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속의 풍경들

리카르도 렌돈 지음 | 누리아 솔소나 그림 | 남진희 옮김 | 로즈윙클프레스 | 64쪽 | 2만8000원

“바로 그때 바람이 모든 장애물을 다 없애버리기라도 할 듯이 객차 지붕의 눈을 쓸어내렸고, 어디선가 떨어진 철판 조각을 흔들어댔다. 저 멀리에서 귀를 쩌렁쩌렁 울리는 기적 소리가 음산하면서도 서럽게 울부짖었다. 무시무시한 눈보라였지만 그녀에겐 그 어느 때보다 더 아름답게 보였다.”

러시아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사이의 광활한 황무지를 달리는 기차 안, 레프 톨스토이의 걸작 '안나 카레니나' 속 '안나'는 자기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 미남자 브론스키 백작과 재회한다. /로즈윙클프레스

레프 톨스토이(1828~1910)의 ‘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는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했던 미남 군인 브론스키 백작을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사이 황무지를 달리는 기차 안에서 다시 마주친다. 금지된 욕망의 유혹에 휩쓸리던 그 순간, 안나의 마음 속에선 열차 창 밖의 눈폭풍 만큼이나 격렬한 소용돌이 바람이 몰아쳤을 것이다.

문학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언어로 쌓아올린 이야기의 풍경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일이다. 이야기는 아무 데서나 일어나지 않으니까. 위대한 걸작 속 배경과 풍경은 등장 인물들 만큼이나 중요한 또 다른 주인공이다.

쥘 베른의 '지구 속 여행'에서 지구 아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인 아이슬란드 스네펠스 화산. /로즈윙클프레스

책을 열면 문학 작품 25편 속 풍경이 섬세한 세밀화로 널찍하게 펼쳐진다. 그림이 불러 일으키는 상상력은 어떤 사진보다 힘이 세다. 작품 속 인용문과 작품과 작가에 대한 짧고 굵은 설명까지 합세해 이야기의 풍경 속으로 읽는 이의 손을 잡아끈다.

쥘 베른의 주인공들이 ‘지구 속 여행’(1864)을 시작하는 아이슬란드의 스네펠스 화산,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1922)가 깨달음을 얻으려 고행하다 마주친 인도 북부의 숲과 거대한 강, 입양 남매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이 집착적 사랑에 빠지던 잉글랜드 요크셔의 ‘바람의 언덕’(1847), ‘작은 아씨들’(1868)의 웃음소리가 까르르 붉은 낙엽처럼 쏟아질 것 같은 미국 매사추세츠의 시골 마을….

미시시피강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 속 미시시피강. /로즈윙클프레스

톰 소여와 허클베리 핀이 미시시피강의 얕은 모래톱에 서면, 독자의 눈에도 강물 위로 미끄러지는 증기선 연기가 강바람에 흩어지는 모습이 보인다. 열한 살 빨간머리 소녀 앤이 프린스 에드워드 섬의 에어번리 마을에 도착했을 때, 독자들도 희망에 찬 앤과 함께 초록 지붕 집과 푸른 목장 너머로 바다가 반짝이는 풍경을 본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1985) 속 콜롬비아 막달레나강의 황토 물줄기, 르 클레지오의 ‘사막’(1980) 속 모로코 사하라의 황금빛 모래, 미시마 유키오의 ‘파도 소리’(1954) 속 일본 이세만(灣) 우타섬 앞바다 파도의 흰 포말 위로 늘어진 붉게 물든 단풍나무들도 모두 그림 한 장 속에 담겨 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 '콜레라 시대의 사랑' 속 콜롬비아 막달레나강. /로즈윙클프레스

책을 펴낸 로즈윙클프레스 문성미 대표는 “지난해 가을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부르고스라는 한 작은 도시의 예술서점에서 이 책을 처음 만나 넋을 잃고 빠져들었고 꼭 한국에서 펴내겠다고 마음 먹었다”고 했다.

오래, 꼼꼼히 들여다볼수록 더 많은 이야기들이 보이는 책. 그림 한 장으로 묘사된 이야기의 앞뒤가 못견디게 궁금해지고, 책을 찾아 읽고 싶어지는 마음이 드는 건 덤이다.

'문학 속의 풍경들'. /로즈윙클프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