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병훈 교수는 "한국의 자칭 민주주의자들이 굳이 민주와 자유를 떼어놓으려는 저의와 그 무지를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자유 없는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고 했다. /오종찬 기자

“국민의 뜻을 내세워 반대편을 겁박하고 법치(法治)를 무력화하면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민주주의로 포장한 독재일 뿐이다.”

중진 정치학자 서병훈(65) 숭실대 교수는 평생 연구 주제인 한국의 민주주의에 걱정이 많다. 정년을 맞아 ‘민주주의: 밀과 토크빌’을 낸 이유도 그 때문이다. 19세기 유럽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과 알렉시 드 토크빌은 하원의원으로 현실 정치에 몸담으면서 민주주의의 한계를 절감하고 대안을 담은 저작을 남겼다. 서 교수는 이들이 경고한 민주주의의 위험을 이렇게 요약한다. ‘밀은 다수가 사악한 이익에 빠져 계급입법을 추구하면 대의민주주의가 파탄에 이른다고 했다. 토크빌은 민주사회 사람들이 오도된 평등 제일주의에 빠지면 다수의 압제(壓制)를 자행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국의 정치 현실을 겨냥한 듯한 말이다.

서병훈 교수는 “자칭 민주주의자들이 민주와 자유를 떼어놓으려는 저의를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자유 없는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라고 했다. /오종찬 기자

−현 정부는 국회 다수 의석을 무기 삼아 ‘5.18 역사 왜곡 특별법’ 같은 걸 밀어붙인다. 토크빌이 경고한 ‘민주 독재’가 현실화되고 있다고 보나.

“민주 독재의 경향을 보이는 건 사실이다. 공론장의 토론을 막는 그런 법이 어떻게 가능한가. 유신헌법을 떠올리게 한다. 민주주의는 다수 힘으로 모든 걸 밀어붙이는 제도가 아니다. 그건 오만이고, 실패로 가는 첩경이다.”

−민주주의가 자유주의를 거부하면 전체주의로 가는 문이 활짝 열린다고 경고했다.

“민주주의가 건강하게 발전하려면 자유주의와 같이 가야 한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법으로 보호하자는 법치주의와 연결된다. 민주화운동 했다는 집권 세력은 다수의 뜻을 내세워 적폐 청산 한다며 반대 세력을 억압한다. 법과 제도는 무시한다. 히틀러는 민주주의 등에 올라타 ‘국가사회주의’라는 괴물을 만들어냈다.”

−한국에선 자유주의를 보수 기득권층의 이념 정도로 생각한다.

“진보 진영에선 자유주의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집권 민주당이 헌법 전문에서 ‘자유’를 빼겠다고 해 논란이 되지 않았나. 서구 좌파가 자유주의를 민주주의와 대립하는 것으로 본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우린 해방과 6·25를 겪으며 자유주의를 개인주의나 친미(親美)로 협소하게 받아들인 측면이 있다. 자유주의자 밀은 노동자와 여성 등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데 앞장섰다. 자유주의를 품어야 민주주의가 더욱 건강해진다.”

서병훈 지음, 아카넷.

−대통령 비서실장이 8·15 광화문 집회 주최자를 향해 ‘살인자’라고 했다.

“도덕적 정당성이 있다고 생각하니 오만해진다. 자기들이 다수라 생각하니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정권 지지층만 국민이고 광화문 집회에 온 사람들은 국민이 아닌가. 절제와 관용이 무너지니 민주주의가 무너진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밀의 ‘자유론’을 들어 8·15 광화문 집회를 막은 정부 조치가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누군가의 행동이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면 이를 제한해야 한다는 게 밀의 생각이다. 하지만 예방적 조치를 취할 때는 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도록 더욱 신중해야 한다고도 했다. 유시민씨나 정부가 8⋅15 집회를 금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지난 주말 민노총 집회에 대해서도 똑같은 잣대를 적용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자유론’을 왜곡하는 것이다.”

−현 정부는 틈만 나면 ‘촛불 정권’을 내세운다.

“촛불 시위는 민심을 거역하는 권력은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줬다. 국민은 주권자이지만 무한 권능자는 아니다. 사려 깊은 절제가 없으면 민주주의를 위험에 빠뜨린다. 정치적 견해가 다른 사람에게 ‘문자 폭탄’을 보내고 신상 털이 하는 일이 촛불 민주주의 시대에 빈번히 벌어진다.”

−이 위기를 헤쳐나갈 대안은 없나.

“밀은 대중이 앞장서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전문가 역할을 강조하는 ‘숙련 민주주의’를 제창했다. 의견이 갈리는 국가 현안에 대해 중립적 입장의 전문가들에게 배심원 역할을 맡기면 어떤가. 이들이 양쪽 발언을 경청한 뒤 평결을 내리면, 사회적 정당성을 지닌 공론이 형성될 수 있다. 오디션 예능에서 전문가들이 심사를 맡고, 최종 결정은 청중이 하도록 선택권을 나눠 갖는 형식이다.”

−87년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에서 편 가르기는 갈수록 심하고 민주주의로의 길은 어둡다.

“민주주의는 단번에 이뤄지지 않는다. 지난 200년간 굴곡을 겪으면서 끊임없이 전진해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