방식은 없을까?” 끊임없이 되뇌었던 두 여성은 이제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이 내 가족”이라는 명확한 답을 내린다. 오늘날의 ‘가족’은 다양한 형태로 분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책으로, 최근 뉴욕타임스에도 저자들의 이야기가 소개됐다. 귀성길 기차 안에서 두 가족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동안 하지 못했던 ‘사랑의 말’을 연습해보면 어떨까. /김광진 기자


경인선 첫 삽 뜬 곳은 어디? 철로에 숨겨진 비화 속으로

소현세자는 말이 없다

이명제 지음 | 푸른역사 | 200쪽 | 1만5000원

한국철도사

손길신 지음 | 북코리아 | 516쪽 | 3만2000원

열차는 바쁜 일상 중엔 좀처럼 기회가 없었던 여러 상념을 떠올리기 좋은 장소다. ‘소현세자는 말이 없다’는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를 둘러싼 한국인들의 ‘아쉬움’에 대해 정면돌파하는 책이다. ‘세자가 요절하지 않고 임금이 됐더라면 조선은 일찌감치 문명개화를 이루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은 오래도록 한국 역사의 ‘떡밥’과도 같았다.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간 뒤 서양 선교사 아담 샬을 만나 서양 문물을 수용하려 했다는 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7세기 조·청 관계사 전문가인 저자 이명제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21세기에 사는 우리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인물이었던 소현세자가, 후대의 근대화 염원에 의해 지나치게 미화됐다”고 분석한다. 실제 모습을 보면 세자는 신체적으로 나약했고 정치적으로 조선·청 양국으로부터 제약을 받았던 비극적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아담 샬과 만났더라도 깊은 교류가 있었는지도 의문이고, 당시 선교사가 ‘근대 문명’을 지닌 사람들도 아니었다. 책은 “역사 속 인물이 반드시 영웅이었으리라 여기는 것은 착각”이라는 진중한 한 마디를 남긴다.

여행 관련 서적은 여행 중에 읽는 게 가장 큰 여운을 남기며, 음식 관련 책은 김밥이라도 먹으면서 보는 게 좋다. 열차 안에서 철도의 역사를 읽는다면 어떨까. 손길신 전 철도박물관장이 쓴 ‘한국철도사’는 제목에서 주는 인상과는 달리 딱딱하고 체계적이라기보다는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많이 등장하는 책이다.

조선 왕조의 철도 부설은 1882년 처음 논의됐으며 경인철도의 첫 삽을 뜬 곳은 인천시 창영동 쇠뿔고개였다는 등, 철도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빠져들게 할 비사(秘史)가 펼쳐진다. 지금은 KTX가 다니는 전라선 철도는 1910년대에 농산물 운반을 위해 사람이 미는 ‘인차철도’를 놓으려 했던 것이 허가가 나지 않자 협궤철도로 계획을 바꿔 시작했다는 등 끊일 줄 모르는 이야기를 읽다 보면 어느 새 열차는 목적지에 도착했을 것이다. /유석재 기자


두둥실 떠오른 추석 보름달… ‘달토끼’의 비밀을 알고있니

달토끼

최영아 글·그림

긴긴밤

루리 글·그림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은 ‘한가위’지만, 올해도 둥근 보름달은 두둥실 떠오를 것이다. 달을 보면 어른도 아이도 같은 상상을 한다. 달나라에 사는 토끼다. 통일신라 유적의 수막새에도, 조선 왕실의 은주전자에도 새겨져 있다. 옛이야기 속 토끼는 어떻게 달에 살게 되었을까. 그림책 ‘달토끼’가 그 비밀을 알려준다.

토실토실한 토끼 도련님과 보름달이 웃으며 손 인사를 나눌 때, 아뿔싸! 별똥별이 달에 부딪혀 조각 하나가 땅으로 떨어진다. 토끼는 울상이 된 달님에게 이 조각을 돌려주고 싶다. 병풍을 가져다 널을 뛰어보고, 뒷동산 버드나무 제일 높은 그네도 타보지만 아슬아슬 닿질 않는다. 토끼는 마침내 기발한 방법을 생각해낸다. 나무와 풀 같은 배경부터 집과 동물들까지 우리 민화의 아름다움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녹여 넣은 창작 그림책. 연못 속 물고기까지 캐릭터 표정이 살아 있어, 함께 애가 타다가도 슬며시 웃음 짓게 된다. 글 없는 그림책인데도 재잘재잘 이야기 소리가 들리는 듯 생동감 넘친다.

긴 한가위 연휴는 떠나온 사람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때. ‘긴긴밤’은 요 근래 고향으로 돌아가는 존재들에 관한 이야기 가운데 가장 많은 독자를 울린 책일 것이다. 판매량 50만부를 넘어서고 판소리극과 뮤지컬로도 만들어졌다. 어린이·청소년보다 더 많은 어른들이 읽고 ‘인생 책’으로 꼽길 주저하지 않는다.

지구상 마지막 남은 흰바위코뿔소 노든, 성질 나쁜 펭귄 치쿠, 그리고 치쿠가 파괴된 동물원에서 갖고 나온 버려진 알에서 태어난 어린 펭귄 ‘나’의 이야기. 공통점 하나 없을 것 같은 존재들이 길고 험한 여정을 서로 의지하며 ‘우리’라 부를 수 있는 사이가 된다. “이리 와. 안아 줄게. 오늘 밤 내내 말이야. 오늘 밤은 길거든. 네 아빠들의 이야기를 해줄게. 너는 파란 지평선을 찾아서, 바다를 찾아서, 친구들을 만나고, 우리 이야기를 전해 줘.” 코뿔소 노든의 말이 오래 마음을 울린다. /이태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