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민주주의가 도널드 트럼프 정부 시기를 거치며 퇴보했다면, 한국 민주주의 역시 문재인 정부를 거치며 후퇴했습니다.”

국내외서 활동하는 사회과학자들이 참석한 세미나에서 전임 문재인 정부와 미국 트럼프 정부의 유사성이 거론됐다. 신기욱 스탠퍼드대 쇼렌스타인 아시아태평양연구센터 소장(사회학과 교수)은 14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민주주의와 한국사회’ 세미나(사회 장덕진 서울대 교수)에서 한국 민주주의 위협 요소로 비자유주의, 포퓰리즘, 양극화 세 가지를 제시하고, “비자유주의는 자유주의의 빈곤을 뜻하고, 포퓰리즘은 반다원주의를 강화했다”며 “경제와 정치 양극화는 기성 정치에 대한 불신과 혐오를 낳았다”고 분석했다. 이로 인해 “극단적 이념 대결의 고착, 법에 의한 정치의 대체, 선동을 야기하는 가짜 뉴스 범람과 탈진실 도래 등이 우려된다”며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가 약화하면 민주주의가 무너질 수 있다”고 진단했다.

14일 오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열린 '민주주의와 한국사회' 세미나에서 신기욱 스탠포드대 교수가 발언하고 있다./박상훈 기자

김호기 연세대 교수는 “이번 대선은 민주화 시대 이후 처음으로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가 아니라 신구(新舊) 기득권 간 싸움이라는 프레임을 형성했다”면서 “민주주의는 정치학자 야스차 뭉크가 ‘위험한 민주주의’(2018)에서 주장한 것처럼 파시즘, 공산주의와 맞서 싸웠던 것에 이어 세번째로 새로운 ‘포퓰리즘의 모멘트’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이어 “현재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의 위기는 두 가지 형태를 띤다”며, “포퓰리즘을 등에 업고 ‘권위주의적 스토롱맨’이 독재로 나가는 ‘권리 없는 민주주의’가 하나라면, 테크노크라트의 과두제가 민주주의를 압도하는 ‘민주주의없는 권리 보장’이 다른 하나”라고 했다. 이날 세미나 논의 과정에서 “지난 한국 대통령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나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현 대통령) 모두 ‘스트롱 맨’적인 징후들을 많이 보여준 후보였다”(신기욱)는 지적도 나왔다. 양 진영의 지지층이 ‘노사모 - 문빠 - 개딸’로, ‘박사모 - 태극기부대 - 이대남’으로 이어지는 계통적 유사성도 지적됐다.

경제학자인 이일영 한신대 교수는 ‘한국 경제의 두 가지 분기와 민주화 체제 위기’를 주제로 한 발제에서 “우리 사회체제와 정치체제, 경제체제에 걸쳐 위협을 주는 분열적 요소가 심화되고 있다”면서 “세대적 분열을 촉발하는 경제적 구조가 존재하고 있고 이를 정치적으로 동원하는 요소가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특히 “2008년 이후 이뤄진 산업구조 재편이 지역 경제와 세대 경제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 있다”며 “미국에서 트럼프 주의가 나타났던 것처럼 서울·수도권과 지역 경제의 격차, 청년 세대 내 경제적 격차가 벌어지면 이를 정치적으로 동원하는 세력이 나타나고 이는 민주주의 질서를 위협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14일 오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열린 '민주주의와 한국사회' 세미나에서 이일영 교수가 발언하고 있다. /박상훈 기자

‘한국에서의 정치의 사법화, 사법의 정치화:민주주의의 위기와 권력분립의 원칙’을 발제한 허성욱 서울대 법대 교수는 “대한민국은 수도 이전에 대한 정치적 결정을 사법부가 내리는 경험을 한 이후, 정치적 어젠다가 사법부로 옮겨가 의사결정이 이뤄지는 과정이 가속화되면서 정치적 사법화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대법관이 누가 되느냐 어떤 인물들이 헌재에 들어가느냐에 정치적 지향이 개입되면서 사법의 정치화가 급속도로 일어났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문재인 정부에서 현직 법관이 민정수석 비서관으로 바로 자리를 옮긴다거나 하는 일들이 벌어졌다”며 “강제 징용에 대한 판결이나 이재명 후보 TV토론 선거법 위반 판결 등 사법의 정치화에 따라 판결의 결론과 논리에 영향을 주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정치 과정에서 이뤄지는 가치 배분의 과정을 사법부가 과연 얼마나 보완할 수 있을 것인지 우리 사회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화/ 14일 오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열린 '민주주의와 한국사회' 세미나에서 허성욱 교수가 발언하고 있다. /박상훈 기자

현재의 한국 민주주의를 위기로 규정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로 마련된 이번 세미나는 지난달 미국 스탠퍼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가 출간한 ‘South Korea’s Democracy in Crisis’의 필자들이 발제자와 토론자로 참여했다. 올 가을 ‘위기의 한국 민주주의’(이학사)라는 제목으로 한국어판이 출간되는 이 책은 신기욱 김호기 교수가 편집하고, 안병진 경희대 교수, 박명호 동국대 교수, 허성욱 서울대 교수, 정준호 강원대 교수, 이일영 한신대 교수, 빅터 차 조지타운대 교수, 래리 다이아몬드 스탠퍼드대 교수 등이 참여했다. 편집자인 김호기 교수는 “이번 책에서 우리는 민주주의 자체 못지 않게 민주주의 법, 민주주의와 경제, 민주주의와 시민사회, 민주주의와 국제관계, 민주주의와 공론장의 관계, 민주주의와 교육의 관계를 심도있게 다루고자 했다”고 말했다.

South Korea’s Democracy in Cris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