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별세한 이종덕 단국대 석좌교수. 2016년 충무아트홀(현 충무아트센터) 사장 퇴임 무렵의 모습. /조선일보DB

예술의전당, 세종문화회관, 성남아트센터, 충무아트센터 등의 사장을 지낸 ‘한국 1호 공연예술 CEO’ ‘예술경영의 달인’ 이종덕(85) 단국대 문화예술대학원 석좌교수가 23일 오전 8시40분 별세했다.

‘예술행정’ 혹은 ‘예술경영’이라는 개념조차 희박하던 시절부터 문화예술 현장 경영자로 일했던 그는 시민에게 턱없이 높았던 공연장의 문턱을 낮추고, 예술인들에겐 제대로 된 환경과 무대를 가꿔주며, 반세기 동안 척박했던 우리 문화예술의 주춧돌을 놓은 거목(巨木)이었다. 그럼에도 늘 예술가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도록 애썼고, 스스로를 ‘뒷광대’라 부르며 무대 뒤에서 사는 삶을 자청했다. 그가 처음 쓴 책 제목도 ‘내 삶은 무대 뒤에서 이루어졌다’(2004)였다.

◇대한민국 1호 예술경영 CEO

1960~70년대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배우 신성일의 출연작 주제곡만을 선보이는 시네마토크 콘서트 ‘신성일의 프로포즈’의 충무아트홀 개최를 앞둔 2012년 4월, 이종덕 충무아트홀 사장과 배우 신성일의 모습. 이종덕 사장은 “한국영화의 중심이었던 충무로가 그 빛을 잃은 지 오래다. 한국 영화의 전성기를 알릴 만한 공연을 한다면 그 주인공은 당연히 신성일”이라고 했다. /이진한 기자

경복중·고등학교와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1961년 공무원이 된 그는 1963년부터 문화공보부 예술과에서 문화예술계와 인연을 맺었다. 경직되기 십상인 공직사회에서도 늘 아이디어가 반짝였다. 1974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피아니스트 정명훈이 2위를 차지했을 때, 김포공항부터 서울시청 광장까지 카퍼레이드를 벌인 것도 그의 작품이었다. 정명훈의 쾌거는 드라마가 됐고, 한국 예술가들의 자부심을 높여준 시대의 ‘사건’으로 회자됐다.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상임이사, 서울예술단 이사장, KBS교향악단 이사장, 예술의전당, 세종문화회관, 성남아트센터, 충무아트센터 사장을 지내며 예술행정 CEO로서 문화예술 발전에 헌신했다. 지금 한국 문화예술을 대표하는 공연장들은 그의 손길을 거칠 때 마다 관료적·폐쇄적인 구태를 벗고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났다. 88서울예술단 시절 문화공보부가 공보처와 문화부로 분리되면서 예술단이 공보부에 소속되자, 이어령 문화부 장관을 찾아가 담판을 지어 소속을 문화부로 옮기고 예술의전당 안에 연습실까지 확보했던 일화도 유명하다.

단지 하드웨어 뿐 아니라 예술가들을 격려해 창작 공연을 제작하고, 관객 중심의 공연 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물론, 후원 유치와 재정 자립도 향상을 통해 정부에 의존하던 극장 운영 방식을 환골탈태시킨 예술경영의 귀재이기도 했다. 예술의전당에서는 재정 자립도를 39%에서 65%로 끌어올렸다. 성남아트센터에서는 김훈의 소설을 원작으로 뮤지컬 ‘남한산성’을 제작했고, 충무아트홀에서는 자체 제작한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으로 100억원 넘는 매출을 올렸다. 세종문화회관에서는 발레리나 강수진이 있던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국내 초연을 성사시켰다.

◇"군림하는 대신 녹아드는 리더"

2014년 1월 21일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공연계 대부 '이종덕 충무아트홀 사장'의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출판기념회 시작에 앞서 문화계 인사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배우 이순재, 김종규 삼성출판박물관 관장, 이종덕 충무아트홀 사장, 영화배우 강신성일, 김동호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장, 영화배우 문희, 배우 박정자, 손숙 마포문화재단 이사장, 나경원 한국스페셜 올림픽 위원회 회장, 영화배우 윤일봉. /조선일보 DB

사람들의 마음을 한 데 모으고 인재를 키워내는데도 탁월했다. 박인건 대구오페라하우스 대표, 유희성 서울예술단 이사장, 김희철 정동극장장, 노재천 성남문화재단 대표, 이창기 전 마포문화재단 대표 등이 그와 함께 일하며 예술경영을 익혀 지금 한국의 문화예술을 이끌고 있다. 사장이 직업인 것 같은 인생 역정이었지만 스무살 갓 넘은 신입사원이나 청년 예술가들과도 격의없이 어울려, 그가 자리를 옮길 때면 늘 젊은 직원들이 눈물을 흘리곤 했다.

서울예술단 시절 가난한 젊은 예술가들을 뒷바라지하며 굶는 사람 없는지 챙기고, 배고프면 치킨을 시켜주는 큰 형 노릇을 했던 일도 널리 알려져 있다. 예술의전당 사장 때 빠른 개혁에 노조가 반발하자, 콘서트홀 앞에서 시위 중인 노조원들을 설득하고 ‘사퇴냐 아니냐’ 현장투표를 제안해 즉석에서 더 많은 찬성을 이끌어내며 설립 이래 처음 3년 임기를 채웠던 일화도 있다.

2016년 1월 15일 오후 서울 중구 충무아트홀에서 열린 이종덕 사장의 퇴임식장, 이 사장은 송별사를 읽다 눈물을 참지 못하는 20대 직원의 모습에 함께 눈가를 훔쳤다. / 장련성 기자

충무아트홀(현 충무아트센터) 시절 함께 일했던 한 직원은 “그 분의 진정성과 따뜻한 카리스마는 아무도 못 당한다. 군림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 속으로 녹아들어가 함께 일하는 참된 리더였다”고 했다. 2016년 충무아트홀 사장에서 물러날 때 20대 직원이 송별사를 읽다 눈물을 짓고, 이종덕 사장도 함께 눈물 흘리는 모습은 요즘 보기 드문 리더의 상징처럼 남아있다.

충무아트홀에서 물러난 뒤엔 단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원장⸱석좌교수로 후학양성에 힘썼다.

전국문예회관연합회 창립 초대 회장(1996),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1998~99)을 맡았고, 1970년대 중반부터 한센병 환우들이 사는 성라자로마을을 돕는 일에 헌신했다. 광화문 문화포럼 등 많은 문화예술 관련 포럼과 모임을 이끌었다. 2012년 연세대 총동문회 ‘자랑스런 연세인 상’을, 2013년에는 단국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6년 충무아트홀 사장에서 물러난 뒤엔 단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원장⸱석좌교수로 후학양성에 힘썼다.

충무아트홀 사장 그의 집무실에는 시인 구상의 시 '꽃자리'가 걸려 있었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장련성 기자

‘내 삶은 무대 뒤에서 이루어졌다’(2004), ‘공연의 탄생’(2014) 등을 썼다. 옥관문화훈장(1994), 보관문화훈장(2009), 한국뮤지컬대상 특별상(2010), 한국뮤지컬어워즈 공로상(2019) 등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영주 여사와 4녀가 있다. 장례식장은 성라자로마을 내 성당(의왕시 소재)이며, 발인은 25일 오전 10시. 장지는 안성추모공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