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들어 국내에서 저널리즘 스쿨(Journalism School) 출범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작년 말까지 국내에선 두 곳의 저널리즘 스쿨이 있었죠. 이화여대가 서울에서 운영하는 ‘윤세영 저널리즘 스쿨’(YJS)과 충북 제천시에서 2008년 3월 개원한 세명대학교 저널리즘스쿨(약칭 세저리)입니다.
◇작년까지 이화여대와 세명대만 운영
YJS는 2007년 이화여대 부설 프론티어 저널리즘 스쿨(FJS)로 문을 열었는데, 2020년 3월부터 지금 이름으로 바꾸었어요. SBS대주주인 윤세영 태영그룹 명예회장이 세운 서암 윤세영 재단이 그때부터 10년간 매년 5억원씩, 총 50억원을 이화여대에 기부하기로 결정하면서죠. 이화여대는 대학원 별관 건물을 YJS의 고정 교육 공간으로 제공하고 있어요.
YJS가 비학위 과정이고, 세저리는 2년제 대학원 과정이예요. 모두 취재·보도 등 실습 위주로 언론인 양성에 주력하는데, 2008년 3월 개원한 세저리는 한 기수당 20명 안팎의 재학생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해요. 재학생 가운데 3분의 2 정도가 장학생 혜택을 받고 있죠.
2020년 10월 기준으로 ‘세저리’ 졸업생 225여명이 기자, PD 등으로 언론계에 진출해 있답니다. 졸업생들이 가장 많이 취업한 곳은 KBS(23명)라고 해요. 언론인 출신 교수진이 글쓰기부터 기사작성까지 담당 학생을 정해 첨삭지도하는 ‘튜터(tutor) 제도’로 ‘언시생을 위한 삼청교육대’로 불리지요.
YJS는 ‘저널리즘 기초 교육기관’이면서 기자와 시사교양 PD ‘시험 준비 기관’을 표방해요. 이재경 이화여대 명예교수(미디어커뮤니케이션 학부)의 ‘글로벌 스탠더드’ 같은 필수 과목을 비롯해 전·현직 언론인과 미디어 전공 교수가 문장의 기초부터 기획취재 같은 심화 단계까지 실습을 매우 중시해요.
매년 30명 안팎 남녀 예비 언론인들을 뽑아 2년간 전원 수강료 면제 혜택을 줘요. 지금까지 370명이 넘는 기자와 PD를 배출해 단일 기관으로 가장 많은 현역 언론인을 길러냈죠.
‘세저리’는 단비뉴스, YJS는 스토리 오브 서울(Story of Seoul)이라는 온라인 매체를 운영하는데, 재학생들은 작성한 취재 기사들을 이들 매체에 각각 싣고 있죠.
◇올들어 조선일보, MBC 등 문 열어
저널리즘 스쿨은 최근 속속 늘어나고 있어요. 올 2월 방송문화진흥회와 MBC가 공동 운영하는 ‘MBC저널리즘 스쿨’을 출범하면서 26명의 장학생을 뽑았어요. 이들은 전·현직 기자와 PD의 실무 지도를 받는데, 언론 관련 외에 인문사회·교양교육도 함께 받는 게 색다르죠.
제가 몸담고 있는 조선일보도 언론사 입사를 준비하는 예비 언론인을 대상으로 5개월 과정의 ‘조선 저널리즘 아카데미’ 1기 수강생 모집에 나섰어요. 대학 4학기 이상 이수한 재학생 또는 졸업생을 상대로 조선미디어그룹 전·현직 기자와 언론학 교수 등 30여명이 글쓰기 기초와 취재 노하우, 탐사 보도와 기획기사 작성, 디지털 뉴스 제작 등 실무 능력을 체계적으로 가르칠 예정이예요. 개강은 올 7월입니다.
탐사보도 전문매체 뉴스타파는 올 2월 비영리 독립 언론 창업을 지원하는 저널리즘 스쿨을 열고 1기 수강생을 모았죠. 한국언론진흥재단은 2014년에 저널리즘스쿨 설립을 위한 연구 보고서를 발간했을 만큼 깊은 관심을 갖고 있어요.
언론계 종사자들은 이런 움직임을 반기고 있습니다. 디지털 전환을 필두로 미디어 환경이 급변하고 ‘전국민 기자 시대’가 본격 열리는 가운데, 기자들이 차별성과 전문성을 갖추는 게 무엇보다 긴요해졌기 때문이죠.
◇저널리즘 스쿨·퓰리처상 만든 조셉 퓰리처
이 지점에서 저는 조셉 퓰리처(Joseph Pulitzer, 1847~1911)를 떠올려 봤습니다. 그는 110년여 전에 사재를 기부해 사후(死後)에 컬럼비아대 저널리즘 스쿨과 ‘퓰리처상’(Pulitzer Prize)을 탄생시킨 주인공이예요.
헝가리 출생 미국 이민자로 31세에 신문사 발행인이 된 그는 19세기 후반~20세기초 미국 신문 산업을 주도했어요.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신문을 열심히 읽고 과열 경쟁에 따른 스트레스 등으로 그의 눈은 40세 무렵 거의 실명(失明) 상태였죠. 은퇴할 즈음 그는 자신의 생애를 되돌아보며 ‘제대로 된 언론인’ 양성의 중요성을 깨닫고 컬럼비아대와 하버드대학에 저널리즘 교육기관 개설을 제안했어요.
하버드대는 그의 제안을 거절했고, 컬럼비아대학도 처음에는 거절했다가 두 번째 제안을 받아들여 저널리즘 스쿨 설립에 동의했답니다. 퓰리처는 당시로선 거금인 200만달러를 기부했죠. 퓰리처가 사망한 이듬해인 1912년 컬럼비아대학 저널리즘 스쿨이 문을 열었고, 1917년부터는 ‘퓰리처상’ 시상 행사가 매년 이뤄지고 있어요.
퓰리처의 저널리즘 스쿨 설립 아이디어에 대해 상당수 지식인들은 시쿤둥했다고 해요. “기자에게 무슨 별도 교육이 필요해!”라는 냉소적인 반응이었죠. 이를 반박하기 위해 퓰리처는 ‘North American Review’라는 잡지에 소신을 밝혔어요.
◇“기자직을 존경 받는 직업으로 만들고 싶다”
“나는 저널리즘의 격(格)을 높여서 다른 학식 있는 전문직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도록 만드는 사회운동을 시작하고 싶다. 나는 기자직을 공동체 구성원으로부터 적어도 공익(公益)에 한결 적은 기여를 하는 다른 전문직들이 받는 만큼의 존경(尊敬)을 받을 수 있는 직업으로 만드는데 기여하고 싶다.” (<한국 언론의 품격> 나남출판사, 2013년, p.140에서 재인용)
자기 이름을 후세에 남기려는 명예욕이나 동정심에서가 아니라는 얘기죠. 전문직업인(professional)인 기자가 의사·변호사 같은 다른 전문직이 누리는 만큼의 존경과 품위를 받도록 하겠다는 나름 숭고한 뜻인거죠.
그는 역량있고 공적 대의(大義)에 투철한 언론과 언론인이 왜 필요한지를 이렇게 갈파했어요.
“우리나라와 우리 언론은 함께 일어서고, 함께 무너질 것이다. 역량 있고,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그리고 공공 정신이 투철한 언론은,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는 지성(知性)이 훈련돼 있고, 그것을 실천할 용기가 있다면, 공중의 미덕(美德)을 보존할 수 있다. 그러한 미덕이 없으면, 민주적이라는 정부는 사기(詐欺)이고 거짓일 뿐이다.” (같은 책, p.141)
퓰리처는 그러면서 이렇게 결론 내립니다.
“냉소적이고 돈만 아는, 정략적인 언론은 시간이 지나면 자신들과 똑같이 저급(低級)한 시민을 만들게 된다. 우리나라의 미래를 건설할 힘은 미래 세대 기자들의 손에 놓여 있다.”
컬럼비아대학은 ‘퓰리처 홀(Pulitzer Hall)’로 이름 붙여진 저널리즘 스쿨 본관 안에 이 구절들을 동판(銅版)에 새겨놓고, 학생들에게 ‘기자직’이 얼마나 중요한 사회적 기여를 하는지 새기도록 돕고 있습니다. 참고로 영어 원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Our Republic and its press will rise or fall together. An able, disinterested, public-spirited press, with trained intelligence to know the right and courage to do it, can preserve that public virtue without which popular government is a sham and a mockery. A cynical, mercenary, demagogic press will produce in time a people as base as itself. The power to mould the future of the Republic will be in the hands of the journalists of future generations.”
미주리대 저널리즘 스쿨과 더불어 미국 최고(最高)로 꼽히는 컬럼비아대 저널리즘 스쿨은 학부 졸업생(예비 언론인), 박사 지원자, 3~15년의 경력 기자, 미국 및 외국 언론사의 간부급 기자를 상대로 한 ‘설즈버거 이그제큐티브 리더십 프로그램’ 등 다양한 과정을 운용하고 있어요.
‘이그제큐티브 리더십 프로그램’은 아서 옥스 설즈버거(Arthur Ochs Sulzberger, 1926~2012) 전(前) 뉴욕타임스(NYT) 회장이 80세 생일을 맞아 학교에 기부한 400만달러를 모태로 만들어졌죠.
◇“언론과 나라의 運命, 같이 움직여”
미국에선 성공한 기업인 가운데 ‘전문직으로서 언론인 양성’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거액의 사재(私財)를 기부하는 인물들이 계속 나오고 있어요.
컬럼비아대 저널리즘 스쿨 원장(dean)은 워싱턴포스트 편집국장(managing editor)을 지낸 뒤 뉴요커(The New Yorker)로 옮겨 현장 기자로 활약했던 스티브 콜(Steve Coll·64)이 2013년부터 맡고 있구요. 캐슬린 킹스베리(Kathleen Kingsbury) 뉴욕타임스 오피니언 에디터(우리나라의 주필 격)가 컬럼비아대 저널리즘 스쿨을 졸업한 대표적인 현역 언론인이예요.
한국 언론과 기자의 위상은 근래 추락을 거듭하고 있어요. 이로 인해 저널리즘(언론)이 제 기능을 못한다면, 한국 민주주의 역시 저급한 수준으로 퇴행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조셉 퓰리처의 말처럼, 언론이 일어서야 우리나라도 일류국가로 도약할 수 있고, 질 낮은 언론만 판 친다면 결코 더 나은 단계로 전진할 수 없겠지요.
최근의 저널리즘 스쿨 설립 열기가 침체된 한국 저널리즘에 활력을 불어넣고, 기자와 경영인의 분발과 혁신을 자극하는 전환점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