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 해방

피터 싱어 지음|함규진 옮김|21세기북스|344쪽|2만2000원

여기 윤리적 딜레마가 있다. 출근길, 당신은 어린아이가 작은 연못에 빠진 것을 본다. 주위엔 아무도 없다. 지금 물에 뛰어들지 않으면 아이는 죽을 수 있다. 물에 들어가는 게 위험하진 않다. 다만 새 신발과 양복이 젖고, 옷을 갈아입고 나면 지각할 것이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호주 출신으로 ‘지구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살아있는 철학자’(미국 ‘뉴요커’)로 꼽히는 피터 싱어 프린스턴대 생명윤리학 석좌교수는 강의 첫 시간 늘 이 질문을 던진다. 학생들 답은 한결같다. “구해야 한다.” “신발이나 지각은?” “그런 건 대수롭지 않다.” 싱어 교수는 묻는다. “지금 당신이 놓인 상황도 마찬가지다. 의류비나 외식비처럼 꼭 필요하지 않은 것에 돈을 쓰느라 효과적인 자선 단체에 기부하지 않음으로써, 당신이 구할 수 있었던 아이를 그냥 내버려두는 것 아닐까?”

피터 싱어. /Seth Lazar
피터 싱어. /Seth Lazar

지난 23일 출간된 ‘빈곤 해방’(21세기북스)의 시작도 이 질문이다. 2009년 나온 초판을 전면 개정한 것으로, 한국에선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로 소개된 책. 그는 개정판 출간을 앞두고 본지와 가진 서면 인터뷰에서 “사람들은 극빈자 수를 줄일 수 있는지에 대해 회의적이다”라며 “그러나 지난 15년 동안 극빈층과 다섯 살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 아이가 절반으로 줄었고, 선을 행하기 위해 사용할 자원을 최대한 가치 있게 쓰는 방법에 대한 훌륭한 연구도 더 많이 이뤄졌다. 이것이 개정판을 쓴 이유”라고 했다.

300쪽이 넘는 책의 주제는 명료하다.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절대 빈곤의 덫에 걸린 사람을 도우며 살아가야 한다. 그게 윤리적이다.

그가 초판을 쓸 당시인 2009년 전 세계 극빈자 숫자는 14억명(세계은행 기준), 다섯 살 이전에 죽는 아이는 980만명(유니세프 기준)이었다. 2019년 이 숫자가 각각 7억3600만명과 540만명으로 줄었고, 2024년 말 7억명과 490만명으로 떨어졌다.

‘최빈국 빈민을 돕자’는 건 싱어 교수의 핵심 주장. “누군가에게 1000달러를 준다고 해도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가능성은 크지 않다. 그러나 극심한 빈곤에 처한 사람에게 주는 1000달러는 그 삶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그는 기부 거부자의 일반적 반론이나, 기부를 가로막는 심리적 장벽을 깨부수는 일을 한다. 한국의 경우 기부 단체에 대한 불신이 대표적이다. “우리 중 기대에 못 미치는 물건 한 번 안 사본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렇다고 해서 다시는 아무것도 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라이프유캔세이브 (www.thelifeyoucansave.org) 같은 해외 사이트를 통해 운영이 독립적이면서 비교적 적은 금액으로도 생명을 구하거나 크게 개선할 수 있는 자선 단체를 확인할 수 있다. 책 속에도 그런 단체의 예시를 초판보다 더 많이 실었다.”

‘경제 개발이 빈곤 해결에 더 근본적 해결책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선 “한국과 다른 아시아 국가들처럼 높은 교육 수준과 숙련된 노동력, 제조업을 통해 수출이 용이한 항만 접근성을 갖춘 국가에선 큰 효과가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강력한 국가적 교육 시스템이 없거나, 내륙에 있거나, 인프라가 부족한 국가에선 한계가 있다. 이러한 곳에선 원조가 삶을 개선하고, 자녀를 먹이고 교육하며,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의 앞으로의 목표는 10년 안에 빈곤과 관련된 원인으로 5세 이전에 사망하는 아동 수를 지금의 절반으로 줄이고, 극심한 빈곤 상태에 있는 사람 수도 비슷하게 줄이는 것이다.

2005년 콩고에서 난민 어린이들이 죽을 받으려 줄 서 있는 모습. 싱어 교수는 “모든 기부가 칭찬받을 만하지만 특히 극심한 빈곤에 처한 사람에게 도움이 닿을 때 더 크고 선한 영향력을 낼 수 있다”고 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그는 대학원생 시절부터 연 소득 10%를 기부했으며, 지금은 연 소득 3분의 1 이상을 기부한다. 2021년엔 철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베르그루엔상 상금 전액(약 14억원)을 기부했다. 그렇지만 “나를 성인(聖人)이라 주장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우리 가족이 심각한 빈곤에 빠질 위험이 있을 정도로 많은 것을 내주진 않는다. 하지만 비싼 옷을 입거나, 고급 리조트에 머물거나, 외제차를 타거나, 쇼핑에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게 결국 점점 더 비싸고 사치스러운 것만 원하게 만들 뿐이란 걸 안다. 오늘날 대부분 한국인은 높은 생활 수준을 누리고 있다. 극심한 빈곤에 처한 사람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일을 삶의 목표 중 하나로 삼는다면, 유행하는 옷을 입거나 비싼 차를 모는 것보다 더 오래 지속되는 기쁨을 누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