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조각가 호세 마리아 수비라치의 작품 ‘하늘 기둥’이 15m 높이로 우뚝 서 있다. 건축가 가우디가 설계한 바르셀로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수난의 파사드를 만든 그는 태극기 음양에서 영감을 얻어 이 조각을 완성했다. /소마미술관

이중섭, 박수근, 천경자만 있는 게 아니다. 전시장 밖에는 스페인·프랑스·미국을 대표하는 세계 거장들이 모여 있다.

서울 송파구 소마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다시 보다: 한국근현대미술전’. 한국에서 서양 화단이 본격적으로 형성된 1920년대부터 1988년까지 한국 근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25인의 작품을 조명하는 전시다. 이중섭의 ‘황소’, 박수근 ‘골목 안’, 천경자 ‘초원’ 등 국내 거장들의 명작으로 눈 호강을 실컷 한 뒤, 문 밖을 나서면 또 다른 야외 전시가 시작된다. 미술관이 있는 올림픽 조각 공원에는 가우디의 뒤를 잇는 ‘스페인 국보’ 호세 마리아 수비라치의 초대형 조각 ‘하늘 기둥’이 우뚝 서 있고, 프랑스를 대표하는 조각가 세자르 발다치니가 만든 ‘엄지손가락’이 있다. 77만910㎡(23만3200평) 대지 위에 세워진 조각 작품만 총 221점. 동서양 거장들의 작품이 어떻게 이 공원에 모여있을까.

베네수엘라 조각가 헤수스 라파엘 소토의 '가상의 구'. 붉은색과 파란색이 주조를 이루는 태극 모양의 작품이다. /소마미술관

◇조각 공원 탄생 스토리

이번 한국근현대미술전은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 35주년을 맞아 열리는 특별전이다. 소마미술관은 ‘Seoul Olympic Museum of Art’ 영문 머리글자를 따서 이름 붙였다. 서울올림픽의 성과를 예술로 승화하기 위해 2004년 조성했다. 미술관이 있는 올림픽 조각 공원은 이보다 훨씬 앞서 1988년 탄생했다. 서울올림픽 대회의 문화 예술 행사로 개최된 세계현대미술제가 출발점이다. ‘제1, 2차 국제야외조각 심포지엄’과 ‘국제야외조각 초대전’을 통해 전 세계 유명 조각가들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으면서 1988년 9월 조각 공원이 문을 열었다. 서울특별시 ‘올림픽백서’에 따르면, 당시 미술제의 목표가 “올림픽 공원을 국제적 수준의 예술조각 공원으로 조성해 문화유산으로 후대에 길이 전승한다”는 것. 거액 90억원을 들여 조성했다.

서울올림픽은 미국과 소련이 주도한 냉전 체제의 종식을 이끌어냈다는 의미가 있다. 미국을 비롯한 60여국은 1979년 12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을 보이콧했다. 그러자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10여국은 1984년 LA대회에 불참했다.

박윤정 소마미술관 수석 큐레이터는 “동서양 진영으로 갈라진 지구촌의 화합을 유도하고, 동구권 국가들의 대회 참가를 독려하기 위해 지역과 언어, 문화, 정치적 장벽을 넘어 세계적인 작가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고 했다. 올림픽을 계기로 만들어진 최초의 조각 공원이다.

지난 10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 조각공원에서 시민들이 걸어가는 모습. /장련성 기자
지난 10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 조각공원을 거니는 시민들. /장련성 기자

◇어떤 작품이 있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스페인 조각가 호세 마리아 수비라치가 만든 15m 높이 ‘하늘 기둥’이다. 건축가 가우디가 설계한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수난의 파사드’가 그의 작품. 표면을 들쭉날쭉하고 거칠게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미술관은 “태극기의 음양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었고, 세 개의 입면체는 하늘을 상징한다”며 “작가가 스페인과 한국의 전통을 융화시켜 각각 다른 색채로 음양의 조화를 표현했다”고 소개했다.

조각 공원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작품이 태극 문양과 오륜기의 휘장 모양을 닮은 대형 청동 조각 ‘88 서울올림픽’이다. 이탈리아 조각가 마우로 스타치올리 작품으로,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들이 뛰어오르는 동작을 연상케 한다. 베네수엘라 출신 조각가 헤수스 라파엘 소토의 ‘가상의 구’는 붉은색과 파란색이 주조를 이루는 태극 모양의 작품.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간과 자연 변화에 반응하는 작품이다.

세계에서 둘째로 큰 세자르의 ‘엄지손가락’도 있다. 으뜸을 상징하는 엄지손가락을 극적으로 확대한 작품. 6m 크기로 1988년 설치 당시 세자르의 엄지손가락 중 최대 크기였으나, 이후 프랑스 라데팡스에 두 배 크기인 12m 작품이 세워졌다.

프랑스 조각가 세자르 발다치니, '엄지손가락'. /소마미술관
러시아 작가 라자르 가다에프의 '달리는 사람들'. /소마미술관

냉전 시기 공산주의 진영 작가 23명의 작품도 눈에 띈다. 루마니아 출신 알렉산드루 칼리네스쿠 아귀라의 석조 작품 ‘열림’, 러시아 작가 라자르 가다에프의 ‘달리는 사람들’, 유고슬라비아 출신 시메 뷸라스 ‘형상의 전설’ 등이다. 한국의 세계적 거장 이우환의 ‘관계항’도 조각 공원에 있다. 전시 마지막 작품인 문신의 ‘우주를 향하여’를 보고 나서, 야외에서 문신의 또 다른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묘미다. 그의 대표작 ‘올림픽-1988′이 좌우 대칭 구조를 이루며 서 있다.

대한민국의 화가 겸 조각가 문신, '올림픽-1988'. /소마미술관

정나영 소마미술관 전시학예부장은 “국내 거장들의 최고 명작이 모인 전시를 감상하고, 야외 조각 공원을 거닐면서 편안하게 세계 거장들의 조각을 볼 수 있는 기회”라고 했다. 한국근현대미술전은 8월 27일까지.

소마미술관에서 ‘다시 보다: 한국근현대미술전’을 감상하는 관람객들. /남강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