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헤어질 결심' 속 경찰서 장면은 옛 한국은행 부산본부에서 촬영됐다. /모호필름

“부산에선 조폭 영화만 찍는 줄 아시는데, 로맨스부터 SF 영화까지 충분히 찍을 수 있습니다.”

부산영상위원회의 로케이션 매니저들은 부산 전역의 5000여 곳을 데이터베이스(DB)로 구축해 관리하고 있다. 넷플릭스 드라마 ‘수리남’ 속 마약왕 전요환(황정민)의 저택 차고지는 옛 한국은행 부산본부, 목사실은 옛 부산외국어대 우암캠퍼스에서 촬영했다. SF 영화 ‘승리호’의 우주선 기관실은 한국해양대 실습용 선박의 기관실을 빌려 찍었다. 최근 개봉한 영화 ‘대외비’와 ‘리바운드’는 극 중 배경이 각각 1992년, 2012년 부산으로 실제 부산에서 촬영하며 영상위원회의 지원을 받았다.

부산영상위는 1999년 국내 최초로 설립된 영화 로케이션 촬영 유치 기관. 이곳의 로케이션 매니저들은 작품의 콘티(장면별 제작 계획)나 시나리오 발췌본을 보고 분위기에 맞는 장소를 추천, 섭외한다. 지난해 지원한 작품은 총 141편으로 서울(268편)을 제외하곤 전국 최대 규모였다. 촬영 일수로 따지면 921일로 서울(895일)을 뛰어넘었다. 하루 평균 2.5편이 부산에서 촬영된 셈이다.

부산 광안동 지하벙커에서 촬영한 드라마 'D.P.'. /클라이맥스스튜디오

부산 광안동에 있는 1200평 규모 지하 벙커는 영화·드라마 단골 촬영지. 일제강점기 광산이었던 자연 동굴을 1972년 전시 대피를 위한 지하 벙커로 개조했다. 최근 공개된 넷플릭스 영화 ‘길복순’에서 청부 살인 업자들이 회의하는 아지트의 전경으로 등장했다. ‘수리남’ 등의 로케이션 매니저를 맡았던 손일성 대리는 “드라마 ‘DP’ 마지막 회에 탈영병이 복수극을 벌이는 터널 외부 장면도 이곳에서 촬영했다”면서 “벙커 입구가 여러 곳인데 한쪽에선 DP, 다른 쪽에선 길복순을 찍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명대사 “느그 서장 남천동 살제”(범죄와의 전쟁)로 유명해진 남천동엔 옛 부산시장 관사가 있다. 1980년대 전두환 전 대통령의 별장으로 쓰이며 ‘지방 청와대’라 불렸던 이곳은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의 주요 무대인 ‘정심재’로 변신했다. 김선기 로케이션 매니저는 “거대한 입구, 저택까지 한참 올라가야 하는 길, 잔디 정원 등 감독이 요구한 진양철 회장 집의 조건과 딱 맞아떨어졌다”고 했다.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 속 진양철 회장댁 장면은 옛 부산시장 관사에서 촬영됐다. /래몽래인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은 시나리오 단계부터 부산을 주요 배경으로 설정했다. 기장 도예촌과 옛 한국은행 본부, 초량 차이나타운 등 부산 전체를 세트장처럼 썼다. ‘헤어질 결심’을 담당한 박준우 촬영지원팀장은 “극 중 해준(박해일)이 근무한 부산 경찰서가 옛 한국은행 부산본부였다”면서 “부산시 문화재다 보니까 심의 통과에만 3개월이 넘게 걸렸고, 영상위원회 직원들이 촬영 현장에 상주하는 조건으로 허가를 받았다”고 했다.

장르에 따라 분위기가 바뀌는 팔색조 매력의 공간으로는 ‘영주시민아파트’가 꼽혔다. 청춘 농구 영화 ‘리바운드’에서도, 권력을 놓고 암투를 벌이는 정치 범죄 영화 ‘대외비’에도 이 아파트가 등장한다. 김선기 매니저는 “낮에는 부산항 풍경이 어우러지면서 푸근한 느낌을 주다가도, 밤에 조명을 설치하면 음산하고 무서운 분위기로 변한다”고 했다.

부산중앙고에서 촬영한 영화 '리바운드'. /비에이엔터테인먼트

“미래 사회의 첨단적인 분위기가 나는 공간을 찾고 있다” 같은 다소 까다로운 의뢰도 들어온다. SF 영화 ‘승리호’는 부산 수영구의 고려제강 기념관, 부산환경공단 하수처리장 등에서 촬영했다. 환경공단의 지하 통로는 승리호뿐 아니라 영화 ‘전우치’ ’외계+인’ 등에도 등장했다.

로케이션 매니저들은 수도권에 비해 촬영 협조에 긍정적인 분위기를 부산의 강점으로 꼽았다. 20회 이상 부산에서 촬영하면 4000만원을 지급하는 등 지원 사업도 활발하다. 촬영팀이 가장 선호하는 장소는 역시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장소”. 박준우 팀장은 “새로운 장소를 발굴하기 위해 폐교가 된 대학이나 버려진 건물이 있는지 매년 유휴 시설 자료 조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