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아버지 몰래 맛본 술과 커피는 쓰기만 했다. 두 맛을 구분할 줄도 몰랐다. 그저 의아했다. 어른들은 왜 쓴 걸 좋아할까. 아버지가 말했다. “그게 인생의 맛이다. 먹다 보면 달다.” 그 맛을 알고 싶어 대학 가기가 무섭게 술과 커피를 마셨다. 비로소 두 맛이 구분되었다. 술에는 정신이 흐려지고 커피에는 잠 못 잘 정도로 각성되었다. 그때는 거북해서 즐기지 못했다. 즐길 줄 알게 된 것은 마흔이나 되어서였다. 술에 꾹꾹 욱여넣었던 감정이 흘러나가서 좋고, 커피에 이성이 빗질한 머리칼처럼 가다듬어져서 좋았다. 인생에 대해서도 “먹다 보면 달다”는 아버지 말씀의 의미를 깨닫던 무렵이었다.

니체는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균형을 강조했다. 둘 다 제우스의 자식이지만 아폴론 어머니는 신이고 디오니소스 어머니는 인간이다. 아폴론은 태양과 질서의 신이고, 디오니소스는 술과 격정의 신이다. 디오니소스가 보다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아폴론적 질서가 없으면 모든 것이 붕괴된다.

이걸 차용해서 나는 세계를 아폴론적인 ‘커피의 세계’와 디오니소스적인 ‘술의 세계’로 구분해 보곤 한다. 커피의 세계는 각성된 이성이 지배하고, 술의 세계는 방출된 감정이 지배한다. 커피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옳고 그름을 구분하고 정의와 진리와 질서를 추구한다. 술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희로애락을 겪고, 사랑과 우정을 고백하고, 사죄와 용서로 상처를 달랜다. 두 세계엔 제각기 음습한 뒷골목도 있다. 술의 세계에서는 범죄와 부패가 싹튼다. 커피의 세계에서는 옳고 그름을 강박적으로 따지는 논리와 윤리의 칼이 사람들을 잔인하게 난도질한다.

그간 술집이 줄어들고 카페가 대폭 늘어난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갈수록 술의 세계가 쪼그라들고 커피의 세계가 비대해지는 느낌이다. 곳곳에 고소, 진정, 악다구니, 음해, 악플, PC 논쟁이 난무하다. 살벌하고 각박하다. 관용, 이해, 소통, 공감을 말하면 위선이라 백안시당한다. 그러나 술의 세계와 커피의 세계는 균형을 이뤄야 한다. 헬라인들도 델포이 신전에서 연중 절반은 아폴론을, 나머지 절반은 디오니소스를 모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