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련성 기자

“우리 각자의 ‘대한민국 경험’을 진솔하게 기록으로 남기기만 해도 미래 세대가 정체성을 찾고 혼란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과학기술처 장관과 서울시립대 총장,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등을 지낸 김진현(86) 세계평화포럼 이사장이 회고록 ‘대한민국 성찰의 기록’(나남)을 내놨다. 동아일보 기자와 논설주간 등을 지낸 언론인 출신으로 정계와 학계에 나가 겪은 일들에 대한 반성과 성찰, 비판을 담았다.

김 이사장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건국 과정과 전쟁, 산업화, 민주화를 모두 경험한 자신의 세대를 다생(多生) 세대로 규정했다. 그는 “단군 이래 가장 다채로운 경험을 한 우리 세대 경험이 대한민국의 훼손된 정체성과 정통성을 회복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 되기 바란다”며 “‘헌 사람 헌 시대’가 자성과 성찰로 ‘새 사람 새 시대’를 여는 모멘텀을 만들 수 없을까 늘 고민해왔다”고 말했다.

그는 1990년 노태우 정부 후반기 과기처 장관에 임명됐다. 안면도 핵 폐기장 반대 시위로 정국이 뜨거웠던 시기다. 회고록엔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가 소개된다. 당시 정부가 발전소에서 플루토늄을 추출해 핵무기의 75%를 국산화하는 이른바 ‘75 프로젝트’를 비밀리에 추진했다는 것. 그는 당시 회의 자료 사진을 공개했다. 김 이사장은 “박정희 정부에서 추진하다 전두환 정부에서 중단된 핵 개발이 노태우 정부에서 재개된 것”이라고 했다. 2000년 8월 문화일보 회장 시절 김정일 초청으로 언론사 경영진과 방북했을 때, 북측이 남한 손님들 추태를 유도하고자 공작팀을 동원해 “A한테 10잔은 부족해, 20잔은 먹여야지” 하면서 자기들끼리 모략을 짰다는 내용을 전해 들은 비화도 소개한다. 그는 “언론인들한테 이 정도였으니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추태와 약점이 잡혔고, 북은 얼마나 이를 이용했을까” 하고 물었다.

1970~1980년대 고위직 인사들에 대한 실명(實名) 비판, 1990년대까지도 기업 돈을 쌈짓돈처럼 생각하던 관행도 묘사한다. 몇몇 인사에게 자서전 집필을 권고한 일을 소개하며 “이분들이 정책 결정 과정에 대한 종합적 설명과 환경적 제약 등에 대해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은 결과, 대한민국 근대화 혁명의 성취가 지금 부정·훼손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전체 22장(章) 656쪽 분량 회고록을 쓸 수 있었던 것은 메모와 서류를 꼼꼼히 챙겨온 덕분. 김 이사장은 “국무회의서 쓴 다이어리만 15권이고, 동아일보 시절 언론투위 소식지, 사태 전모를 파악할 수 있는 당시 기자협회보 등 기록을 다 갖고 있다”고 했다.

다음 책 구상도 밝혔다. 그는 “건국 이후 요즘처럼 이념·소득·젠더 갈등과 격차가 큰 적이 없다”면서 “왜 성공한 대한민국이 정체성을 못 찾고 있는지, 분석하고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