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손민수 한예종 교수가 2022년 9월 7일 서울 서초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실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상훈 기자

피아니스트 손민수(46)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오른쪽 손목 안에는 티타늄 소재의 금속판이 들어 있다. 2008년 눈길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오른손이 부러지는 사고를 겪었다. 당시 부러진 뼈 조각을 고정하기 위한 수술의 흔적이다. 설상가상으로 부상 기간에도 왼손 연습을 거듭하다가 왼손에도 건초염이 생겼다. 손 교수는 7일 인터뷰에서 “양손 수술과 재활로 4년 가까이 연주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기나긴 재활과 복귀 과정을 거쳤지만 그는 “단단하게 두 발로 딛고서 스스로 걸어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던 시기”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고통스럽진 않았을까. 그는 조용히 웃으며 답했다. “설령 부상이 아니었더라도 음악은 원래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올해 제자 임윤찬(18)이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역대 최연소 우승을 차지하면서 사제는 국내외 음악계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손 교수는 “처음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관심 때문에 나와 윤찬이 모두 놀랐고 부담스러웠지만 천천히 각자의 위치로 돌아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연주자는 먼 미래를 내다보지도, 과거를 뒤돌아보지도 않는다. 그저 주어진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아가는 하루살이일 뿐”이라고 비유했다. 평소 말을 아끼고 카메라 앞에서 미소 짓는 걸 어색하게 여기는 점도 이들 사제는 닮았다.

‘단테의 신곡은 외우다시피 할 만큼 읽었다’는 임윤찬의 우승 직후 소감처럼, 손 교수는 지금도 새 학기가 시작하면 제자들에게 읽을거리를 추천한다. 그는 “이번 학기에는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서한집, 시인 릴케의 ‘세잔에 대하여’ 등을 권할 것”이라며 “편지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거장들의 생생하고 진솔한 목소리가 담겨 있기 때문에 그들과 대화하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피아니스트 손민수 교수는 카메라 앞에서 미소 짓는 걸 쑥스러워하고 낯가림이 심한 편. 제자 임윤찬은 음악 외에도 스승과 닮은 점이 많았다. /박상훈 기자

제자 임윤찬이 대회 준결선에서 연주했던 리스트의 ‘초절 기교 연습곡’은 우승 이후 조회 수 240만회에 이를 만큼 폭발적 반응을 얻었다. 공교롭게도 올가을 스승이 전국 여덟 도시에서 연주하고 있는 곡이기도 하다. 손 교수에게도 이 곡은 각별한 사연이 있다. 미국 보스턴 뉴잉글랜드 음악원 유학 시절 ‘건반 위의 철학자’로 불리는 러셀 셔먼을 사사한 그는 당시 셔먼이 이 곡을 녹음하는 현장을 직접 지켜보았다. 손 교수는 “한 번 연주하기도 쉽지 않은 난곡(難曲)인데 셔먼 선생님께서는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않고서 세 번 연속해서 전곡을 연주했다. 그때마다 같은 곡을 다르게 해석하는 모습도 놀라웠다”고 말했다.

셔먼과 손 교수, 다시 임윤찬까지 이어지는 ‘셔먼 악파(樂派)’의 연결 고리가 리스트의 이 곡인 셈이다. ‘초절 기교’라는 이름 때문에 기교적으로만 까다로운 곡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원제는 초월(Transcendental)에 가깝다. 그는 “리스트는 ‘피아니스트들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큼 피아노의 한계를 극한까지 실험했지만 테크닉은 연주의 출발점일 뿐 종착점이 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종착점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건 뭘까. 그는 “리스트의 작품에서 음악은 시(詩)가 되고 연주자는 시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부상 복귀 이후 손 교수는 피아노의 ‘신약성서’로 불리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전곡(32곡)부터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까지 선 굵은 연주와 녹음으로 주목받았다. ‘구약성서’로 불리는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전곡 연주가 다음 목표다. 그는 “주어진 시간 동안 음악의 험준한 산맥들을 묵묵히 등정하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