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오전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ALC) 개막식이 열리기 30여 분 전, 행사장인 서울 중구 신라호텔 다이너스티홀에 웅장한 선율이 울려 퍼졌다. 어수선한 장내가 일순간 조용해졌다. 우크라이나 체르니우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클래식 곡들을 연주했다. 사회자가 “우크라이나에서 온 오케스트라”라고 소개하자 객석에서 큰 박수가 터졌다.

우크라이나 체르니우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17일 밤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 무대에 올라 우크라이나 국가를 연주하고 있다. 연주를 마친 단원들은 “우크라이나에 영광을”을 외쳤다. /고운호 기자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한 내·외빈이 입장한 후 다시 무대에 오른 단원들은 우크라이나 작곡가 미로슬라브 스코릭(1938~2020)의 ‘멜로디’를 연주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우크라이나를 배경으로 한 TV 드라마 ‘고갯길’의 삽입곡이다. 시대에 휩쓸린 인물들의 비극을 담았다는 평을 받는다. 한 단원은 “원래 인기곡이지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후 더 자주 연주된다”며 “우크라이나에서 영혼의 국가(spiritual anthem)로 불린다”고 했다.

1902년에 시작해 100년 넘는 역사를 가진 오케스트라는 부침을 겪다 1992년 재창단했다.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한국 등 전 세계를 돌며 매년 50여 차례 공연하고 음반도 여러 장 발매했다. 특히 전 세계에 우크라이나 작곡가와 음악을 알려왔다고 한다.

하지만 러시아의 침공은 음악가들의 운명도 바꿨다. 단원 대부분은 우크라이나 서부 도시 체르니우치 출신이다. 러시아 반대편, 루마니아와 가까운 도시에도 러시아의 미사일이 떨어졌다. 남성 단원들은 자발적으로 참전했거나, 징집 대상이 됐다. 이날 ALC를 찾은 단원들은 수석지휘자 요시프 소잔스키(48)씨를 제외하면 모두 여성이었다. 소잔스키씨 역시 우크라이나 정부의 특별 허가를 받아 출국할 수 있었다고 한다.

소잔스키씨는 “전쟁 기간에도 우크라이나 문화는 살아 있으며, 많은 이들이 싸우고 있다는 걸 음악을 통해 알리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고 했다. 그는 “한국인들은 수십 년 전 전쟁의 아픔을 겪어서 우리를 진심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며 “서로 우정으로 연대할 때만 전쟁을 멈출 수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음악에는 인류의 공통된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서로 연대하게 하는 힘을 믿습니다”라고도 했다.

여성 단원들은 이날 우크라이나 전통옷 ‘비시반카’를 입고 악기를 연주했다. 검은색 긴 치마에 긴 소매 상의로, 빨간색 체크무늬가 돋보이는 의상이다. 더블베이스 연주자인 페드리코 이리나(30)씨는 “이런 옷과 음악처럼 우크라이나가 아름다운 문화를 가진 걸 보여줘 (청중을) 놀라게 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우크라이나는 아름다운 나라이고 독립적인 국가임을 기억해 달라”며 “언젠가 꼭 우크라이나를 방문해 달라”고 했다.

오케스트라는 이날 저녁 ALC 만찬 이후 무대에도 섰다. 재미교포 뮤지컬 배우 마이클 리(50)와 ‘지킬 앤 하이드’의 삽입곡 ‘지금 이 순간’을 협연하기도 했다. 공연 마지막 곡은 우크라이나 국가였다. 연주를 마친 단원들은 “우크라이나에 영광을”을 외쳤다. 우크라이나군의 경례 구호라고 한다. 단원들은 조만간 우크라이나로 돌아갈 예정이다. 지휘자 소잔스키씨는 “앞으로도 음악을 통해 러시아의 침략에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 우크라이나 국민의 강인한 정신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악기를 든 그들이 연주자가 아닌 전사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