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리즘, 패러다임, 법
로레인 대스턴 지음 | 홍성욱·황정하 옮김 | 464쪽 | 까치 | 2만3000원
법과 규칙에 대한 존중이 무너진 듯한 요즘, ‘규칙’을 밀도 있게 분석한 책이 때마침 출간됐다. 저자는 미국의 과학사학자인 로레인 대스턴(74). 과학사학자 겸 과학철학자인 토머스 쿤(1922~1996) 이후 과학사학계를 이끌어 온 세계적인 학자다. 독일 베를린 막스 플랑크 과학사 연구소 명예소장이자 베를린 고등연구소 종신회원이다.
◇규칙의 세 범주와 어원
책은 인간이 어떻게 규칙을 만들고, 바꾸고, 없애는지 살핀다. 그렇게 등장한 규칙이 현실을 어떻게 정의하고, 재단하고, 통제하는지 짚는다. 대스턴은 인류 사회의 수많은 규칙을 알고리즘·패러다임·법 등 세 종류로 나눠 살핀다. 고대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현대의 토머스 쿤까지, 뉴턴·비트겐슈타인·로크·칸트 등 시대와 분야를 종횡무진 가로지른다.
규칙의 탄생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규칙’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카논(kanon)은 지중해의 습지와 중동의 사구 지역에서 자란 거대한 지팡이 식물인 물대에서 유래했다. 수천년간 이 지역에서는 물대로 저울대, 막대 자 등을 만들었다. 규칙은 정확한 측정과 계산을 의미했고(알고리즘), 이를 통해 이상적인 모델(패러다임)을 생산·복제할 수 있었다.
한 사회의 강제력 있는 규칙이 곧 ‘법’이다. 규칙의 어원은 지시·명령·통치 행위와 관련이 깊다. 카논과 동일한 라틴어에 해당하는 레굴라(regular)는 지팡이라는 의미와 연관되며, 통치하다(regere), 왕(rex) 등 단어와 어원을 같이한다. 저자는 “지팡이 식물의 이미지는 수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규칙의 본질을 상징한다”며 “‘규칙은 통치한다(Rules rule)’”고 쓴다. 규칙의 역사는 이 세 가지 범주가 확산, 연결되는 역사다.
◇실패 사례로 보는 규칙의 본질
미국출판협회 프로즈상 과학·의학·기술사 부문 수상작인 이 책은 일종의 학술서다. 하지만 저자가 예로 드는 깨알 같은 역사적 사건들 덕에 독자는 책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유럽의 ‘사치 금지법’이 흥미롭다. 약 1200~1800년에 걸친 이 법은 실패한 규칙의 대표적인 사례다. 예를 들면 황금 레이스, 짧은 더블릿(doublet·꼭 끼는 남성용 상의), 벨벳 장식 등 금지된 최신 유행과 사치스러운 섬유를 상세히 나열한 규정이나 칙령이 약 500년간 유지됐다.
저자는 “규제하려는 자와 피하려는 자 사이의 쫓고 쫓기는 경쟁을 촉발했다”며 “관료들은 유행을 좇아가기 위해 앞다투어 헛된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미 최신 유행보다 한 시절 넘게 뒤처져 개정되는 규칙을 발표하고 또 발표했다”고 썼다. “패션지 ‘보그’의 어느 편집자라도 사치 금지법이 정점에 달했을 때보다 세부 사항을 더 자세히 다루지는 못할 정도였다.”
‘사치 금지법’은 규칙의 “골치 아픈 본질”을 일러준다고 저자는 말한다.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규칙에도 해석의 여지가 있다는 점. 세분화된 금지 품목을 교묘히 피해 새로운 사치품을 만들어 파는 사람은 언제나 존재했다. 길고 뾰족한 신발이 한 해의 칙령으로 금지되면, 그다음 해에는 하이힐과 버클 장식이 유행하는 식. 제작자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예외를 찾아내며, 새로운 유행을 선도해나가곤 했다. 또 수세기에 걸친 실패에도 이런 규정이 이어져 왔다는 점. 마치 “정부가 탈세자에게 항복하는 일이 없을 것” 처럼 말이다. “원하는 결과를 얻으려면 명시적 규정보다 암묵적 규범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규칙의 아이러니도 생긴다.
◇규칙과 예외, 뗄 수 없는 관계
독자들이 가장 흥미롭게 읽을 장은 마지막 부분인 8장과 에필로그일 테다. 8장은 ‘규칙의 변용과 파괴’를 다룬다. 특히 “최고 권력자가 선포한 예외 상태는 모든 규칙을 파괴한다”는 20세기 독일 정치 이론가 카를 슈미트(1888~1985)를 인용한 부분을 유심히 읽게 된다. “예외를 선언할 권력은 현대 정치 이론의 핵심적인 문제이다. 누가 법을 변용하는 것을 넘어서 법을 파괴할 수 있는가?” 베이컨, 홉스, 로크 등의 학문적 관심사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온다.
저자는 “어떤 입법자도 미래의 모든 상황을 예견할 수 없었고, 그 때문에 모든 법은 예외를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다”고 쓴다.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근대 국가에서조차 예외가 완전히 제거될 수 없다”는 것이다. “상황의 불확실성과 변덕은 여전히 때때로 규칙을 압도하며 아무리 신중하고 장기적 관점을 지닌 규칙 체계일지라도 예외 없이 작동하지는 못한다.” 우리는 삶을 안전하게 지켜줄 튼튼한 가드레일 같은 규칙을 갈망하지만, 규칙이 위배되거나 무력화될 가능성도 배제해선 안 된다. 규칙과 예외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