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백석(1912~1996)을 상징하는 나무를 고르라면 당연히 갈매나무일 것이다. 백석이 1948년 남한 문단에 마지막으로 발표한 시, ‘남(南)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의 마지막 부분에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가 나온다. 이 시는 백석이 해방 직후 만주를 헤매다 신의주에 도착했을 즈음 쓴 시인데, 절망적인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외롭게 눈을 맞고 서 있는 갈매나무로 표현했다. 신경림 시인은 책 ‘시인을 찾아서’에서 “이 갈매나무야말로 백석의 모든 시에 관통하는 이미지”라고 했다.

그렇다면 백석이 사랑한 꽃을 고르라면 어떤 꽃일까. 그 단초를 김연수 장편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을 읽다가 찾았다. 이 소설은 북한에 잔류한 백석이 시를 쓰지 않고 러시아문학 번역에만 몰두하다 1956년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해 마지막으로 시(체제 찬양시 ‘나루터’)를 발표하기까지 7년을 다루고 있다. 이중 1935년 첫 시집을 내려고 준비 중인 백석이 신문사 동료 현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다.

<”제목은?”

현이 화제를 바꿨다.

“시집 제목? 저문 6월의 수선이라고 할까봐.”

기행(백석)의 대답에 현이 눈을 치켜떴다.

“수선? 저문 6월의 수선?”

수선이라면, 그것도 6월의 수선이라면 두 사람이 공유하는 기억이 있었다. 이슬비 내리던 그해 6월의 무더운 밤, (중략) (준의 결혼피로연에) 가보니 방 하나를 통영 출신 여학생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중략) 기행은 그중 한 여학생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머리가 까맣고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한 사람이었다. 그는 첫눈에 반했다.>

거문도 수선화.

백석이 사랑한 여인으로 기생 자야와 함께 통영 박경련이 유명하다. 소설에 나오는 통영 출신 여학생이 바로 박경련이다. 백석은 통영까지 내려가 청혼을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백석이 시집 ‘사슴’을 시인 신석정에게 보내자, 신석정은 답례로 ‘수선화’라는 헌시를 썼고, 백석이 다시 그에 대한 답례로 수필 ‘편지’를 썼다. 여기에 통영의 여인을 향한 애틋한 감정이 드러나 있다.

<남쪽 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의 처녀 하나를 나는 좋아하였습니다. 머리가 까맣고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하였습니다. (중략) 총명한 내 친구 하나가 그를 비겨서 수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제는 나도 기뻐서 그를 비겨 수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나의 수선이 시들어갑니다. 그는 스물을 넘지 못하고 또 가슴의 병을 얻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만하고, 나의 노란 슬픔이 더 떠오르지 않게 나는 당신이 보내주신 맑고 고운 수선화의 폭을 치어놓아야 하겠습니다.>

거문도 수선화. 뒤로 바다가 보인다.

김연수가 이런 기록과 일화를 바탕으로 소설에 ‘저문 6월의 수선’이라는 표현을 쓴 것 같다. 이 정도 사연이면 백석이 가장 사랑한 꽃으로 수선화를 꼽아도 문제 없을 것 같다.

제주 대정읍 상모리에 피어난 제주 수선화. 뒤로 제주 바다와 산방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수줍은 듯 고개 숙인 수선화는 대정읍 일대 돌담과 길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봄이 성큼 다가왔다.

마침 수선화가 남녘에서 피는 계절이다. 수선화 중에서 거문도 수선화가 가장 예쁘다는 평을 받는다. 거문도 수선화는 맨 위와 두번째 사진처럼 흰색 꽃잎에 컵 모양의 노란색 부화관(덧꽃부리)이 조화를 이룬 금잔옥대(金盞玉臺)다. 금 술잔을 옥대에 받쳐놓은 모양이라는 뜻이다. 제주 수선화는 부화관 없이 꽃 가운데에 꽃잎이 오글오글 모여 있는 형태다. 초봄 육지 화단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수선화는 아래 사진처럼 꽃 전체가 노란색인 것이 많다. 수선화는 ‘머리가 까맣고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한’ 통영 아가씨와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아마 지금쯤 통영에도 수선화가 피었을 것이다.

서울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선화.


◇더 읽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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