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독자 도창종씨가 수집한 옛 소주들. 지금은 사라진 군소 업체 제품들이다. 일부는 병에 진로(眞露)라고 새겨져 있다. 병을 자체 생산하지 못하고 유명 업체 빈 병을 재활용했던 영세 업체의 사정을 보여준다. /도창종씨 제공

대구 독자 도창종(68)씨가 1982년 군에서 제대하고 처음 취직한 곳은 주류 회사 홍보실이었다. 회사에서 1957년부터 생산해온 소주병 라벨을 시대별로 정리하는 업무를 하면서 라벨 디자인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취미로 전국의 소주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도씨는 “양주나 와인처럼 ‘고상한 취미’로 자랑하긴 어려워도, 오랫동안 서민의 애환과 함께해온 것은 그런 고급 술이 아니라 소주라는 점이 매력적이었다”고 했다.

수집은 주류 업계를 떠난 뒤에도 이어졌다. 고물상과 경매 사이트를 드나들고 출장 가는 지인들에게 각 지역 소주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1950년대 이후 생산한 소주 약 3000병을 모았다. 도수가 지금보다 훨씬 높은 30도, 25도인 것이 대부분이고 ‘왕로’ ‘팔선’ ‘007′ 등 지금은 볼 수 없는 군소 상표도 많다. 수집가들 사이에서 빈 병은 가치를 쳐주지 않기 때문에 개봉하지 않은 것들로 모아왔다고 한다.

몽골의 고려 침략 때 전해졌다는 소주가 처음부터 서민의 술은 아니었다. 소주는 본래 증류식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곡물로 담근 밑술을 증류하는 제조 과정상 곡식이 많이 들어가는 고급 술이었다.

1965년 쌀로 술을 빚지 못하게 하는 양곡관리법을 시행하면서 사정이 바뀌었다. 고구마 등을 발효시켜 만든 주정(酒精)에 물을 섞어 만드는 희석식 소주가 싼 가격을 앞세워 대세가 됐다. 지금은 남아도는 쌀 처리 방법이 논란이지만 당시는 쌀이 부족해 정부가 혼식(混食)을 장려하고 학생들 도시락까지 검사하던 시절이었다.

1976년에는 지역 소주 업체 보호 명목으로 자도주제(自道酒制)를 시행했다. 주류 도매상이 자기 도(道)에서 생산한 소주를 판매량의 50% 이상 매입해야 한다는 규정이다. 이 제도는 자유 경쟁 원칙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위헌 판결을 받아 1996년 폐지됐다. 하지만 자도주제 시절에 자리 잡은 소주의 지역 구도는 지금까지 남아 있다.

희석식 소주 대중화 초기인 1968년 조선일보에는 소주 맛과 향의 차이는 사라지고 마케팅 대결만 남았다는 기사가 실렸다. 소비자들이 소주를 외면한다는 내용과 함께 ‘한국인이 개고기를 먹는 한 소주를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는 어느 소주 업체의 항변이 실렸다. 애견 인구 증가 등으로 보신탕은 사라져가는 추세지만 당시의 절반 수준까지 도수가 낮아진 소주는 여전히 서민의 술, 한국인의 술로 사랑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