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의 노래

폴 린치 장편소설 | 허진 옮김 | 은행나무 | 364쪽 | 1만8000원

‘무언가가 집 안으로 들어온 느낌이 든다, (중략) 저 어둠의 일부가 집으로 들어왔다.’

작년 11월 말에 출간된 ‘예언자의 노래(Prophet Song)’는 전체주의에 휩쓸린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한다. 비상대권법이 발효돼 ‘가르다 치안국(GNSB·가르다는 아일랜드 경찰을 칭하는 표현)’이 반(反)정부 인사로 분류된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인다.

소설은 사복 경찰이 늦은 시각 주인공 아일리시의 집 현관문을 두드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아일리시의 남편이자 네 아이의 아버지인 래리는 곧 구금된다. 불법 구금이지만, 이미 불법과 합법의 구분이 무의미해졌다. 상황은 갈수록 나빠진다. 아일리시는 혼돈 속에서 생존을 위해 분투한다. 국경을 넘고, 바다로 향한다. 사회의 비극이 개인의 심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치밀하게 좁혀 들어간다.

‘아일랜드 문학의 르네상스를 이끄는 빛’(뉴욕저널오브북스)이라는 평가를 받는 소설가 폴 린치(48)를 서면으로 만났다. 린치는 이 책으로 2023년 영국 부커상을 받았다. 그는 “부커상 수상 이후 여행을 다니다 더블린으로 돌아와 조용한 일상을 즐기고 있다”고 전했다.

– ‘예언자의 노래’라는 제목이 섬뜩하다.

“예언서라는 뜻은 아니다. 물론 경고성 이야기로 읽힐 순 있겠지만. 소설 도입부를 보면, 어느 국가든 이 지경이 될 수 있다. 제목의 의미는 소설 마지막에 가서야 알 수 있다. 일종의 깨달음이다. 성경은 종말을 ‘대재앙’이라고 예언한다. 그러나 이는 신화일 뿐이다. 종말은 항상 일어나고 있다. 지역적이기도 하다. 당신의 도시, 당신이 사는 동네로 와서 문을 두드린다. 당신의 가족·공동체·민족에게는 끝이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뉴스를 통해 이를 볼 뿐이다. 인간이 처한 환경이다. 이런 일이 무한히 반복된다.”

폴 린치는 소설의 배경을 가상의 공간이 아닌 아일랜드로 설정했다. 그는 “독자들은 ‘이런 일은 불가능해’라고 생각하겠지만, 소설은 이것이 가능한 일임을 보여준다”고 했다. /Joel Saget
폴 린치는 소설의 배경을 가상의 공간이 아닌 아일랜드로 설정했다. 그는 “독자들은 ‘이런 일은 불가능해’라고 생각하겠지만, 소설은 이것이 가능한 일임을 보여준다”고 했다. /Joel Saget

– 문단이 나뉘지 않고 긴 문장이 이어진다. 마치 갇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디스토피아 소설로 읽히기보다는 하이퍼리얼리즘(극사실주의)으로 읽히길 원했다. 완전한 몰입감과 진실성을 주려 했다. 진짜 같은 깊은 공포를 만들고자 했다. 소설의 문장들은 필연에 갇힌 것 같은 느낌이 들도록 고안한 것이다. 세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느끼는 아일리시의 고립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 주인공 아일리시는 어떤 인물인가.

“그녀는 현대적인 동시에 고전적이다. 과학자이자 엄마, 아내, 치매를 앓는 노인의 딸이다. 사람들이 중년에 접어들 때 마주하는 압박감, 인생이 우리를 사방에서 포위하는 것 같은 상황을 보여준다. 한편 나는 그녀를 그리스적으로 여긴다. 경찰이 그녀의 집에 찾아왔을 때, 그녀는 미로에 들어선 것이다. 그녀는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불가능할 것 같은 여러 선택을 하도록 강요받는다. 작가로서 나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말한 ‘아테(망상과 어리석음의 여신)’ 개념에 흥미를 느낀다. 인간은 확신에 차서 행동하지만, 예기치 못한 쓰디쓴 결과를 얻곤 한다. 아일리시는 어둠으로 향하고, 운명을 이기기 위해 올바른 선택을 하려 한다. 인간이라는 복잡한 존재에 주의를 기울이며,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려 했다.”

– 시리아 난민에 대한 서구의 무관심이 집필 계기가 됐다고 밝힌 바 있다.

“2018년 12월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 정치적 혼란의 감각이 깊게 느껴졌다. 서구권에선 영혼의 위기가 펼쳐지기 시작했고, 평화의 유대가 무너지는 것을 감지했다. 다들 말하려 하지 않고, 인정하려 하지 않았지만. 시리아에 대한 단상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소설을 쓰면서 과거·현재·미래의 여러 정치적 현실을 동시에 이야기할 수 있었다. 소설이 그린 현실은 보편적이다. 당면한 위협이라기보다는 늘 있었고, 있을 위협을 보여준다.”

– 이 소설로 “급진적 공감(radical empathy)을 불러일으키고 싶었다”고 했는데.

“우리는 매일 뉴스의 스펙터클(장관)에 폭격당한다. 어린 시절부터 저녁을 먹으면서 파괴와 박탈의 이미지를 비추는 TV를 보며 자란다. 우리는 뉴스에서 보는 것을 실제로 느끼지 않고, 감정을 둘러싸는 벽을 쌓는다. 이런 이미지에 둔감해지면 화면에 나오는 사람들은 ‘타자’로 비인격화된다.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은 스펙터클이 가닿지 못하는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 준다. 의식의 불꽃 속으로, 하얗게 타오르는 살아 있는 그 순간으로. 이때 동정(sympathy) 대신 공감(empathy)이 시작된다. 소설은 직면하고 싶지 않은, 메두사를 똑바로 보게끔 한다. 자신이 경험한 것처럼 느낄 때, 독자는 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