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달 내한 공연을 갖는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 크레디아

올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전 세계 예술가들이 ‘전쟁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앞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대해 날 선 비판을 아끼지 않았던 실천적 음악인이 라트비아 출신의 바이올린 거장 기돈 크레머(75)다.

이미 2010년 푸틴의 정적(政敵)으로 꼽혔던 러시아 석유 회사 전 회장 미하일 호도르콥스키를 위해서 자신의 음반 ‘심연으로부터(De Profundis)’를 헌정했다. 호도르콥스키는 징역형과 파산의 시련을 겪었다. 하지만 크레머는 그를 “진정한 러시아의 애국자”라고 부르며 “그의 불공정한 재판과 투옥은 러시아의 자유와 민주화를 위해 애쓰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중요한 정치적 상징”이라고 말했다.

라트비아 출신의 바이올린 거장 기돈 크레머. 우크라이나 지지와 전쟁 반대에 앞장서는 실천적 음악인이다. /크레디아

오는 30일부터 내한 연주회를 앞둔 그는 최근 서면 인터뷰에서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전적으로 반대하며, 이 사건은 현대 유럽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일 가운데 하나”라고 단언했다. 그는 “음악이 세상을 바꿀 수 없지만, 음악인들은 세상을 더욱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야 하는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단지 아름다운 소리 뒤에 숨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크레머는 구소련 시절인 1969년 파가니니 콩쿠르와 이듬해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잇따라 우승하며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그 뒤에도 쇼스타코비치와 바인베르크, 루이지 노노와 피아졸라 등 20~21세기 현대음악 작곡가의 낯선 작품들을 앞장서서 발굴 조명하면서 거장으로 거듭났다. 우크라이나 현존 최고의 작곡가로 꼽히는 발렌틴 실베스트로프(85)의 작품을 가장 많이 연주하는 바이올리니스트이기도 하다. 크레머는 “고국을 떠나서 난민이 되고 깊이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나만의 방식”이라고 말했다. 실베스트로프 역시 러시아의 침공 이후 고국을 떠나 현재 독일 베를린에 거주하고 있다.

기돈 크레머가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등 발트 3국의 젊은 연주자들과 창단한 '크레메라타 발티카'. 크레디아

올해 방한은 그가 1997년 라트비아·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 등 ‘발트 3국’의 젊은 연주자들과 함께 창단한 악단 ‘크레메라타 발티카(Kremerata Baltica)’의 창단 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됐다. ‘크레메라타’는 크레머의 이름과 동료·모임·실내악단이라는 뜻의 카메라타(Camerata)를 합친 조어. 말 그대로 크레머와 발틱 출신의 실내악단이라는 의미가 된다.

크레메라타 발티카는 30일 세종예술의전당과 31일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피아니스트 조성진과 쇼팽 피아노 협주곡 1~2번을 협연한다. 9월 2일 예술의전당에서는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에 영감을 받은 현대음악들을 모아서 ‘슈베르트 이후(After Schubert)’라는 주제로 음악회를 연다. 이처럼 고전(古典)을 연주하면서도 언제나 그 이후를 내다보는 것이야말로 그의 음악적 특징. 크레머는 “여러 양식과 악보, 시대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원한다”고 말했다. 그의 마지막 답변은 “내 평생의 슬로건은 ‘음악이 먼저(Prima la Musica)’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