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 틸리야 테페 유적에서 출토된 황금 드리개. /국립중앙박물관

“위험에 빠진 아프가니스탄 유물을 보호해주세요.”

지난 15일(현지 시각) 국립 아프가니스탄박물관 소셜미디어에 다급한 호소문이 올라왔다.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이 20년 만에 아프가니스탄을 재장악한 직후다. 모하마드 파힘 라히미 국립박물관장은 “박물관 유물의 보안에 국제사회가 관심을 가져달라”고 호소했다.

2001년 3월, 탈레반은 고대 아프간 불교 미술을 상징하는 바미안 대불(大佛)을 보란 듯 폭파했다. 탈레반은 카불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유물들도 망치로 부숴버린 전력이 있다. 국내외 문화재 전문가들은 “유라시아 대륙의 중심이자 동서 문화의 접점이었던 아프간 문명의 유물과 유적이 또다시 위험에 처했다”고 우려하고 있다.

1.왼쪽은 파괴되기 전 바미안 서쪽 대불(높이 55m), 오른쪽은 탈레반이 폭파한 후 감실이 텅 비어있는 모습. 2.신라 금관과 꼭 빼닮은 아프간 금관. 3.베그람 유적에서 출토된 여신상. 4. 황금 허리띠. 5.용·인물 무늬 드리개. / 조선일보 DB·국립중앙박물관

◇7인의 열쇠지기가 지켜낸 황금 유물

“금이다!”

1978년 소련 고고학자 빅토르 사리아니디(1929~2013)는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틸리야 테페(Tillya Tepe) 유적을 발굴하고 있었다. 틸리야 테페는 우즈베크어로 ‘황금의 언덕’이란 뜻. 배화교 신전의 서쪽 구역에서 한 인부가 황금 원판을 발견했다. 2000년 동안 잠들어 있던 고대 박트리아의 공주가 눈앞에서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발견 소식은 곧 세계 각지로 퍼졌다. 소련의 노보스티 통신은 “투탕카멘 왕묘의 발견에 필적하는 20세기 고고학상 최고의 발견”이라고 했다. 이듬해 2월까지 이어진 발굴에서 무덤 6개가 조사됐고, 출토된 유물 2만여 점은 곧바로 비행기로 수송돼 카불 국립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빛나는 황금 금관, 초승달 모양의 장신구, 신화 속 인물이 조각된 동전, 아프로디테 조각상… 하지만 이 화려한 유물은 이내 위험에 처했다. 1989년 박물관 직원들은 전란을 피해 주요 유물을 대통령궁에 있던 중앙은행 지하 금고에 숨겼다. 7명의 열쇠지기들이 목숨 걸고 열쇠를 지킨 덕분에 살아남은 유물은 2004년 이들이 모여 금고를 열면서 세상에 다시 나왔다.

이후 유물은 아프가니스탄의 불안한 정세 때문에 전 세계를 떠돌았다. 2006년 프랑스 파리 기메박물관을 시작으로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등을 거쳐 2016년 12번째 국가인 한국에 왔다. 서울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연이어 열린 ‘아프가니스탄의 황금문화’ 특별전이다.

아프가니스탄 틸리야 테페 유적에서 출토된 1세기 금관. 신라 금관과 꼭 빼닮아 일찍이 학자들의 관심을 끌어왔다. /국립중앙박물관

특히 틸리야 테페 6호 무덤에서 출토된 1세기 금관이 한국 관람객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나뭇가지 세움장식 위에 반짝이는 황금 영락(구슬을 꿰어 만든 장신구) 등이 5~6세기 신라 금관과 똑 닮아 일찍이 학자들의 관심을 끌어온 유물이다. 학계 일각에선 “신라 금관의 어머니”라는 주장도 있지만, 직접적으로 신라 금관에 영향을 끼쳤다고는 볼 수 없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전문가들은 “특정할 수 없는 어느 기원에서 출발해 각각 아프간과 신라로 전파돼 만들어진 ‘형제 금관’ 정도로 봐야 한다”며 “틸리야 테페 금관은 신라 금관과 달리 언제든지 해체·재조립이 가능한 ‘분리형 금관’이다. 언제든지 분리해서 들고 이동할 수 있게 만든 유목민 특성이 반영됐다”고 말한다.

지난 2016년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아프가니스탄의 황금문화' 특별전에서 관람객들이들이 아프간 틸리야 테페 유적에서 출토된 1세기 금관을 살펴보고 있다. /김지호 기자
아프가니스탄 틸리야 테페 유적에서 출토된 황금 허리띠. /국립중앙박물관

◇“금관은 카불 모처에서 보관 중”

이 금관을 비롯해 아프간 황금 유물들이 위험하다. 14년간의 해외 순회전을 끝낸 유물은 지난해 4월 카불 국립박물관으로 돌아갔다. 아프간 현지 매체인 톨로뉴스는 지난해 말 “13국 29개 박물관 순회 전시를 통해 450만달러(한화 약 53억원) 이상의 수익을 남겼다”고 보도했다. 국립박물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유물의 일부는 박물관으로, 황금 보석 등은 대통령궁으로 옮기기로 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올해 2월에는 대통령궁에서 극소수의 인사만 초청해 단 하루 전시회를 열었다.

이후 아프간 내부에서는 안전을 담보할 수 없으니 황금 유물을 다시 해외로 내보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실제로 박물관 측은 유물 이동을 위한 국제 협의까지 시도했으나, 현재까지 금관 등 황금 컬렉션은 카불 시내를 빠져나가지 못한 것으로 확인됐다. 한국 전시를 담당했던 국립중앙박물관 관계자는 “유물이 포장된 상태로 카불 모처에 안전하게 보관돼 있다고 지난주까지 확인했다. 아직은 안전하지만 언제 어떻게 상황이 바뀔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아프간 국립박물관 직원들과 직접 연락이 닿고 있다는 A씨는 “컬렉션이 14년간 해외를 유랑한 이유가 안전 문제 때문이었는데 작년에 돌아가자마자 이런 일이 생겨서 마음이 아프다. 황금 유물은 현재 안전하게 보관 중이지만, 어디에 보관 중인지는 절대 기사에 쓰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그는 “탈레반 지도부가 국제 기조에 발 맞춰서 문화재를 보호하겠다고 발표하긴 했지만 그 무엇도 신뢰할 수 없는 조직이고, 중앙의 결정이 하부 조직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언제든 돌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며 “유물을 지키는 박물관 직원들의 안전도 안심할 수 없다”고 했다.

국립박물관의 다른 소장품들도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 라히미 박물관장은 지난 20일 뉴욕타임스 인터뷰를 통해 “박물관 소장품 5만여 점을 안전한 장소에 대피시키는 비상 계획을 세웠지만, 탈레반이 급속하게 장악하는 바람에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고 말했다. A씨는 본지 통화에서 “현재 라히미 관장과 소수 직원이 박물관에 남아 밤낮으로 유물을 지키고 있다”며 “7명의 열쇠지기 중 핵심 인물이었던 오마라 칸 마수디 전 국립아프가니스탄박물관장도 며칠 전 박물관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카불에 있는 국립아프가니스탄 박물관 입구 앞을 한 사람이 지나가고 있다. /AP

◇반세기 가까운 아프간 문화재 수난사

아프가니스탄은 그저 전쟁과 살육이 판치는 야만의 땅이 아니다. 유라시아 대륙 한가운데 있는 이곳은 고대부터 동서양 문명이 교차하는 길목이었고, 첨단 문화가 역동적으로 융화되고 교류하는 현장이었다. ‘문명의 십자로’라 불리며 꽃핀 아프간의 고대 문화는 한반도를 비롯해 주변 지역의 문화 연구에도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국립아프가니스탄박물관은 1970년대부터 뼈아픈 시기를 맞았다. 아프간에선 1978년 쿠데타 이후 1979년 소련이 침공해왔고, 민족 내분이 이어져 200만 명 이상 희생됐다. 정치적 혼돈 속에서 1990년대에 박물관 유물의 70%를 약탈당했다. 각지에서 출토된 소장품뿐 아니라 전시실 입구를 장식하던 카펫까지 도난당했다. 탈레반은 그나마 남은 것들 상당수를 망치로 부숴 버렸다.

지난 2001년 2월 박물관에서 자행한 유물 파괴 현장을 지켜본 아프간 역사학자는 후일 언론에 “그들은 먹이를 노리는 굶주린 호랑이 같았다”고 증언했다. 문화재 파괴의 주역은 탈레반 문화공보장관과 재무장관이었다. 이들은 당초 박물관을 관람하겠다며 찾아와 안내를 부탁한 뒤 박물관에 들어서자마자 쇠망치로 유물을 내려치기 시작했다. 3일간에 걸친 광란극 끝에 파괴된 문화재는 모두 2750여 점. 가이드로 차출됐던 학자들이 애원했지만 “파괴를 막으려 하면 도끼로 머리를 날려버리겠다”는 협박만 돌아왔다.

파괴되기 전 바미안 서쪽 대불(높이 55m). /조선일보 DB
탈레반이 다이나마이트로 폭파한 후의 바미안 대불 모습. 감실이 텅 비어있다. /조선일보 DB

바미안 대불 폭파는 반달리즘(vandalism·문화 역사물 파괴 행위) 광풍의 절정이었다. 수도 카불에서 130㎞ 떨어진 바미안 계곡, 힌두쿠시 산맥의 고원 암벽을 파낸 자리에 6세기 이후 조성된 석불이다. 당나라 승려 현장도, 신라의 혜초도 인도로 가는 여정에 이곳을 지나며 대불을 목도했다.

탈레반은 이 대불을 폭파하면서 “이슬람 교리에 따라 이교도의 우상을 파괴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굶주리는 사람들은 거들떠보지 않고 오직 ‘문화유산’으로서 대불을 보존한다며 돈을 대는 서방세계에 대한 복수”라고도 했다. ‘아프가니스탄, 잃어버린 문명’을 펴낸 이주형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20년 전 아프간 현장을 답사하며 만났던 이들, 열악한 상황에서 문화유산을 지키려 분투하던 이들의 눈이 떠올라 가슴 아프다”며 “바미안 대불의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게 국제사회가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