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실에서 포즈를 취한 가수 정미조.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1981년 서른두 살 정미조(74)는 프랑스 파리13구의 8층 옥탑방에서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렸다. ‘개여울’ ‘그리운 생각’ ‘불꽃’ 등으로 당대 가요계를 풍미한 인기 가수. 그 모든 걸 버리고 1979년 돌연 은퇴 후 오른 미술 유학길이었다. 낯선 프랑스어 강의를 녹음해 들으며 사전을 뒤적이다 홀로 지쳐 잠들기를 2년째. 어느 날부터 그의 눈에 창밖 풍경이 들어왔다. 어스름한 가로등 불빛 뒤 센강, 노트르담 성당, 루브르박물관, 에펠탑 위로 캄캄한 고요가 내려앉을 때까지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가 오는 17일부터 10월 31일까지 모교인 이화여대 박물관에서 여는 전시회 ‘이화, 1970, 정미조’의 관통 주제를 ‘야경’으로 택한 이유이다. 최근 서울 서초구 개인 화실에서 만난 정미조는 “유학을 후회한 적 없지만 당시 자꾸 밤마다 눈물이 나더라. 내가 속할 곳이 저 야경 어딘가에 있단 생각이 들고서야 위안이 찾아왔다”며 그때를 회상했다. 이번 전시에는 그 야경을 캔버스로 옮겨 모나코 몬테카를로 국제그랑프리 현대예술전에서 수상한 ‘몽마르트르’(1981)를 비롯해 ‘질주’(2004), ‘서울 야경’(2012~2014) 시리즈 작품 등을 5개 전시실에서 선보인다. 그의 대표작인 거울 자화상, 인물화, 각종 드로잉, 데뷔 때부터 낸 음반 초판 커버, 정미조가 입었던 앙드레김의 드레스 실물 등도 함께 전시된다. 총 100여점 작품 중 일부는 모교에 기증됐다.

가수 정미조와 그가 파리 유학 시절 외로움을 달래며 야경을 그린 작품 ‘몽마르트르’(왼쪽). 그는 자신의 개인 화실에 걸어두었던 이 그림을 오는 17일부터 여는 개인전에 선보인 뒤 전시가 열리는 모교 이대 박물관에 기증한다.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정미조는 “전시실에는 내 히트곡들도 튼다. 본래 80세에 하려던 전시”라고 했다. “과거 피아노를 전공하려 했던 고 백남준 선생이 전시 개막식에서 자주 연주한 걸 보고 나도 내 예술세계를 하나는 물감, 하나는 소리로 전해야겠다 했죠. 그런데 최근 조금씩 눈이 불편해졌어요. 더 늦기 전 내 모든 걸 보여주자 했지요.”

1972년 4월 TBC TV ‘쇼쇼쇼’로 데뷔한 그는 170cm 큰 키에 서구적 외모, 시원한 성악풍 발성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화여대 서양화과 2학년 때 모교 축제 ‘메이데이’에서 노래했다가 당시 초대 가수 패티김의 눈에 든 일화도 유명하다. “노래 끝나자마자 그분이 절 불렀어요. 너 노래 참 잘한다고. 당시 최고 인기의 ‘패티김쇼’ 게스트로 매주 초대한다 하셨죠.” 하지만 재학 중 결혼 금지, 미스코리아 참가 금지 등 외부 활동을 엄히 금했던 학칙이 그의 데뷔를 늦췄고, 대신 당시 드물던 ‘학사 출신 여가수’ 별칭을 안겼다.

파리 유학 시절 전시회에 출품해 수상한 작품 앞에 선 정미조 / 정미조 제공

이후 신인가수상, 연말 10대 가수상, 동경국제가요제 최우수가창상 등을 거머쥐며 7년간 가수로 승승장구했다. 그러다 갑자기 1979년 TBC에서 1시간짜리 가요계 고별 방송을 해 대중에게 충격을 안겼다. 당시 이장희가 써준 ‘휘파람을 부세요’, 송창식이 써준 ‘불꽃’ 등이 이유 없이 방송금지 당한 게 이유일 거란 추측도 이어졌다. 그러나 정미조는 “그저 ‘미술’이 내 본진이라 생각했을 뿐”이라고 했다. “제대로 된 밴드 반주에 좋은 마이크로 노래해 보고픈 욕구를 채우고 나면 다시 미술을 해야겠구나 했었죠. 그런데 자꾸 히트곡이 생기고, 방송이 이어지더군요.”

믿었던 이의 배신도 그의 음악 활동을 계속 지치게 했다. 정미조는 “큰 인기에도 모은 돈이 거의 없어 파리 유학 시절 빠듯하게 지냈다”고 했다. 친했던 여성 매니저에게 모든 수익을 일임한게 화근이었다. “반포의 42평짜리 아파트를 저 모르는 사이 처분했더군요. 제 활동 수익으로 다른 신인 가수를 키우고요. 아버지가 김포에서 큰 양조장과 극장을 하셨지만, 손 벌리기 싫었어요. 남은 재산을 정리해 딱 유학 비용만 남겼죠. 그래도 단 한 푼도 돌려받지 않았어요. 가족들도 부르지 않았는데 그 언니가 유학길 배웅을 나와 펑펑 울더군요. 난 홀가분했지만.(웃음)”

정미조./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가수 정미조의 음반들./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이후 파리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3년 유학을 마친 그는 귀국 후 결혼을 했고, 22년간 수원대 서양화과 교수로 원하던 미술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2016년 37년 만의 가요계 복귀 음반 ‘37년′을 발매했다. “안 본 사이 녹음 기술이 많이 발전한 거예요. 그걸 맛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죠.” 1979년 고별무대 게스트로 딱 한 번 스치듯 그의 노래를 들었던 가수 최백호가 복귀를 도왔다. “우연히 한 전시장에서 마주쳤는데 그 좋은 목소리로 왜 노래 안 하냐며 좋은 음반 제작사를 소개해 줬어요.”

그 인연으로 최백호는 17일 오후 4시 이대 박물관 내 시청각실에서 이번 전시 개막식을 겸한 미니콘서트에서 정미조와 함께 노래를 하기로 했다. 이 개막식에는 고 앙드레 김의 아들 김중도 디자이너도 참여할 예정이다. 그의 활동기 드레스 대부분을 앙드레 김이 만들었기 때문. “우연히 방송에서 만나 ‘선생님 드레스가 너무 아름다워요. 그런데 저 같은 사람도 감히 입을 수 있나요’ 했더니 웃으며 ‘숍으로 오세요’라더군요. 어린 마음에 그 방송 출연료 봉투를 들고 다음 날 당장 가서 드렸어요. 제값에 턱도 없이 부족했던 금액인데 군말 없이 드레스를 내주셨죠. 영국, 미국 대사 부인들에게 옷을 선물하며 민간 외교를 자처하고, 고아원 기부까지. 베풀기만 해서 돈도 별로 없던 분이었죠. 그렇게 착한 사람, 전 처음 봤어요.”

정미조는 “은퇴 당시를 다시 돌아보면 가수 복귀는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남은 인생은 가수의 길을 다시 열심히 걸어볼 것”이라고 했다. “고별 방송 녹화 때 PD가 눈물 나면 그대로 노래하라고 하길래 난 안 울 것 같다고 했죠. 그런데 진짜 노래 도중 눈물이 펑펑 나는 거예요. 두고 떠날 부, 명성이 아까워서는 아니었어요. 남들이 바보 같다 해도 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거든요. 그저 미술과 음악을 사랑한 예술인으로 기억되면 만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