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오전 강릉국제영화제 포럼 '포스트 코비드 19: 뉴노멀 시대의 영화제'에서, 사전 촬영한 영상을 통해 기조발제를 하고 있는 피어스 핸들링 전 토론토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의 모습. /강릉국제영화제

“지금까지 영화제들은 쭉 뻗은 길을 달려왔어요. 규모는 커지고 관객은 많아지고 더 많은 미디어가 주목하며 큰 영화제 시상식엔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됐죠. 제가 일한 37년 동안 토론토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코로나로 그 모든 것이 바뀌고 있어요.”

6일 오전 강릉국제영화제(GIFF·조직위원장 김동호) 강릉포럼이 열린 라카이 샌드파인 리조트 컨벤션홀의 대형 화면 속에서 피어스 핸들링 캐나다 토론토국제영화제 전 조직위원장이 말했다. “영화제는 지금 충격 앞에 겸손해지고 있어요. 관객이 누구인지, 영화제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할 시점입니다.”

GIFF는 이날 ‘포스트 코비드-19: 뉴노멀 시대의 영화제’를 주제로 포럼을 열었다. 세계 국제영화제의 코로나 사태 대응 경험을 공유하고, 이후 영화제의 비전과 지속 가능한 새 틀을 모색하는 자리. 핸들링 위원장의 기조 발제 뒤 해외 국제영화제 조직·집행위원장들의 영상 메시지가 이어졌다. 참여한 위원장들은 카를로 샤트리앙 독일 베를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비롯해, 프랑스 브줄, 일본 후쿠오카와 도쿄, 미국 뉴욕, 이탈리아 우디네, 홍콩, 말레이시아, 러시아 모스크바, 콜롬비아 등 10명. 이후 국내 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들의 현장 토론이 이어졌다. 박광수(서울여성), 배창호(울주산악), 신철(부천판타스틱), 이준동(전주), 전양준(부산), 조성우(제천음악) 위원장이 참여했다.

◇코로나 시대 영화제, 새 관객 찾는 가능성 발견

6일 오전 강릉국제영화제 포럼 '포스트 코비드 19: 뉴노멀 시대의 영화제'에 참석한 국내의 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들이 토론하고 있다. /강릉국제영화제

국제영화제들은 대부분 엄청난 재정 압박을 받고 있다. 정부 지원이 있는 유럽과 달리 영화제 자체적으로 손익을 맞춰야 하는 북미 지역 영화제들의 타격이 훨씬 직접적이며 크다. 토론토의 핸들링 전 위원장은 “온라인화를 거부해온 많은 영화제들이 지금 특수한 상황에서 온·오프라인 통합형 혹은 온라인 영화제로 전환했지만, 이런 형태가 오래 갈 수는 없다”고 했다.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사들은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 스타들이 등장하고 미디어의 주목을 받는 시상식을 원하죠. 그렇지 않다면 돈을 내지 않을 것이고, 그건 후원 기업들도 마찬가지에요. 온라인영화제는 재정적으로 존립이 어려워요.” 핸들링은 또 “토론토도 온라인 영화제로 전환하면서 많은 영화를 컴퓨터 화면으로 봤다. 너무 낯설고 메마르고 차가운 경험이었다. 입장 제한된 극장도 영안실에 있는 듯 생기가 없더라”고도 했다.

코로나로 국제영화제들이 새롭게 깨달은 것도 있다. “영화제는 배타적이고, 표도 구하기 어렵고, 진입 장벽이 높으며 신도가 돼야만 내부를 알 수 있는 종교 같다”고 여겼던 일반 관객 중에 온라인으로 집에서 볼 수 있게 되면서 영화제 상영작을 보는 이들이 생겨난 것. “영화제 관객도 나이가 들어가고 있었고, 영화제 기간 그 장소에 꼭 와야 하는 제약도 있었죠. 매년 오는 열성 관객 외에 온라인을 통해 상영작을 본 지방과 전국, 도시 밖의 새로운 관객들로부터 피드백을 얻게 됐어요.”

그는 “특히 칸이 영화 마켓을 온라인으로 성공적으로 운영하면서 창작자와 배급사들이 영화를 팔러 영화제에 오지 않고 온라인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된 데 대한 위기감도 커진다”고 했다. “온라인 영화제만 운영한다는 건 영화제에 죽음의 종소리를 울리는 거나 마찬가지에요. 영화제 역할이 사라지고 궁극적 목적이 무너져버리니까요.”

그는 “영화제의 원래 목적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영화제는 규모를 키우고 미디어의 관심을 끄는 것이 아니라, 본래 영화 문화를 창출하고 더 다양한 목소리를 소개하며, 국제 영화계가 다양성을 반영토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지적했다.

◇"상업적 경쟁력 부족한 나라 감독들이 더 큰 타격"

프랑스 브줄국제아시아영화제 마르틴 떼루안느 조직위원장은 “영화제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과 판매하는 사람을 이어 관객이 영화를 볼 수 있도록 배급사를 통해 배포한다. 영화제가 없다면, 그들은 어떻게 서로를 발견하고 재원을 마련할 수 없다. 이건 선진국과 달리 상업적 경쟁력이 부족한 국가 감독들에게 더 현실적인 문제”라고 했다.

독일 베를린국제영화제 카를로 샤트리앙 예술감독은 “우리 영화제는 베를린 시민 관객이 많아 코로나 상황이 심각하지 않을 때 오프라인 극장에서 상영할 수 있었다”며 “하지만 영화제 출품작을 지원할 방법이 코로나 사태로 너무 많이 줄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일본 후쿠오카 아시아영화제는 올해 행사를 아예 내년 5월로 연기했다. 마에다 슈 집행위원장은 “극장의 큰 스크린으로 영화를 보고 감독과 관객이 대화하는 경험이 중요하다. 온라인으로 여는 영화제는 진정한 의미의 영화제는 아니라고 본다”고 했다. 이탈리아 우디네극동영화제 사브리나 바라체티 집행위원장은 “영화산업에 불법 복제물이 판치는 인터넷은 악마 같은 존재였지만, 코로나로 그 상황이 바뀌었다”고 했다. “우리 영화제는 이탈리아 최대 동영상 사이트와 파트너십으로 새로운 온라인 플랫폼을 완성했어요. 한국과 일본 감독들의 대담을 온라인 중계하고, 매일 저녁 가상 레드카펫 행사를 열어 배우, 평론가, 특별 게스트를 초청해 영화 이야기를 온라인으로 듣게 했습니다.”

윌프렝드 웡 홍콩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은 “두 번 개최 기간을 옮긴 끝에 올해는 영화제를 끝내 취소했다. 하지만 신인 발굴과 선정작 상영 노력은 계속하고 있다”고 했다. “온라인으로 우리 스태프들이 공들여 뽑은 선정작 리스트를 공개했어요. 관객들 영화 선택에 도움이 되니까요. 또 재능있는 신인 감독을 발굴하기 위한 국제영화평론가협회상 등도 온라인으로 시상했습니다. 극장에서 영화 상영이 가능해진 요즘은 선정작 중 일부를 ‘오늘의 영화’로 상영하고 있습니다.”

사무엘 하미에르 뉴욕 아시아영화제 집행위원장은 “코로나가 영화제의 역할에 대해 멈춰서 생각해볼 기회를 줬다”고 했다. “코로나 이전의 큰 영화제들은 규모를 내세우는 문화산업에 가까웠다. 늘 새로운 키아로스타미나 고레에다를 찾는다고 하는데, 그건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히사마츠 타케오 도쿄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은 영화제의 재정 문제를 크게 우려했다. 그는 “우리 영화제에 대한 정부 지원이 중단됐고, 사기업도 다들 올해는 후원금을 유보하거나 삭감하려고 한다”며 “새 후원업체를 찾아야 하는데 그 중엔 넷플릭스와 아마존도 포함된다. 결국 영화제에 온라인 콘텐츠 서비스 업체의 목소리가 커질테고, 영화제 출품작 선정에도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극장 버리고 BTS처럼" VS “영화제는 극장에서 해야”

6일 오전 강릉국제영화제 포럼 '포스트 코비드 19: 뉴노멀 시대의 영화제'에 참석한 국내의 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들이 토론하고 있다. /강릉국제영화제

국내 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들은 코로나 사태의 경험이 서로 다른 만큼 처방도 서로 달랐다.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의 신철 집행위원장은 “영화의 정의를 다시 하고, 극장을 버려야 할 때가 온 것 아닌가라는 과격한 질문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오프라인 영화제를 준비하다 제대로 못하게 되니 그 비용이 그냥 증발해버려요. 영화의 정의를 다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테크놀로지는 저만큼 앞서고 있는데 영화의 정의는 어두운 극장에서 두 시간 동안 같이 보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에 갇혀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 해요. 극장 스크린까지 디지털로 바뀌면서 영화를 상영하는 매체간의 차이도 사라지고 있어요. 그렇다면 영화제의 역할과 정의도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요. 1년 내내 연중 무휴로 디지털로 팬들과 소통하면서 1년에 한두번 투어 등으로 직접 만나는 BTS 같은 방식도 생각해봐야 해요.”

반면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조성우 집행위원장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축제는 특별한 시간과 공간 만들어내는 것이고, 그 안에서 소통의 깊이를 만들고, 취향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유대감을 강화하고, 우리가 지향하는 영화의 제작을 활성화시키는 것이며, 그게 우리의 목표”라고 했다. “영화적 감동의 핵심에 음악이 있는 영화를 추구하는 우리 영화제는 제대로 된 음향설비와 극장이 중요합니다. 코로나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영화제가 저희에요. 온라인 플랫폼에 선구적인 음악영화들로 카테고리를 만들긴 했지만 개막식은 오프라인으로 했습니다. 영화제는 극장에서 해야 합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박광수 집행위원장은 “왜 여성영화제가 존재하는지 스스로 질문하며 답을 찾아나갔다”고 했다. “우리는 스크린에 많이 걸리기 어려운 여성영화를 상영하고, 여성영화인을 발굴 지원하고, 교육하고, 관객과 이야기하는 영화제에요. 그래서 50인의 여성 영화인에게 지원금 드리면서 1분씩 영상을 만들게 해 50인이 함께 만든 개막작을 상영했죠. 역대 가장 많은 출품작이 들어왔고, 예산 상당 부분을 여성영화인들 지원책으로 돌렸습니다.” 박 위원장은 “하지만 이런 건 단기적 묘책일 뿐”이라며 “코로나로 인한 경제위기는 곤 문화예술 예산 삭감으로 이어진다는 통념 작동하고 있다. 영화제 집행위원장들이 모임을 정례화해 한 목소리를 내야 할 필요를 느낀다”고 제안했다.

부산국제영화제 전양준 집행위원장은 “코로나 사태는 국제영화제의 정체성이랄 수 있는,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세계 각국 감독의 대면 커뮤니케이션 자리를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게 하는 최악의 재난”이라며 “방역 예산 등 재정적 압박도 컸다”고 했다. “미국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는 심사위원들만 보고 시상했는데, 거의 관심을 끌지 못했고 직원 150명 중 50명을 구조조정으로 내보냈습니다. 남의 일 얘기하듯 할 수 없는 상황이에요.” 이 영화제는 아마존과 제휴해 선정작 서른 편을 무료로 공개했는데, 이 영화들이 불법 파일로 유출되는 최악의 상황까지 맞았다. 전 위원장은 “이런 이유로 디지털영화제는 유럽에선 거의 폐기된 상태”라며 “오늘 아침 코로나 상황 확인하니 내년 초 베를린 영화제를 열어야 할 독일에서 어제 하루 확진자수가 2만명, 사망자수가 160여명이었다. 내년 전망이 어둡고, 희망적 말씀 드리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올해 넓은 야외공간을 활용한 차량 100대 규모의 야외 상영 등으로 화제를 모은 울주세계산악영화제 집행위원장 배창호 감독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흔한 말이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코로나 사태 역시 가까운 시일 내 끝날 것입니다. 그게 내년이 될지는 모르지만요. 마스크 벗고 극장에서 축제 즐길 수 있는 날이 꼭 오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