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는 선별과 여과의 오랜 역사입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어떤 리스트를 제출하느냐는 것. 서현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의 ‘지하철에서 만나는 최고의 풍경 5’로 시작한 당신의 리스트 제11회에선 초상화가 정중원이 초상화 다섯 점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포토샵이 없던 시절에도 보정에의 유혹은 마찬가지. 자신의 초상화를 싫어했던 5인. ㅡ편집자

①디에고 벨라스케스, ‘인노켄티우스 10세 초상’(1650년) ②쥘 바스티앵르파주, ‘헨리 어빙 초상’(1880년) ③이명기·김홍도,‘ 서직수 초상’(1796년) ④존 싱어 사전트, ‘시어도어 루스벨트 초상’(1903년) ⑤1954년, 80세를 맞은 윈스턴 처칠(맨 앞)이 웨스트민스터사원에서 열린 자신의 초상화 제막식에서 단상에 올라 답례사를 하고 있는 장면. 처칠은 초상화(사진 오른쪽 위)를 맘에 들어하지 않았고, 처칠의 아내 클레멘틴은 이 초상화를 얼마 뒤 액자째로 불태웠다. /위키피디아·국립중앙박물관·게티이미지코리아

남이 보는 내 얼굴과 내가 생각하는 내 얼굴은 같지 않다. 단순히 더 젊고 아름다워 보이고 싶은 마음 외에도, 내가 떠올리는 나는 다양한 욕망과 가치를 은밀하게 반영한다. 초상화를 그리는 일은 그래서 까다롭다. 아무리 예술적 완성도가 높아도 당사자의 마음엔 들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사자가 원하는 얼굴을 그릴 것인가, 화가의 판단을 고수할 것인가. 이런 딜레마에 빠질 때마다 나는 옛 화가들의 사례를 떠올린다. 거장들조차 당사자와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치러야 했다는 사실을 실감하며, 후배로서 모종의 위안을 얻기 때문이다. 당신이 초상화가가 아니더라도, 이 다섯 사례는 인간에 관한 흥미로운 우화가 되리라 생각한다. 초상화가 드러내고 숨기는 대목에서, 인간 고유의 위태로움, 즉 허영과 겸손을 발견할 수 있을 테니.

1. 디에고 벨라스케스, ‘이노켄티우스 10세 초상’

1650년, 바로크 미술의 거장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로마의 판테온에서 작품 한 점을 공개했다. 자신이 거느리던 시종 후안 데 파레하를 그린 초상화였다. 초상화가 어찌나 생생했던지, 유럽 각지에서 애호가들이 그림을 보려고 모여들었다. 그중 한 명은 ‘다른 작품들은 예술이지만 이 작품은 진실이다’라고 극찬했다.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본 인사 중엔 교황 이노켄티우스 10세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초상화도 그려 달라고 주문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작품이 저 유명한 ‘이노켄티우스 10세 초상’이다. 후대에 ‘모든 초상화의 으뜸’이라는 평가까지 받을 정도였다. 천재 화가의 붓으로 말미암아 이노켄티우스 10세는 불멸의 존재가 된 것이다.

하지만 교황이 미래를 내다보았을 리 없다. 완성된 초상화를 본 그는 낙담했다. 그림 속 자신은 신성한 성직자보다는 심술 맞은 표정을 한 고집 센 노인에 더 가까웠다. 그 모습이 몹시 불편했던 교황은 그림을 사저에 처박아 두고 어디에도 내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무려 200여년이 지날 때까지 이 걸작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 ‘너무 진실되다(Troppo verro)’고 말했다고 한다. 이처럼 남의 얼굴을 보는 것과 나의 얼굴을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경험이다. 파레하의 초상에선 찬사의 의미로 쓰인 ‘진실’이 여기서는 불쾌함을 나타내는 용도로 쓰였으니 말이다.

2. 이명기·김홍도, ‘서직수 초상’

조선의 초상화는 얼굴의 미세한 흠도 빠뜨리지 않고 묘사했다. ‘터럭 하나라도 다르면 남이다’라는 지침이 엄격했기 때문이다. 대상을 적극적으로 미화한 유럽에 비하면 조선의 초상화 정신은 꽤 성숙해 보인다. 그러나 그림의 당사자들은 이 적나라한 초상이 기껍지 않았다. 실록에 의하면, 천하의 태종 이방원도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는 ‘당장 불살라 버리라’고 말했다.

18세기 조선의 문신(文臣) 서직수도 비슷한 심경을 자신의 초상화에 기록했다. ‘서직수 초상'은 조선 최고의 화가들이 합작한 걸작이다. 김홍도가 몸을 그렸고, 초상화로는 견줄 이가 없던 이명기가 얼굴을 그렸다. 그는 서직수의 얼굴에 퍼진 검버섯과 뺨에 난 세 개의 점, 그리고 그중 하나에서 자란 세 올의 털까지 묘사했다. 서직수는 그림이 탐탁지 않았다. 그는 화폭에 직접 “이름난 화가들이 한 조각 내 마음은 그려내지 못했다, 안타깝다”라고 썼다. 글귀를 수정한 흔적까지 있는 것을 보면 여간 복잡한 마음이 아니었나 보다.

개인의 자의식을 경계해 초상화 제작 자체가 조심스러웠던 유교 사회의 분위기를 생각해보면, 서직수의 고백은 희귀하고 소중하다. 사대부들의 초상화는 대다수가 왕의 하사품이었다. 그러나 서직수 초상은 당사자가 개인적으로 제작한 비공식 초상화다. 다행한 일이다. 초상화가 왕의 하사품이었다면, 서직수의 솔직한 불만은 감히 기록되어 전해지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3. 쥘 바스티앵르파주, ‘헨리 어빙 초상’

헨리 어빙은 19세기 영국의 전설적인 배우였다. 조각가 온슬로 포드는 햄릿을 연기하는 그의 모습을 흉상으로 만들어 선물했다. 흉상이 어찌나 마음에 들었는지 어빙은 포드가 다음 조각상을 만들 땐 직접 모델을 서 주었고, 둘은 평생 친구가 되었다.

그에 반해 어빙의 초상화를 그린 쥘 바스티앵르파주에게는 운이 따르지 않았다. 그는 어빙의 수수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그림에 담고자 했다. 그러나 어빙은 스케치 단계에서부터 불편함을 드러냈다. 대배우의 페르소나를 체화한 그에게, 그림이 보여준 평범한 사내의 모습은 직시하기 싫은 거울상이었다. 어빙이 어찌나 항의하고 불평했는지, 바스티앵르파주는 그림을 완성도 못 한 채 붓을 놓아 버렸다. 폐기될 위기에 처한 초상화를 구해서 보존한 건 어빙의 동료 배우, 엘런 테리였다. 테리는 어빙이 죽고 난 뒤 국립초상화갤러리에 그림을 기증했다.

어빙이 그토록 싫어했던 초상화는 오늘날 그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반면 어빙이 그토록 좋아했던 포드의 조각상은 그만큼의 명성을 얻지 못했다. 사실 조각상이 공개되었을 때 한 평론가는 ‘닮지 않았다’고 혹평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빙을 자기 객관화를 못 한 사람으로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어빙의 그런 마음은 우리 모두 마찬가지일 테니.

4. 존 싱어 사전트, ‘시어도어 루스벨트 초상’

미국의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자신의 공식 초상화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화가 시오발드 차트란이 그를 너무 온순한 모습으로 그린 탓이다. 가족들이 그림을 보며 ‘야옹이’라고 놀리는 지경에 이르자 그는 초상화를 폐기하고 새 화가를 고용한다. 바로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로 명성을 떨치던 존 싱어 사전트다.

사전트는 백악관에서 대통령과 함께 지냈다. 그는 루스벨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며 수많은 습작을 그렸다. 그런데 아무리 그려도 마음에 드는 구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럴수록 그는 대통령을 더 자주, 더 면밀히 관찰했다. 다혈질이었던 루스벨트는 하루 종일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는 사전트의 행동에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둘은 결국 충돌한다. 루스벨트는 사전트에게, “당신은 자기가 뭘 그리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는 게 문제요!”라고 소리쳤다. 이에 사전트는 “아뇨, 포즈 한번 제대로 못 잡는 대통령이 진짜 문제죠!”라고 받아쳤다. 폭발 직전까지 간 루스벨트는 순간 몸을 곧추세우고 계단 손잡이를 꽉 붙잡았다. 그때 사전트의 눈이 반짝였다. 그는 ‘그대로 계십시오!’라고 외치고 눈앞의 모습을 스케치했다. 이 웃지 못할 소동을 거쳐 완성된 초상화는 루스벨트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가 원했던 위풍당당한 모습이 완벽히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심술을 카리스마로 둔갑시킨 화가의 기지가 제 역할을 해낸 것이다.

5. 그레이엄 서덜랜드, ‘윈스턴 처칠 초상’

1954년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의 팔순 행사에서 그의 초상화가 제막(除幕)되었다. 의원들이 성금을 모아 제작한 것으로, 당시 미술계의 주목을 받던 그레이엄 서덜랜드의 작품이었다. 처칠은 답례사에서 ‘이 초상화는 모던 아트의 훌륭한 모범이다’라고 평했다. 하객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당시 대중에게 모던 아트란, 아름다운 고전 미술에 반해 추하고 충격적인 것을 그리는 미술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처칠은 자신의 초상화가 ‘참 열심히도 못 그린 작품’이라 조롱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공석에서 유머로 불만을 에둘렀던 처칠은 사석에서는 초상화가 ‘추잡하고 악의적’이며 자신을 ‘시궁창 주정뱅이’처럼 그려놨다며 분노했다. 칙칙한 색으로 채색된 화면 속 처칠은 구부정하게 앉아 주름과 뱃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히틀러를 무찌른 구국의 영웅은 과거의 영광일 뿐, 지금 당신은 여느 노인과 다름없다고 초상화는 직언했다. 안 그래도 노령 탓에 정계 은퇴를 압박받던 처칠에게 이는 큰 상처로 다가왔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 대담한 작품을 볼 수 없다. 그림이 통째로 불살라졌기 때문이다. 소각을 지시한 건 처칠의 아내 클레멘틴이었다. 초상화를 볼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는 남편의 모습을 차마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서덜랜드의 초상화에서 자신의 노쇠함을 직시한 탓일까. 처칠은 초상화가 제막되고 넉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수상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