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트럼프 미 대통령 복귀, 한강의 아시아 여성 첫 노벨 문학상 수상, 국내의 비상계엄과 대통령 탄핵 등 놀라운 일이 많았다. 내일을 예측하기 어려울 때 불안은 싹튼다. 2024년 ‘올해의 책’도 불안한 시대를 반영하는 듯하다. 동네책방 운영자 20명, 대형 서점 MD 13명, 북칼럼 필진 5명, 본지 문화부 기자 5명 등 43명이 3권씩 추천한 책 중 Books팀이 득표 수와 국내외 이슈 등을 고려해 ‘올해의 책’ 10권을 최종 선정했다.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책은 ‘불안 세대’였다. 온라인에 늘 접속하면서도 연결을 갈구하는 Z세대의 불안한 정신 건강에 주목한다. 노벨 문학상 수상 영향인지 시·소설 같은 문학 책 추천이 많았다. 머리 아픈 현실을 벗어나 가상 세계의 이야기에 기대는 독자들이 많았던 것으로도 풀이된다.
[인문 사회] 불안세대|조너선 하이트 지음
Z세대의 우울증 치유하려면 스마트폰·소셜미디어 금하라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 뉴욕대 교수가 ‘바른 마음’(2012) 이후 12년 만에 내놓은 단독 저서. ‘스마트폰이 일상화된 세계에서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라는 주제의식을 가지고 썼다. 지난 8월 국내 출간돼 5만부 넘게 팔렸다. 구매자 중 40대 여성 비율이 가장 높다.
Z세대의 우울증 급증을 “소셜미디어에서 늘 좋은 모습만 보여야 하기 때문”이라 분석한다. 아이들을 불안의 늪에서 구하기 위해 고등학교 진학 전까지 스마트폰을 금지하고, 16세가 되기 전엔 소셜미디어를 사용하지 않도록 하자고 제안한다.
소설가 장강명이 “미성년자의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 사용을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과격하게 들리지 않는다.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야 할 사회를 생각하면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마음마저 든다”며 추천했다. /곽아람 기자
[정치 외교] 잘못된 단어|르네 피스터 지음
”NYT를 이끄는 건 트위터” PC에 발 묶인 표현의 자유
이 책의 주제는 이 문장에 응축돼 있다. “뉴욕타임스를 이끄는 것은 편집장이나 발행인이 아니라 트위터다.” ‘정치적 올바름’을 지킨다는 미명 아래 ‘표현의 자유’가 억압받는 미국 현실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분석한다. 저자는 독일 진보 언론 슈피겔의 워싱턴 지국장.
미국 수정헌법 제1조에서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는 좌파를 위한 무기이자 약자들이 자신을 방어하는 수단이었는데 ‘깨어있다’ 자부하는 소수의 사람이 정의와 진리를 독점하고 의견의 통로를 좁히려 애쓰고 있다는 것이다. “PC주의가 어떻게 민주주의를 망가뜨리고 있는지를 역설하는 책. 정의라는 허울을 쓴 독단과 독선을 정교하게 다뤘다”는 추천평이 있었다. 구매자 중 50대 남성 비율이 가장 높았고, 40대 남성이 그 뒤를 이었다. /곽아람 기자
[사회]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강지나 지음
빈곤 가정 아이들의 삶 통해 교육·노동·복지 문제점 고발
”처음 만날 때는 열예닐곱 살의 청소년이었던 이들이 지금은 서른 즈음의 청년이 되었다.
”가난한 가족의 우울감을 알려준 소희, 가난하지만 긍정을 잃지 않았던 지현, 가난에서 벗어나 좋은 아빠가 되겠다던 영성 등. 25년 경력 교사이자 청소년 정책 박사 학위를 받은 저자가 빈곤 가정에서 자란 8명의 아이와 10여 년 만나면서 가난한 청소년이 청년이 되면서 처하는 사회적 문제를 낱낱이 고발한 책이다. 구매자 중 40대 여성 비율이 가장 높았다.
책은 통계로 말하는 정책집들의 ‘공리공론’이 아닌, 아이들의 성장기를 토대로 우리 사회의 교육·노동·복지의 문제점을 피부에 와 닿게 지적한다. 김영건 속초 동아서점 대표는 “우리가 믿고 있는 현실이 아닌, 우리가 딛고 있는 현실의 질감을 해부하고 증언하는 책”이라고 했다. /김광진 기자
[소설] 이중 하나는 거짓말|김애란 장편소설
13년 만의 김애란 장편소설… 세 고교생의 씁쓸한 성장기
’두근두근 내 인생’ 이후 13년 만에 찾아온 김애란의 장편. 소설가는 “‘이야기란 무엇인가’에 대한 변주이자 뒤집어진 성장소설”이라고 소개했다. 세 고등학생을 둘러싼 이야기지만, 푸릇푸릇 밝은 소설을 기대하면 곤란하다. 김애란이 그리는 세계는 대체로 비정하기 때문. 그는 “삶은 가차 없고 우리에게 계속 상처를 입힌다”고 말한다.
다작하지 않는 김애란을 모두가 손꼽아 기다려온 듯하다. “어떤 문장들은 영원히 늙지 않는 것을 보여주었다”(김유리 예스24 PD) “김애란만큼 믿음직한 선택지가 또 있을까”(김효선 알라딘 MD) 등 호평이 쏟아졌다. 시 전문 서점 위트앤시니컬 대표인 유희경 시인은 “서사는 더 견고해졌고 감각적인 문장은 여전하다”며 추천했다. 30~40대 여성이 구매자의 절반 이상이다. /황지윤 기자
[소설] 쓰게 될 것|최진영 소설집
전쟁터 같은 세상 속에서 ‘쓰다’의 의미를 고민하다
2006년 등단한 최진영은 요즘 왕성하게 쓴다. 이미 정평이 났다. 이번 ‘올해의 책’ 설문에서 그에 대해 “한국 문학 애독자에게 가장 친숙한 작가”(구환회 교보문고 MD), “불가항력적으로 고통을 주는 세상에서도 아름다움이라는 틈은 늘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정도선 책방 소리소문 대표) 등의 추천평이 이어졌다.
표제작은 전쟁터에서 살아가는 엄마와 딸을 그린다. 우리 생활이 전쟁터라는 비유다. 동사 ‘쓰다’가 가진 여러 의미를 고민했다. 작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홈 스위트 홈’도 돋보인다. 죽음을 앞둔 화자가 주도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삶을 꾸려간다. 구매자 중 30대 여성 독자 비율이 가장 높다. 권세라 바름책방 대표는 “점점 깊어지는 작가의 글에 매력을 느낀다”며 권했다. /황지윤 기자
[시] 시|라이너 쿤체 시집
날카로우면서도 섬세한 독일 시인의 문학 세계로…
라이너 쿤체는 1933년 동독에서 태어나 1962년부터 시인으로 활동해왔다. 간결하면서도 날카로운 비판 의식, 섬세한 감성이 어우러진 시를 쓴다. ‘나와 마주하는 시간’ ‘은엉겅퀴’ 등이 대표 시집이다. 이번 시 전집에는 ‘민감한 길’(1969), ‘나와 마주하는 시간’(2018) 등 아홉 권의 시집이 수록됐다. 시인의 삶을 따라가 볼 수 있다.
신승한 광운대 교수가 “큰 시인의 문학적 업적을 한 권의 책에 담았다”며 추천했다. 조예은 버찌책방 대표는 “시대를 향한 비판과 저항, 삶에 대한 성찰을 노래한다”며 “패브릭 양장 커버가 전하는 따뜻한 질감 덕에 펼쳐볼 때마다 저절로 쓰다듬게 된다”고 평했다. 구매자 중 50대 여성이 가장 많고, 40대 여성과 50대 남성 구매자 비율도 높다. /황지윤 기자
[에세이]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패트릭 브링리 지음
떠난 형 그린 10년 애도 여정… 출간 1년 만에 24만부 판매
이 책만큼 올 한 해 뜨거운 사랑을 받은 에세이가 있을까. 주제는 무겁고 진지하다. 대중에게 낯선 미술품이 수없이 등장하는데 도판 한 장 실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출간 1년 만에 24만부 팔렸다. 구매자 중 40~50대 여성 비율이 특히 높다.
’뉴요커’ 직원이었던 저자는 형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자 직장을 그만두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경비원으로 취직한다. 이후 이어진 10년간의 애도 여정을 곡진하게 그렸다. 저자는 본지 인터뷰에서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아 한동안은 그저 가만히 서 있고 싶었는데, 내가 아는 가장 아름다운 장소에서 프로페셔널하게 가만히 서 있을 수 있는 이 놀라운 직업을 찾았다”고 말했다. 주선경 주책방 대표, 김민희 글한스푼 대표 등이 “예술을 통해 위로를 주는 책”이라며 권했다. /곽아람 기자
[학술] 제5공화국|강원택 지음
5월 17일 비상계엄 확대… 그들은 국회를 봉쇄했다
여전히 학문적으로는 사각지대에 남아 있던 1980년대 초중반의 정치사(史)를 본격적으로 파헤친 연구서. “역설적이지만, 제5공화국은 한국 민주화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시기였다”고 결론짓는다. 5공을 거치고 나서야 한국은 군부 권위주의를 거부하고 민주주의를 유일한 통치 원리로 받아들이게 됐다는 것이다.
책은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이 12·12로 군권(軍權)을 장악한 뒤 사실상의 쿠데타인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로 정치 권력까지 거머쥐는 과정을 세밀하게 서술한다. 정치 활동을 전면 금지한 포고령과 함께 신속한 병력 출동을 통해 요인을 체포하고 국회를 점령해 계엄령 해제를 봉쇄하는 과정은 전광석화와도 같았다. 당연히 수십 년 전의 역사로만 알았던 이 모습이 올해 연말에 다시 현실에서 소환될 줄은 몰랐다. /유석재 기자
[과학] 물질의 세계|에드 콘웨이 지음
모래·소금 등 여섯 가지 물질… 기술 발전과 혁신 지탱해왔다
인류는 스마트폰 혁신에 이어 양자 컴퓨터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다. 바이오 산업은 더욱 정교해지고 건축물은 튼튼하면서도 높아진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구성하는 물질이 무엇인지 모른 채 살아간다. 모래, 소금, 철, 구리, 석유, 리튬. 책은 이 여섯 가지가 인류 역사상 필수불가결한 물질로, 암흑기에서 고도로 발달한 문명 사회로 인간 세계를 확장시켰다고 한다.
영국 저널리스트인 저자가 유럽 광산, 대만 반도체 공장, 칠레 사막의 소금호수 등 세계 곳곳을 취재하며 여섯 가지 물질을 파헤친다. 기술과 현물 투자에 관심이 높은 4050 남성들이 가장 많이 샀다. “혹자는 주식 시장을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라는데 충분히 설득력 있다”(이숙희 꿈틀책방 대표), “책 한 권에 세계를 담았다”(이소영 마그앤그래 대표) 등의 추천평이 있었다. /김광진 기자
[그림책] 알사탕 제조법|백희나 글·그림
입에 쏙 넣으면 마법이 뿅뿅… 알사탕 만드는 법 알려줄까?
그림책 ‘알사탕’(2017) 속 외톨이 동동이는 문방구 할아버지에게서 색색깔 알사탕을 얻는다. 사탕을 입에 넣자 마법이 펼쳐진다. 거실 소파와 강아지 구슬이, 잔소리쟁이 아빠와 돌아가신 할머니까지,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책을 보면 궁금해진다. 알사탕은 어떻게 만든 거지?
한국 최초로 ‘아동문학 노벨상’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추모상을 받은 백희나 작가의 베스트셀러 그림책의 외전(外傳) 격. 제1 원칙은 ‘마음이 깨끗한 자만이 만들 수 있고, 효능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자못 진지한 요가 준비 운동부터, 주재료인 별빛을 잘 우려내기 위한 ‘꿀팁’까지 다 담겼다.
흐뭇하게 웃으며 자꾸 펼쳐보게 되는 따뜻한 책. 예스24의 백정민 유아 MD는 “작가의 2년 만의 신작으로, 손바닥만 한 책 사이즈도 큰 화제가 됐다”고 했다. /이태훈 기자
2024년 올해의 책 선정자들
동네 책방 운영자 건우네책방 박희문, 글한스푼 김민희, 꿈틀책방 이숙희, 다즐링북스 홍지영, 마그앤그래 이소영, 바름책방 권세라, 버찌책방 조예은, 보배책방 정보배, 빈칸놀이터 이세연, 빛나는 친구들 공인애, 서촌그책방 하영남, 속초 동아서점 김영건, 시집서점 위트 앤 시니컬 유희경, 완벽한 날들 최세연, 잘 익은 언어들 이지선, 주책공사 이성갑, 주책방 주선경, 쩜오책방 이정은, 책방 소리소문 정도선, 책방심다 김주은
서점MD 구환회·김정미·이주호·한재국·한지수(교보문고), 김경영·김효선·임이지·박동명(알라딘), 김유리·백정민·손민규·이주은(예스24)북칼럼 필진 박소령 비즈니스 칼럼니스트, 신승한 광운대 교수, 우석훈 경제학자, 이수은 독서가, 장강명 소설가
문화부 기자 곽아람, 김광진, 유석재, 이태훈, 황지윤 (가나다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