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의 한국사

김동주·김재원·박우현·이휘현·주동빈 지음 | 서해문집 | 320쪽 | 2만1000원

‘강나루 지나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로 시작되는 시는 많은 이에게 친숙하다. 박목월 시인이 1943년에 쓴 ‘나그네’다. 그런데 이 시는 한때 논란이 인 적이 있다. 4연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때문이다. “혹독한 일제 말에 여유롭게 술을 빚는 농촌을 그리다니 말이 되느냐”란 얘기였다.

하지만 이 책은 “그 비판은 온당하지 않다”고 말한다. 1940년 한 해 동안 식민지 조선에서 소비된 술은 집계된 것만 5억3500만L, 15세 이상 인구가 1500만명 정도였으니 한 명이 1년에 35.6L 이상 술을 마신 것이다. 2021년 한국의 1인당 알코올 소비량이 7.7L인 것을 보면 놀라운 일이다. 어떻게 된 것일까? 그토록 가난했을 줄 알았던 일제 말 조선인이, 알고 보니 다들 꽤 풍족하게 살았던 술고래들이었다는 말인가?

그 까닭은 곧 밝혀진다. 당시 사람들에겐 술, 곧 막걸리가 식량이었기 때문이다. 막걸리는 농사를 지으면서 야외 노동을 견디게 하는 ‘마시는 밥’이었다. 1960년대부터 술 빚는 데 양곡 사용을 제한하면서 막걸리의 시대는 저물고, 소주 소비량은 1965년 연간 7만kL에서 1970년대 말 50만kL로 폭증하며 주류계의 왕좌를 차지했다. 고도 성장기 고된 산업 역군이었던 한국인은 값싸게 마시고 빨리 취할 수 있는 소주를 선호했던 것이다. 그런데 1987년 이후 그 자리가 맥주로 넘어간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3저 호황과 중산층 대두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덜 취하면서 세련되고 여유로운 생활을 즐기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의미가 된다.

1964년 서울 응암국민학교에서 학교 급식으로 빵을 먹는 아이들. 당시 정부는 쌀을 절약하기 위해 대대적인 혼·분식 장려 운동을 펼쳤으나, '흰 쌀밥'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서해문집

‘우리는 무엇을 먹고 마시고 탐닉했나’란 부제가 붙은 이 책은 한국사학계에서 근·현대사를 전공한 신진 연구자 5명이 함께 쓴 20세기 중후반의 생활·미시사(微視史)라고 할 수 있다. 현대사 역사책 속에서 정치적 격동과 경제성장의 그래프 뒤에 가려진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사다. 소비가 ‘자본주의 세계 질서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 상황에서, 쌀, 물, 라면, 커피, 부동산, 가전, 술, 음악, 영화에서 도박과 마약까지 14개 테마에 대해 보기 드문 역사적 기술을 펼친다.

한국의 식량 소비사(史)는 매우 독특하다. 1960년대가 배경인 만화 ‘검정 고무신’에서 가장인 아버지는 실직을 앞두고 ‘앞으론 흰 쌀밥을 먹기 힘들 것’이라 털어놓는다. 부친의 재취업 소식을 들은 막내는 ‘이제 쌀밥 먹을 수 있는 거야?’라며 기뻐한다. 이건 만화적 연출이 아니라 20세기 한국인의 유난스러운 쌀밥 열망에 기반한 것이다. 식민지 시기부터 미군정, 6·25를 거치며 쌀을 박탈당한 결핍의 인이 새겨졌다는 것이다.

쌀 이야기는 한국인 한 명 한 명이 모두 주인공인 고난 극복의 대서사시였다. 여전히 식량이 부족했던 1960년대, 정부는 쌀 대신 보리와 밀을 소비하자는 혼·분식 장려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그러나 쌀밥으로 도시락을 싸와 혼나던 부잣집 친구를 보고 ‘나도 저렇게 혼나 봤으면 좋겠다’는 회고가 있을 만큼 쌀밥은 여전히 갈망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조금 여유로워진 1970년대에도, 실로 ‘밥믈리에’라 할 만큼 한국인의 ‘쌀 입맛’은 까다로웠다. ‘기적의 볍씨’라 불린 통일벼와 캘리포니아산 칼로스 쌀은 끝내 맛 때문에 외면당했다.

‘물’의 소비사는 조금 묘하다. 우물이나 강물을 퍼 생활용수로 쓰던 100년 전에 비해 수도 시설은 장족의 발전을 이뤘으나, 북청 물장수가 물지게로 물을 갖다 주던 장면과 택배 기사가 생수통 묶음을 배달해 주는 모습을 교차하면 기시감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토록 선망의 대상이었던 가전(家電)이 1970년대 들어 TV, 냉장고, 세탁기 순으로 대중화되는 과정은 극적이라 할 만한데, 세탁기가 가장 늦었던 이유는 식모의 존재 때문이었다고 분석한다.

대중가요의 소비를 서술한 결과도 흥미롭다. 권력은 늘 ‘의도’를 지니고 대중문화 정책을 펼쳤으나, 대중은 결코 그것에 맞춰 문화를 향유하지도 않았고 반드시 적극적으로 저항하지도 않으면서 다들 꿋꿋이 엄혹한 시대를 이겨냈다는 것이다. 책 전체를 놓고 볼 때 뭔가 다른 책에 들어갔어야 할 원고가 잘못 편집된 듯한 부분이 일부 보이는 것은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