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문열은 “문학을 하겠다고 결심해 본 적은 없고, 하다 보니 직업이 됐다. 운이 좋아 글만 쓰고 살 수 있었다”며 “책을 읽은 100명이 모두 좋아하는 작가는 없다고 생각하며 쓴다”고 말했다./오종찬 기자

문단을 대표하는 소설가 이문열(75)의 이름은 한국 전쟁이란 비극에서 탄생했다. 본명은 ‘열(烈)’. 6·25 전쟁 때 홀로 월북한 아버지가 ‘열렬한 사회주의 투사가 돼라’며 지은 이름이다. 어머니와 5남매는 ‘빨갱이 가족’이라는 딱지를 오랫동안 뗄 수 없었다. 1979년 등단하며 이름 앞에 ‘문(文)’자를 추가한 필명을 쓴 이유다. 게다가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 운동과 관련해 ‘홍위병을 돌아보며’란 칼럼을 썼다는 이유로 2001년 자신의 책이 불타는 ‘장례식’을 지켜봐야 했다. 그의 출생과 작품적 성공, 고난으로 이어지는 삶은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그린 초상과 같다.

“가장 절실했던 아버지의 월북 이야기”

이달 초 작업실 겸 주거 공간인 경기도 이천시 부악문원에서 이문열을 만났다. 귀향을 꿈꾸며 경북 영양군에 지은 집이 작년 불탄 뒤로 이곳에서 줄곧 지내고 있다. 그는 “물건을 잘 보존하지 못하는 편이지만, ‘영웅시대’ 초판은 있다”며 책을 책장에서 꺼내 보였다. 유일하게 보관하고 있는 자신의 책 초판본이다. 작년 불탄 고향집에 일부 책과 물건을 옮겨둔 탓에, 남아 있는 수가 더욱 줄었다.

지난 7일 경기도 이천시 부악문원에서 만난 소설가 이문열./ 오종찬 기자

1984년 출간된 ‘영웅시대’는 이문열이 자신의 가족사를 본격적으로 다룬 첫 소설이다. 6·25 전쟁 시기 월북해 이념적 갈등을 겪는 주인공 ‘이동영’, 그리고 남측에서 ‘빨갱이’란 딱지로 인해 고초를 겪는 그의 가족 이야기를 교차해 보여 준다. 이문열은 “아버지는 항상 제게 피해나 억압을 준 기억으로 남아 있다”며 “제 삶을 완전히 비틀어 놓은 아버지의 월북이 그때의 제게 절실했기 때문에 쓴 것”이라고 했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 월북 이후 영양, 안동, 밀양을 비롯해 유년 시절 전국을 떠돌았다. 주거지를 옮기거나, 북의 아버지 소식이 끊길 때 등 수시로 정부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국민학교 시절 3~4개월 동안 고아원에 머무르기도 했다. “추위도 견디기 힘들어, 거의 수용소 같은 곳이었다. 고아원엔 저처럼 월북자의 아이도 많았고, 부모가 있어도 신세 지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 당시엔 흔한 일이었다.”

1998년 이문열이 받은 부친의 편지.

이문열은 끝내 아버지와 만나지 못했다. 아버지로부터 1987년과 1998년 두 차례에 걸쳐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서 그의 아버지는 “사회주의는 나의 실존이다” “네가 미국에 대해서 아무런 반감이 없는 것에 대해서 걱정한다”처럼 신념에 대해 말하는 한편, “(네 누나) 허리가 성치 못한 걸 보고 왔는데 괜찮냐”와 같은 가족에 대한 걱정을 담았다. 작가는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 앞으로 “아버지를 만나볼 수 있도록 방북을 허용해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1999년 아버지를 중국 연길에서 만나려고 시도했으나, 아버지가 그해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됐다. “편지는 안기부에서 가져갔다. (1998년은) 아버지가 팔순이 넘었을 땐데, 편지에 문장이 아주 짱짱하더라. 누나 건강만 물어서 어머니가 굉장히 화를 내긴 했다. 내가 곧 그 나이를 앞두고 있다. 아버지를 이해 못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책상엔 ‘영웅시대’가 종이에 출력된 채로 놓여 있었다. 개정판 출간을 위해 작업 중이다. “내가 전해 듣거나 기록으로 본 것들을 바탕으로 썼는데, 북한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을 때라 틀린 게 많다. 부끄러워 고치려고 한다.”

소설 ‘오디세이아 서울’의 주인공 만년필

지난 7일 경기도 이천시 부악문원에서 만난 소설가 이문열./ 오종찬 기자

이문열은 30년 가까이 ‘금장 몽블랑 만년필’을 보관하고 있다. “악필이어서 컴퓨터로 작업한다”는 작가가 이 만년필을 버리지 않는 이유는, 자신의 소설 ‘오디세이아 서울’의 주인공이기 때문. 조선일보에 1992년 연재됐고, 이듬해 책으로 출간됐다. 여러 사람에게 전해지는 만년필의 눈을 통해 1990년대 초 서울의 몰락하는 중산층, 그리고 하층민들의 삶을 풍자적으로 그려냈다. “당시 공항에서 400달러짜리 금장 몽블랑 만년필을 보곤 과도기적 성격의 시대를 그려내려고 했다. 당시는 정치적 민주화는 이뤄져 급한 혼란에서 빠져 나왔지만, 기형적이었다. 마치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바다처럼 거칠었다.” 책을 낸 다음 몽블랑 본사에서 만년필을 선물했다고 한다.

‘영웅시대’ 초판본과 금장 몽블랑 만년필. /오종찬 기자

‘만년필이 지금 시대를 보면 뭐라고 할 것 같냐’는 질문에 작가는 “세상 많이 변했다고 말할 거다”라고 했다. “지금은 그때로부터 거의 한 세대가 지났다. 물론 과도기는 넘어섰으나, 여전히 하나의 문화적 형태를 갖추진 못했다. 대만 불씨도 남았고 남북한 문제도 여전히 남아 있다.”

“머물 순 있어도 살지는 말라”

작가는 1985년 이곳에 집을 지어 살기 시작했고, 1998년부턴 부악문원을 열어 문인들이 쉬고 배울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 왔다. 작가는 “여긴 40년 가까이 살았지만 고향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고향은 다른 사람과 연관을 짓는 곳이다. 제자들도 다른 데에서 왔고…그러나 이젠 이곳에서 종생을 할까 생각 중이다”라고 했다.

그의 서재에서는 2001년 ‘책 장례식’이 열린 마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시민단체를 정권의 ‘홍위병’에 비유한 칼럼에서 작가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 수십 명이 그의 책 수백 권을 관의 형태로 묶었고, 이곳에 가져와 불태웠다. 작가는 그 장소를 기억한다. 부악문원을 둘러보던 중, 불에 탄 재가 남아 있었다던 장소에 다다라 말했다. “그때 일은 여전히 충격적이다. 그날엔 차마 보지 못했지만, 그 장소를 여전히 기억한다.”

서재를 떠나려던 때, 입구에 걸린 ‘가류헌’(可㽞軒)이란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지인으로부터 수십년 전 선물받은 것. 그는 “서재를 보면 알겠지만, 사람 살 만한 공간은 아니다. ‘머물 순 있어도 살지는 말라’는 뜻인데, 고향집이 불탔으니 앞으로도 이곳을 떠나지 못하게 됐다”며 웃었다. 책 화형식, 불에 탄 고향집에 대해 말하면서도 작가의 표정은 밝았다. “한동안 건강이 안 좋았는데, 이제야 좀 괜찮아졌다. 여기 심은 소나무는 1997년 심은 건데 벌써 이렇게 컸다.” 고개를 들어도 꼭대기가 보이지 않는 소나무 두 그루가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