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내년부터 한국ABC협회의 부수 공사(公査) 결과를 정부 광고 집행 등에 활용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언론진흥재단에 구독률과 열독률 조사를 위탁해 매체 영향력을 평가하고 이에 맞춰 정부 광고를 집행하겠다고 했다. 지난 2009년 정부가 발행 부수 검증에 참여한 신문·잡지에 대해 정부 광고 우선 배정 규정을 신설하면서 정부 ‘공인’ 부수 인증 기구로서 가져왔던 한국ABC협회의 위상을 한순간에 무력화하겠다는 것이다.
◇부수 대비 광고 누가 많이 받아갔나
정부와 일부 여권 의원들은 조선일보가 정부 광고 수주액을 높이려고 유료 부수를 부풀리고, 이를 위해 ABC협회가 인증하는 유료 부수 인정률을 높이기 위해 꼼수를 써왔다고 주장했다. 과연 그럴까.
지난해 실시된 2019년 유료 부수 인증에서 조선일보는 국내 일간지 중 가장 많은 116만2953부를 인증받았고, 이어 동아일보 73만3254부, 중앙일보 67만4123부, 한겨레 19만2853부를 각각 유료 부수로 인증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김승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3월 ”조선일보는 조작된 100만부 이상의 유가 부수를 통해, 정부로부터 매년 수억원 보조금과 수십억원 광고비를 부정 수령했다”고 주장했고, 노웅래 의원이 단장인 민주당 미디어TF는 “조작된 뻥튀기 부수를 기준으로 정부 보조금이 부당 지급되고 광고 단가가 부풀려 산정됐다”며 “조선일보의 경우 2배 이상 부풀려진 부수를 통해 지난 5년간 최소 20여억원의 국가보조금을 부당 수령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지난해 정부 광고 집행액 규모를 보면, 유료 부수 비율에 따라 집행되지는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해 정부로부터 광고를 가장 많이 수주한 신문은 동아일보 95억2000만원, 그다음이 중앙일보 83억2000만원 등이었다. 조선일보는 76억2000만원으로 3위였고, 한겨레신문이 50억9000만원을 수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유료 부수 1부당 정부 광고액으로 비교하면, 조선일보는 6552원인 반면, 동아일보는 1만2983원(198%), 중앙일보 1만2342원(188%)으로 조선일보의 두 배에 육박했고, 한겨레의 1부당 광고액은 2만6393원(402%)으로 조선일보의 4배가 넘는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 10년 동안 정부 광고액 총액으로 비교해도 이런 경향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정부나 일부 여권 의원의 인식과 달리, 실제로는 조선일보의 유료 부수 대비 정부 광고액이 가장 적었고, 오히려 일부 신문이 인정받은 유료 부수에 비해 정부 광고는 더 많이 받아갔던 것이다.
◇”열독률·구독률 조사로 바꿔도 순위는 그대로”
정부는 매년 5만명을 대상으로 ‘어떤 신문을 구독하고 있는지’ ‘최근 일주일간 읽은 신문은 어느 신문인지’ 등을 조사(복수 응답)해 이를 근거로 정부 광고와 보조금 지급, 언론 지원 사업 등에 활용하겠다고 밝혔다. 민간기구인 ABC협회가 그동안 개발해온 표본 조사 방식에서 정부산하 언론진흥재단이 수행하는 설문조사로 방식을 바꾸겠다는 것이다.
언론진흥재단은 그동안 매년 국민 5000명을 표본으로 열독률과 구독률을 조사해 발표해왔다. ’2020 언론 수용자 조사'에 따르면, 2020년 국내 신문 전체 열독률은 10.2%로 국민 10명 중 한 명 이상이 종이 신문을 읽고 있었다. 매체별 열독률은 조선일보가 3.2%로 가장 높았고, 동아일보 1.5%, 중앙일보 1.4%, 매일경제 0.5%, 한겨레 0.4% 순서였다. 이는 기존 ABC협회가 조사해 발표해온 신문별 유료 부수와 순위에선 큰 차이가 없다. 언론진흥재단이 열독률을 점유율로 환산한 열독 신문 점유율(신문을 읽은 독자 중 많이 본 신문의 비율)은 조선일보 26.0%, 동아일보 12.4%, 중앙일보 11.3%, 매일경제 4.5%, 한겨레·한국일보 3.6%였다. 특히 열독 점유율 1위 신문의 점유율은 2·3위 신문의 두 배가 넘어 ABC협회의 부수 조사보다 매체 간 격차가 더 벌어지는 셈이다.
◇“민간 영역 위축... 언론 줄 세우기 의도 드러나”
우리나라에서 광고 집행의 근거가 되는 매체 영향력 조사는 민간 기구인 ABC협회에서 실시해왔다. 정부는 이를 정부 산하의 언론진흥재단에 직접 맡겨 언론 시장에 직접 개입하겠다는 것이다. 언론진흥재단은 문체부 산하 기구로 재단 이사장도 문체부 장관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 지난 8일 황희 문체부 장관이 서울 광화문 정부 청사에서 ‘ABC부수공사 활용 중단’을 발표한 현장에도 표완수 언론진흥재단 이사장이 배석했다. 특히 언론진흥재단은 정부의 각종 광고 업무를 대행하며 신문 방송사와 직접 접촉하는 광고대행사 역할을 맡고 있다. 이 기관에 앞으로는 매체에 대한 평가 업무까지 맡기겠다는 것이다.
그동안 정부는 곳곳에서 신문 시장에 직접 개입하고 언론 줄 세우기를 시도해왔다. 지난 3월 문체부는 ABC협회에 부수 조사 표본지국 선정 과정에 공무원이나 언론 재단 관계자, 소비자 단체, 학자 등 제3자가 참관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순수 민간단체인 ABC협회가 활동하는 어느 국가에서도 이런 요구가 받아들여진 사례가 없다.
여당 의원들은 공무원에게 신문지국 조사권을 주자는 법안을 내놓았고, 마음에 드는 신문에 사용하는 ‘미디어 바우처’와 마음에 들지 않는 신문에 쓰는 ‘마이너스 바우처’를 국민에게 지급해 매체 영향력을 측정하는 이른바 ‘국민 참여를 통한 언론 영향력 평가 제도’를 도입하자는 ‘미디어바우처법'까지 내놓았다.
하지만 미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에선 ABC협회 등 민간 단체가 주축이 되어 영향력을 측정한다. 유료 부수 인정 범위도 우리나라와 영국, 스웨덴 등은 구독료의 50%까지를 유료 부수로 인정하는 반면, 미국에선 한 부당 1센트만 받아도 유료 부수로 인정하는 등 각 국가 여건에 맞게 민간에서 자율적으로 결정하고 있다. 국제 ABC연맹도 정부 입김을 최소화하기 위해 매체사와 광고주, 광고 회사가 참여하는 비영리 조직을 만들어 매체 영향력을 조사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정부가 신문 평가 기준 만들어... 표현의 자유 위축 우려”
ABC협회는 “지국은 지국장의 개인 영업장으로 각 신문사도 몇 부를 배달하는지 쉽게 알기 어렵다”며 “문체부 직원과 외부 인사들이 실시한 설문조사와 인터뷰만으로 ABC협회 부수 공사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했다. 지성우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ABC 제도는 객관적으로 부수를 파악함으로써 언론에 대한 정부의 영향력을 제한하려고 만든 것인데, (앞으로) 정부가 신문을 평가하는 기준을 설정하고 그 영향력을 직접 수치로 파악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정부가 직접 구독률·열독률 조사를 통해 신문의 매체 영향력을 파악할 경우, 주요 신문이 아닌 군소매체의 경우 실태 파악조차 불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ABC협회에는 912개 신문사를 포함해 1592개 회원사가 참여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현행 ABC 제도에 개선해야 할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부가 직접 나서서 매체 영향력을 평가하겠다는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고, ABC협회와 같은 민간 기구의 설립 취지와 정신에도 어긋나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황근 선문대 언론광고학부 교수는 “ABC 제도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의도 때문에 정부가 ABC협회 자료 활용을 중단하는 것이 더 문제”라며 “정부의 언론 줄 세우기가 더욱 노골화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