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좋으면 찾아오겠다’는 박민영이었다. 2년 전 드라마에서 봄 같은 미소를 가진 ‘겨울 아이’로 섬세한 감정선을 연기했던 그녀. 손대면 바로 녹아버릴 듯한 성에마냥 박민영의 표정은 0.01도의 차이에 사라지거나 혹은 굳어질 만큼 결이 살아있었다.
겨울에서 봄이 오는 사이, 박민영이 다시 찾아왔다. 날씨 한가운데에 스스로를 두고서 말이다. ‘열대야보다 뜨겁고 국지성 호우보다 종잡을 수 없는’ 기상청 사람들의 일과 사랑을 그린 드라마 ‘기상청 사람들’을 통해서다. 최근 종영한 이 드라마에서 기상청 총괄 2과 총괄예보관 진하경을 맡은 박민영은 드라마 ‘날씨가 좋으면 찾아오겠어요’에서 보여줬던 때론 서늘하고 때론 적적했던 감수성을 더 층층이 벼렸다.
◇”로맨틱 코미디, 사실은 되게 어렵다”
그간 시청자의 리모컨을 고정하게 만드는 박민영의 연기는, 연기를 하는지도 모를 만큼 자연스러움에 있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좀 더 귀 기울이면, 가득 채우되 넘치지 않아야 하는 그 감정의 지경을 만들기 위해, 말하자면 ‘정답’을 찾기 위해 스스로와 투쟁을 지속하는 중이었다. 로맨틱 코미디를 포함한 로맨틱 장르에 최적화된 배우로 꼽히기에 어쩌면, 박민영이기에 기대되고, 박민영이기에 뻔할 것도 같다던 그였지만, ‘박민영’은 바장이지 않았다.
얼마 전 화상으로 만난 박민영은 계속 변하려 했다 말했다. “예전에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왜 나한테는 이런 역할이 자꾸 들어오지. 나는 연기 변신하고 싶은데….’ 그런데 지금은 이게(로맨스·로맨틱 코미디 장르물) 나쁜 걸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이 안에서 충분히 발전하고, 더 깊이 있고, 더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다면, 장점을 극대화 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요. 저한테 이런 역할을 맡겨주시는 것도, 이 모습을 좋아해 주시는 많은 팬의 감사한 의견도 역시 존중하고 있어요. 이것도 잘하고, 다른 쪽에도 도전하다 보면, 갈증도 해소되면서 여러분께서 사랑해 주시는 모습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박민영이 연기한 진하경은 엘리트 코스를 밟고 기상청 5급 공무원으로 입사한 재원.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거 같이 일에 대해서만큼은 누구보다도 완벽을 기한다. 그 외엔 인간관계도, 연애도 어쩐지 허술한, 아니 모자란 구석이 있는 인물이다. 10년간 사내연애했던 연인 한기준(윤박)에게 배신당한 뒤, 진하경에겐 총괄 2과 특보담당 이시우(송강)가 다가온다.
외딴 섬 같던 진하경과 사람들이라는 육지를 연결하던 한기준이라는 다리가 끊긴 뒤 잠시 표류할 뻔한 진하경은 역시 바람맞은 이시우를 만나 초여름 한여름 밤의 꿈 같은 하루를 보낸다. 서로 다른 연애관과 결혼관을 지닌 둘은 두 가지 성질이 다른 기단이 충돌하며 모진 날씨를 만들어내 듯 평탄하지만은 않다.
보는 이를 설레게 하는 눈빛과 눈망울, 애정을 한 움큼 끌어올리는 듯 시원스레 올라간 입꼬리는 로맨스물에 더할 나위 없는 그녀만의 무기. 하지만 ‘기상청 사람들’ 속 대사에도 있듯, 맑은 날만 지속되면 사막이 된다 했다. 사막 속 신기루를 찾듯, 변신에 대한 갈망과 갈증은 박민영이 지속적으로 갈구하던 대상이었다. 알아채건, 알아채주지 못하건 박민영은 같은 웃음에 같은 옷을 입더라도 말이다.
진하경식 박민영의 표정은 건조주의보를 넘어 건조경보를 향해 있었다. 탱글탱글 차오르던 광대는 어느새 밋밋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까짓 이별 따위에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듯한 결기는 여느 이별 장면과 달리 독기 빠진 표정으로 치환됐다. 울며불며 매달리고 한없이 망가지는 것도, ‘부숴버릴 거야’라며 이글이글 칼날 같은 복수의 얼굴을 만드는 것도 아니었다.
힘이 빠진 눈초리는 중력에 휘둘리는 듯 아래로 향했고, 가벼워 보이지 않는 입매에선 그렇다고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에게 이런 얼굴이 있었던가. 다시 사랑에 빠질 때도, 이별로 멀어질 때도 박민영은 이전과는 또 다른 얼굴을 가지고 왔다. 대본이 표현해주지 못한 사람의 깊이를 박민영은 그와 비슷하지만 다른 진하경이란 존재를 통해 가늠하고 있었다.
“제가 그동안 보여드린 거의 모든 작품에 로맨스가 들어 있어서, 저는 자연스럽게, 뭔가 드라마로 사랑을 배운 느낌이에요. 덕분에 경험치도 많이 쌓인 것 같고, 다양한 감정을 표출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 같고요. 로맨스 중에서도 로맨틱 코미디 장르는 사실은 되게 어렵거든요. 그래도 제가 시트콤도 해보고, 로맨틱 코미디 장르도 두 번이나 해봐서 이제는 조금 자신감이 붙어서 열심히 배워가는 중이에요. 그나마 제가 좀 자신있고, 잘하는 분야라는 점은 인정하면서, 조금 더 틀 안에서 디테일을 살려가면서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어요. 로맨스 장르 안에서.”
잘하는 걸 계속 잘하는 게 말처럼 쉬운 건 아니다. 잘할 수 있어 잘하면 ‘동어반복’이란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작정하고 다른 모습에 도전하면,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었다며, 그냥 잘하는 거 계속 하지란 말이 나오기도 한다. 기상 예측에 자꾸 좌절감을 안기는 복잡다단한 한국형 지형처럼, 극심한 일교차를 보이는 시청자들의 기대와 비난은 그가 안고 가야할 숙제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그동안 수차례 말해왔던 ‘완벽주의’와 ‘갈증’은 이번에도 반복됐다. 표현을 좀 더 명확하게 짚으려는 박민영의 ‘완벽주의’는 그냥 흘려버리는 듯한 문장에서도 나왔다. ‘로코(로맨틱 코미디)의 여왕’이란 수식어를 단 질문에 대한 겸양의 미덕을 내비친 부분이기도 했지만, 다른 말로 확장시키기보다는 지금껏, 또 앞으로 자신의 노력에 대한 스스로의 인장(印章) 같은 느낌이랄까.
◇”날 외롭게 하고, 힘들 때까지 밀어붙였다.”
변덕스러움에, 한 치 앞을 예견할 수 없기에 인생은 날씨와 닮아있다고들 한다. ‘폭풍 전 고요’ ‘비온 뒤 땅이 굳는다’ 같이 날씨를 빗댄 경구도 적지 않다. 드라마 ‘기상청 사람들’도 이 지점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기왕 날씨를 관측하는 기상청이란 배경도 빌었다. 기상청 배경 드라마는 국내 처음. 그 조직 구성원들이 얼마나 날씨 같은 삶을 겪어내고 있는지, 제대로만 그리면 ‘기상청’이란 세 글자만으로도 더 많은 공감과 설득을 주었을 것이다. 어느 정도 효과가 없었던 것도 아닌 것 같다.
누가 기상청 배경 드라마 아니랄까 봐, 지난 2월 4.5%의 시청률로 출발해, 3월 초순 평균 기온마냥 5~7%대의 시청률을 오락가락하더니 마지막회 최고 시청률 7.8%를 기록했다. 지난해 폭염처럼 방송가를 강타한 ‘펜트하우스’ 이후 초봄 꽃샘추위에 시달린 마냥 주요 기대작들의 시청률이 급락을 지속했던 JTBC 드라마로는 따뜻한 봄날을 맞이한 셈이다.
“다큐멘터리도 최대한 찾아보면서 용어나 특징적인 말투를 짚어가다가 과장님이 내부 브리핑하시는 장면을 보게 됐어요. 굉장히 물흐르듯 얘기하시는 거에요. 보통의 단어 나열하듯이요. 시청자들에게 정보를 알려주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 전문가 대 전문가들끼리의 회의였다는 걸 새삼 깨달은 거죠. 원래는 딱딱 포인트를 잡아가면서 말하려 했는데 생각의 전환이 많이 됐어요. 최대한 힘을 빼는 작업부터 했어요.”
외형적으로도 진하경을 완성해갔다. “화장품도 그대로 쓰고, 옷도 색을 죽이면서 간결하게 입고. 스타일에 변화를 주지 않아요. 미소라 해도 형식적인 미소랄까. 눈에 조금 냉철함을 담으려 했어요. 사무적으로 눈을 뜨는 노력을 많이 했어요. 눈을 동그랗게 뜨기 보다는 역삼각형으로 뜬다고 해야 하나(웃음)”
박민영은 진하경이기도 했지만 진하경은 아니었다. 그래서 스스로를 밀어붙였다고 말했다. “안 해봤던 캐릭터고, 제가 변신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근데 저와는 너무 달라서…. 제가 연기를 정말 잘하는 연기자라면 거짓으로 하지만 진실되게 보이게 할 텐데, 모든 이들을 완벽하게 속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저는 제가 그쪽을 닮아가지 않으면 아예 안되는 스타일이더라고요. 절 외롭게 만든 다음에 나온 연기였어요. 혼자서 술도 많이 마시고…. 대본 혼자 보면서, 혼자만의 싸움을 했어요.”
진하경은 일 속에서 살면서 사람에게 곁을 주지 않은 인물이다. 자신을 드러내보이려 하지도 않았고, 다가오는 손을 잡지도 않았다. 그나마 유일하게 속을 텄던 한기준에게 배신당했을 때, 진하경은 진하경다움을 먼저 보인다. 한기준을 불러내 회사 복도에서 대차게 뺨을 갈기고는 “개XX야’라고 소리친다. 사내에서 뭐라 떠들든 그건 그 다음 일이다. 시청자들이 통쾌해하며 열렬히 박수를 보냈던 장면이기도 했다.
하지만 진하경은 부러질 듯 날 선 송곳처럼 신경을 곤두세우고 ‘걸어다니는 시한폭탄’같은 싸움꾼으로 변한 건 아니었다. 한기준과 결국 결혼까지 한 기상전문기자 채유진(유라)에게 뾰족하게 대한 건, 채유진이 취재를 제대로 하지 않은 상태에서 오보를 냈을 때다.
“‘박민영표 로코는 거기서 거기다’라는 평도 있는데, 저는 그 안에서 끊임없이 노력을 했거든요. 이번엔 내적으로 힘들 때까지 저를 밀어붙인 다음 캐릭터를 쌓으려는 노력을 많이 했어요. 최대한 건조하고, 플랫하게 톤을 만들고, 어미처리나 눈빛처리 모든 것에서 닫혀있는, 절제하는 느낌으로 표현하는 것이죠.
제가 웃음이 많은 사람인데, 웃음기를 최대한 빼고, 또 장난스러움도 빼고, 매일 매일 일에 치어 사는 모습을 구현하려 힘을 빼다 보니, 가끔 어떤 씬에서 눈이 반쯤 감겨 있더라고요.(웃음) 멜로 부분에서는 진하경이 가끔 열리기도 하지만, 치열하리만큼 자신을 외롭게 밀치는 진하경이라는 존재가 저와 동떨어져 혼자만의 싸움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 진하경과 저와의 가시거리를 최대한 좁혔던 것 같아요.”
◇”틀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박민영은 “쉴새 없이 화면을 보면서 계속 관측을 하고 회의를 하는 기상청 직원분들의 모습에, 저희도 촬영하면서 10분에 한 번씩 멈추고 찍고 멈추기를 반복하면서 직원들의 호흡을 배워나갔다”고 말했다. 그 노고를 알고 나니, 날씨 속 한줄이 ‘그들의 눈물’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 이 변덕 같은 날씨는 한치 앞을 알 수 없다. 좀 따뜻해 졌나 싶으면 이내 어깨를 움츠리게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우산 하나로 든든해졌다가도, 고인 물 위를 맹렬한 속도로 지나가는 자동차 물세례에 속절없이 당하기도 한다. 그뿐인가. 분명 이 곳에선 세찬 빗줄기가 사람을 휘청이게 할 정도로 퍼붓는데 고개 돌려 옆 동네 하늘을 보면 그리 깨끗할 수가 없다.
그래도 ‘날씨’니 그나마 다행이랄까. 최소한 우리에겐 우산을 가져갈지 말지, 빨래를 널 지 말지, 짧은 옷을 입을지 말지 어느 정도 예상케 해주는 ‘오늘의 날씨’가 있으니까. ‘또 속았다’며 의지하지 않겠다 해도 돌이켜보라. 이미 대부분의 일상 속에 녹아들었다. 습관처럼 잊고 습관처럼 기억하고 습관처럼 찾아보는 것, 영국작가 알프레드 웨인라이트(Alfred Wainwright·1907-1991)가 일찍이 말하지 않았는가. ‘나쁜 날씨란 없다. 맞지 않는 옷차림이 있을 뿐(There’s no such thing as bad weather, only unsuitable clothing)’
날씨와 인생이 비슷해보이면서도 다르게 느껴지는 게 바로 이 지점일 것이다. ‘예보관’의 존재 유무다. 적어도 날씨에 대해선,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으니까. 모두의 사랑에, 또 인생에 그다음 순간을 매번 예보해주는 이가 있다면 우리의 삶은 조금 달라질까. 감정은 통계가 잡아내질 못한다. 봄·여름·가을·겨울이 어김없이 찾아오는 동안 각자의 봄·여름·가을·겨울은 뒤죽박죽이다. 널뛰기하듯 하루에도 수없이 바뀌는 상사의 마음을, 또 어제와 오늘이 다른 연인의 태도를 누가 예상해 보고서를 쓰겠는가. 인간의 뇌 용량의 수백만배 뛰어넘는 슈퍼컴퓨터라 해도 한 치 앞을 모르는 그 무수의 감정 변화를 제대로 계산해낼 수 있을까.
‘기상청 사람들’도 날씨 한가운데 속의 사람들까지는 얼추 그려냈지만, 마음의 날씨까지는 제대로 잡아내진 못한 것 같다. 흡입력 있는 배우들의 연기 덕에 초반 호평에도 불구하고 중반 이후 늘어지는 스토리 라인과 주인공 주변 인물들의 설득력 떨어지는 갈등 유발에 힘을 잃기도 했다. 실제 배경도, 연기하는 인물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치열한데 극 스스로가 나사를 풀어 느슨하게 만들어버렸달까.
그래도 이 드라마를 봐야하는 이유가 있다면 배우들의 호연을 빼놓을 수 없다. 단단한 연기 결의 박민영이 이끌고, ‘찌질하다는 욕먹기를 자처하며’ 배신남 한기준 역할을 너무나도 잘 소화한 윤박이 뒤를 받쳤다. 이시우로 분한 송강의 싱그러움은 등장할 때마다 화면의 명도와 채도, 하경과의 로맨스 온도를 끌어올렸다. 채유진 역의 유라는 ‘걸스데이’에서 어느덧 연기자로 성장했고,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하는 철저한 개인주의자에서 사랑스러운 ‘펭귄커플’로 작품의 맛을 더한 동네예보관 신석호 역의 문태유는 이번 드라마의 발견이기도 하다.
거기에 더한 마지막회 대사. ‘어쩌면 인생의 정답은 애초에 정해져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가 한 선택을 정답으로 만들어가는 과정만 있을 뿐.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틀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일의 정답을 위해서 말이다.’
인생에서 많이 틀려봐야 정답도 많이 맞힐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배역들의 사랑도, 날씨 예보도, 가족 관계도 그토록 삐걱댔나보다. 박민영도 마지막회 대사가 가장 와 닿았다고 했다. “저한테는 울림이 있는 대사였어요. 도전할 때마다 잘 안될 수도 있지만 나의 정답에 도달하기 위해선 이 도전을 피할 수 없을 것이죠. 항상 그런 마음 가짐으로 작품 임했기 때문에 의미 있는 대사였어요.”
기상청이 배경이어야만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던 것 같다. 기상청 국장의 예보 적중률 1위 비결을 이야기하며, 실패를 해봤기에 거기서 다음의 답을 찾아갈 수 있었다는 마지막회는 이별이 두려워 사랑을 포기하거나, 불행해질까봐 행복 조차하려 하지 않는 이들에게 ‘그래도 된다’고 등을 두드린다. 그리고 하나 더. 국장은 “내 결정에 대해 내가 존중해줬다”고 말한다. 예보를 내린 순간 만큼은 자신이 누구보다도 최선을 다 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는 아마 박민영이 하고픈 이야기였을 수도 있다. “풀지 못한 갈증이 항상 있길 원하는데, 작품을 해야 생겨요. 그런 욕심을 더 부려봐도 괜찮다는 희망과, 그로 인해 좋은 에너지를 받은 작품이었어요. 많은 변화가 있었던 작년을 지나, ‘기상청 사람들’이란 징검다리를 건너 작년과는 또 달라진 올해의 박민영으로 새로운 갈증을 찾아나설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