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코로나 시국과 건강 등의 이유로 사진 촬영을 사양해, 기존 사진에 웹툰 ‘머니 게임’과 ‘파이 게임’ 장면을 합쳐 그렸다. /일러스트=이동윤

‘오징어 게임’ 이전에 ‘머니 게임’이 있었다.

거액의 상금, 밀폐된 공간, 절박한 인간. 미션은 없다. 일거수일투족이 생중계되는 밀실에서 정해진 시간만 버티면 참가자 모두 돈을 챙겨 집에 갈 수 있다. 이 얼마나 거저먹는 게임인가?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공생(共生)을 방해한다. “어떤 거짓말과 절도에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 욕망이 충돌하고 인간성은 시험대에 오른다.

이 같은 설정의 웹툰 ‘머니 게임’(2018)이 웹예능의 새 자원으로 각광받고 있다. 지난해 동명의 국산 웹예능이 제작돼 유튜브 누적 조회수 7000만을 넘긴 데 이어 이달에는 미국에서도 웹예능으로 탄생했다. K웹툰이 외국 제작진에 의해 웹예능으로 전환된 첫 사례로, 예능 콘텐츠로의 확장 가능성을 증명한 것이다. 최근 류준열·아이유 등 호화 캐스팅으로 화제를 모은 동명의 드라마 제작도 확정됐다. 원작 만화가 배진수(44)씨는 일련의 환호에 대해 “단순함”을 이유로 꼽았다.

지난해 4월 유튜브로 첫 공개돼 연일 화제를 불러모았던 웹예능 '머니게임'의 한 장면(위). 상금을 차지하기 위한 참가자들의 치열한 모략으로 인해 점차 파국으로 치닫는다. 아래는 최근 미국에서 제작된 동명의 웹예능. /유튜브

–K웹툰의 ‘리얼 예능화’가 현실이 됐다.

“여러 곳에서 손짓을 해주니 나도 자문(自問)해봤다. 막연하지만 답은 ‘심플함’ 같다. ‘데스 게임’ 장르는 연재가 길어지면 룰이 바뀌고 추가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규칙이 단순하면 거기에 적응하고 변주하는 인간의 셈법이 복잡해진다. 나는 그 심리에 주목했다. 누구나 자신을 선(善)이라 합리화하고, 그렇기에 서로의 갈등이 봉합되지 않는 우리 현실을 축소해 보여주고자 했다. 그 보편성이 주효한 것 같다.”

–영상 본 소감은?

“역시 알 수 없구나, 인간이라는 건. 서로 싸우고 헐뜯고…. 그 혼돈과 대환장 파티야말로 정확히 내가 만화로 표현하고자 한 장면이었다.”

상금(웹툰 원작에서는 448억원) 등 현실적 이유로 설정은 바뀌지만, 이들 웹예능은 일반 물가의 1000배가 적용되는 모든 생필품의 구매 비용을 상금에서 차감한다는 큰 틀에 기반한다. 상금을 아끼고, 상금 분배 인원을 줄이기 위해 협박과 이간질 등 각종 술수가 펼쳐진다.

웹툰 '머니 게임' 속 한 장면. /네이버웹툰

–웹툰은 어떻게 구상하게 됐나?

술자리에서 장난으로 ‘소주 한 병에 3000원인데 이 값이 1000배면 사 먹겠냐?’는 농담을 했다. 마침 그 술자리에 웹툰 편집자가 있었고, 만화로 그려보면 재밌을 것 같다고 하더라. 본격 구상을 위해 노량진 고시원에 들어갔다. 거기 보름간 갇혀 글을 쓰다가 밀실을 떠올렸다. 인간들이 사회를 벗어나 윤리가 제거된 룰을 받아들이면 어떻게 사회적으로 퇴화하는지, 그 퇴화가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보여주는 줄거리가 생겨났다.”

–대박 난 ‘오징어 게임’이 떠오른다.

“아직 안 봤다. 유사 장르라 나중에 무의식중에 소재로 쓸 것 같아서. 상금 서바이벌 장르는 아예 쳐다보지 않는다.”

‘머니 게임’은 ‘○○게임’ 3부작의 포문이었고, 계층 격차 문제를 노골화한 후속작 ‘파이 게임’(2020)이 지난해 12월 완결됐다. “‘밖’에서는 능력이나 기여도보다는 연고나 연줄, 혹은 그 외 수익 창출 능력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요소가 위치를 정하는 경우도 많잖아요? 하지만 아녜요. 이 게임은.”(‘파이 게임’ 대사). 현재 배씨는 마지막 시리즈를 구상하고 있다.

–서바이벌 장르, 왜 열광할까?

“현실의 축소판이니까. 예능 제작진과 회의할 때 내가 그랬다. 심심하게 끝날 수도 있다고. 제작진이 그러더라. 그 반대일 수도 있다고.”

–살아남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운이다. 솔직히 그렇게 생각한다. 다만 ‘될 대로 되라지’가 아니다. 그 운에 닿을 때까지 포기하면 안 된다. 뛰어난 지략이나 완력을 타고났으면 사는 데 유리하겠지만, 없으면 없으니까 노력해야 한다. 버둥거리다 보면 하늘이 결정한다.”

올해로 데뷔 10년, ‘이지 머니’는 없었다. 경북대를 졸업하고 대기업 CJ에서 일하던 그는 돌연 퇴사한다. “목표 없이 살다가 직장 생활 시작하고서야 꿈을 찾아 헤맸다. 글 쓰는 걸 좋아하니 영화 시나리오를 준비했다. 시나리오를 쓰다 보니 이걸 그림으로 옮기면 웹툰이 되겠다 싶어 뛰어들었다.” 이후 1년 정도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었다. “2011년 울산의 한 병원에서 야간 경비를 했는데, 불 꺼진 복도나 수술실은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다. 그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그는 이듬해 공포 웹툰(’금요일’)으로 데뷔한다.

–’안면인식장애’가 있다고?

“회사 그만둔 이유이기도 하다. 영업직인데 사람을 제대로 못 알아보니까. 만화가의 중요 소양 중 하나가 관찰력이지만, 나는 그런 게 없다. 처음 습작 만화 인터넷에 올렸을 때는 ‘초등학생이 그렸냐’는 댓글까지 받아봤다. 나는 내 만화를 소개할 때 아예 ‘비주얼 노벨’이라고 한다. 그림은 스토리를 위한 삽화일 뿐이다.”

–만화 못 그려도 만화가로 살 수 있나?

“아이디어로 승부하고 있다. 매일 연재해 1333화로 완결된 세 컷 만화 ‘하루 3컷’도 그렇게 나왔다. 내가 잘하는 건 ‘썰’ 푸는 거니까. 전략이 중요하다. 말하자면 내 만화는 편의점에 있는 ‘양념게딱지장 삼각김밥’ 같은 것이다. ‘참치마요네즈 삼각김밥’처럼 베스트셀러는 아니어도, 진열대를 다양하게 함으로써 살아남는 상품.”

2013년 연애 서바이벌 예능 프로그램 SBS '짝'에 출연한 배진수 만화가. 그는 결국 여자 3호와 부부가 됐다. /SBS

인생이 원래 서바이벌이라지만, 그는 결혼마저 서바이벌 예능으로 일궈냈다. SBS ‘짝’에서였다. 남자 5호는 여자 3호를 택했다. “내 전략은 하나였다. 오로지 한 명만 공략하는 것. 단순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