쥘 르나르의 ‘홍당무’(Poil de carotte·1894)는 19세기 말 프랑스 시골을 배경으로 한다. 붉은 머리털 때문에 홍당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소년이 겪는 일상적 경험이 작품의 주된 내용이다. 그는 어머니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형과 누나에게도 구박받기가 일쑤여서 흡사 개밥에 도토리 같은 신세다. 역설적이게도 이 덕분에 소년의 생활기는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인 삶의 면면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사냥해 온 자고새의 숨통을 끊으려 애쓰는 홍당무의 모습은 처연하면서도 우스꽝스럽다. 가족에게 의연함을 보이고 싶은 자존심과 동물을 향한 연민 사이에서 갈등하는 소년의 딱한 처지는 웃음과 눈물이 수시로 교차하는 삶의 본질을 보여준다. 비록 살아가는 시대와 장소가 다를지라도 우리네 삶이 한 편의 희비극과도 같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는 것이다.

‘홍당무’는 작가 자신에 의해 희곡으로 각색되어 1900년 3월 초연되었고, 이후 지속적으로 연극 무대에 올려지고 있다. 또한 여러 차례 영화화되고 TV 드라마,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되어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국내에는 1977년에 계몽사 문고판으로 번역되어 소개된 이래 비룡소와 시공주니어를 포함한 다수의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작품의 프랑스어 원제인 ‘Poil de carotte’를 그대로 옮기면 ‘당근 머리털’이라는 뜻이니 이쪽이 더 정확한 제목일 수 있지만, 아무래도 ‘당근 머리털’보다는 ‘홍당무’라고 하는 편이 더 친숙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빨간 머리 앤’(Anne of Green Gables·1908)을 ‘녹색 박공집의 앤’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전적 이야기를 가감 없이 기록한 작가 덕분에 ‘홍당무’는 지나간 한 세대의 삶을 생생히 증언하는 귀중한 기록으로 남을 수 있었다. 당대의 생활과 문화를 세밀하게 묘사하면서도 고통과 환희가 혼재하는 인간 삶의 보편성에 주목한 이 작품을 읽으며, 과거의 삶을 들여다보는 동시에 현재의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를 가져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