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들은 일주일에서 열흘 간격으로 절정의 꽃이 바뀐다. 매화가 피고 나면 목련, 목련이 피고 나면 벚꽃이 만개하는 식이다. 봄꽃들이 차례로 카덴차(연주에서 솔로 악기가 기교적인 음을 화려하게 뽐내는 부분)를 연주하는 것 같다. 이번 주는 복사꽃 차례다.

요즘 한창인 복사꽃.

복사꽃이 만개했다. 주변에 복사꽃이 이렇게 많았나 싶게 복사꽃이 지천이다. 역시 꽃이 피니 주목을 받는 것이다. 복사꽃(복숭아꽃)은 꽃색이 연분홍색인데다 꽃 안쪽으로 갈수록 붉어지는 것이 요염한 느낌을 주는 꽃이다. 과일꽃 중 가장 섹시한 꽃이 아닐까 싶다. 박완서 작가가 즐겨쓴 표현으로 하면 ‘화냥기’가 느껴지는 꽃이다. 조지훈의 시 ‘승무’에서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가 괜히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복사꽃이 요즘 제철이다.

복사꽃을 볼 때마다 박완서 작가의 단편 ‘그리움을 위하여’가 떠오른다. 이 소설은 작가가 2001년 발표한 그리 길지 않은 글이다. 그런데도 물 흐르듯 자연스러우면서도 현란한 문장, 사태의 본질을 꿰뚫는 시선, 그리고 꽃을 양념처럼 살짝 얹는 솜씨 등 박완서 글쓰기의 특징을 골고루 보여주는 글이다.

강가에 핀 복사꽃.

소설 줄거리는 이렇다. ‘나’는 사촌동생을 ‘파출부처럼’ 쓰고 있다. 사촌동생은 바지런하고 음식·살림 솜씨도 좋았고 얼굴도 예뻤다. 젊어서 어른들이 ‘인물값 할까 봐’ 걱정할 정도였다. 둘다 남편을 여읜 후, 사촌동생은 남해 사량도라는 섬 민박집에 피서를 갔다가 몇 주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다. 동생은 뒤늦게 전화를 걸어와 그 섬의 점잖은 선주(船主)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기로 했다고 말한다. 사촌동생의 말을 들으며 화자가 느끼는 감정은 복잡하면서도 재미있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명랑하게 조잘대는 시냇물 위로 점점이 떠내려오는 복사꽃잎을 떠올렸다. 다음날 물메기 말린 걸 한보따리 들고 내 앞에 나타난 동생을 보자 그저 반갑기만 해서 허둥대며 맞아들였다. 석 달 만에 만난 동생은 어찌나 생기가 넘치는지, 첫 근친 온 딸자식이라 해도 그만하면 시집 잘 갔구나 마음을 놓고 말 것 같았다.>

‘조잘대는 시냇물 위로 점점이 떠내려오는 복사꽃잎’이라 했다. 복사꽃을 아는 사람이라면, 화사한 복사꽃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사람이라면 이 문장이 얼마나 보석같은지 알 것이다. 어떻게 목소리를 복사꽃잎에 비유할 생각을 했을까.

복사꽃.

소설에서 사촌동생은 환갑이 넘었지만 ‘볼이 늘 발그레하고 주름살이라곤 없는데 살피듬까지 좋아서 오십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 사촌동생을 꽃에 비유한다면 복사꽃이 가장 잘 어울릴 것 같다. 이처럼 박완서는 꽃잎 하나를 선택해도 최적의 꽃잎을 택했다.

복숭아밭만 아니라 산기슭이나 강가에서도 화사한 복사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산복사나무 꽃이다. 야생의 복사나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야생의 산복사나무를 개량한 것이 과수원에 있는 복사나무다. 진분홍색의 겹꽃이 피는 만첩홍도는 과일이 아니라 꽃을 보기위해 관상용으로 흔히 심는다.

만첩홍도.

다시 소설엔 ‘동생은 음식 솜씨가 좋았다. 구메구메 해놓고 가는 밑반찬은 누가 맛있다고 칭찬만 해주면 아낌없이 덜어줄 수 있을 만큼 넉넉하기도 하다’는 문장이 있다. 고(故) 김윤식 서울대 교수는 책 ‘내가 읽은 박완서’에서 “구메구메라는 부사가 보석처럼 작품 전체에 딱 하나 박혀 있다. 금강석은 단 하나면 족한 것”이라고 극찬했다. ‘구메구메’는 정확한 뜻을 찾아보니 ‘남모르게 틈틈이’였다. ‘구메구메’가 보석처럼 작품 전체에 딱 하나 박혀 있는 것처럼, 복사꽃도 작품 전체에 딱 한번 나온다. 그러나 복사꽃도 단 한번으로 족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