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환이 경기도 의왕시 자택 거실에서 팔을 베고 누웠다. 그의 머리 위에 1977년 ‘4전 5기’로 따낸 세계복싱협회(WBA) 주니어페더급 초대 챔피언 벨트가 놓여있다. /장련성 기자

1977년 11월 27일 세계복싱협회(WBA) 주니어페더급 초대 챔피언 결정전. 파나마로 날아간 스물일곱 홍수환은 링 한편에서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상대는 그보다 열 살 어린 헥토르 카라스키야. 11전 11KO승을 자랑하며 ‘지옥에서 온 악마’로 불리던 파나마의 신예 복서였다. 3년 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밴텀급 챔피언 자리에 오른 홍수환으로서는 이날 경기에서 승리하면 한국 프로복싱 사상 최초로 2체급을 석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1회 난타전이 끝나고 2라운드가 시작되자 홍수환은 카라스키야의 무차별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연거푸 4번이나 쓰러졌지만, 그때마다 그는 다시 일어섰다. 3라운드 공이 울리자마자 반격이 시작됐다. 홍수환은 벼락같이 카라스키야의 오른쪽 옆구리에 레프트훅을 가했고, 비틀거리며 넘어지는 그의 턱에 회심의 일격을 가했다. 3회 48초만에 역전 KO승. 한국 프로복싱 사상 가장 극적인 4전 5기 신화는 이렇게 탄생했다.

“4번 넘어지고 또 오기로 덤볐다”

한국 스포츠가 만들어낸 위대한 순간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홍수환(73)의 ‘4전5기’ 승리는 한국 프로복싱 역사의 신화로 남은 명장면이다. 경기 의왕시 자택에서 만난 그는 가장 아끼는 보물로 이날 따낸 챔피언 벨트를 꼽았다. 홍수환은 2라운드에서만 4번 쓰러지고도 3라운드서 상대를 KO로 눕히고 챔피언 벨트를 차지했다.

후배가 만들어 선물한 입간판. 홍수환에게 유일하게 2패를 안긴 알폰소 사모라와 찍은 사진이 맨 아래에 보인다. /장련성 기자

“많은 분들이 지금도 물어요. ‘4전5기’의 비결이 뭐냐고요. 네 번 쓰러졌다가 다섯 번째 일어서서 죽기 살기로 승리를 일궈낸 비결을 들려달라고. 내 답은 늘 똑같아요. 준비된 사람은 이긴다는 겁니다. 나는 그저 쓰러질 때마다 일어났을 뿐이에요.”

1970년대 개발도상국 ‘대한민국’의 존재감을 세계에 알리고, 우리도 얼마든지 세계 정복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텔레비전 수상기의 보급률도 높지 않았던 시기, ‘테레비’ 있는 집에 모여 작은 흑백화면에 열광했다. 그는 “내가 저놈을 이기기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연습했는데 이렇게 질 수는 없었다”며 “4전 5기의 뜻은 ‘4번 다운당하고 5번 일어나 이겼다’가 아니라 ‘4번 다운당하고 또 오기로 덤볐다’이다. 이 오기가 바로 프로 정신”이라고 했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홍수환은 열아홉에 권투 선수로 첫발을 디뎠다. 스물 한 살에 한국 챔피언을 따냈고, 1년 뒤 동양 챔피언에 올랐다. 50전 41승(14KO) 4무 5패. 그는 “내 주먹은 권투를 하기에는 작고 약했다. 펀치력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철저한 연습벌레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부친이 작고한 뒤 모친은 미군부대에서 식당을 하며 그를 키웠다.

1974년 남아공 더반에서 밴텀급 타이틀 경기를 알리는 팸플릿. /장련성 기자

1974년 7월 4일 홍수환은 남아공 더반에서 밴텀급 타이틀을 차지했다. “육군 일병으로 군 복무를 하고 있었는데, 아널드 테일러가 나를 만만히 보고 1차 방어 상대로 골랐다”고 했다. 당시 더반까지 가는 직항편이 없어서 도쿄~홍콩~스리랑카~세이셸~요하네스버그를 거쳐 비행기 5번을 갈아탔다.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을 거두고 처음으로 세계 정상에 오른 순간, 어머니 황농선 여사와의 유명한 통화가 여기서 나왔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그래, 대한국민 만세다!”

귀국해서는 헌병들의 에스코트 속에 카퍼레이드가 열렸다. 그는 이때의 사진을 액자에 넣어 보관하고 있다. “김포공항에서 시청 앞까지 온 가족이 카퍼레이드를 했다”며 “손을 흔들며 서 있는 내 오른쪽에 어머니가 있고 그 앞에는 우리 큰형이 탔다. 전 세계 통틀어서 챔피언과 엄마가 같이 카퍼레이드한 역사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1974년 남아공 더반에서 밴텀급 타이틀을 차지한 후 환영 인파 속에 열린 카퍼레이드 사진. /장련성 기자

사흘 뒤엔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도 만났다. “박 대통령과 악수를 했고, 육영수 여사가 잠시 후에 나오시더니 ‘TV 에선 크게 보이는데 생각보다 조그마하시다’고 했어요. 그게 1974년 7월 18일인데, 한달 뒤 8월 15일에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셨습니다. 내게도 영광과 슬픔이 교차하는 기억이지요.”

홍수환이 경기도 의왕 자택 거실에서 '4전5기' 챔피언 벨트와 함께 포즈를 취했다. /장련성 기자

복싱은 인생과 같아

그의 집 거실에는 후배가 만들어 선물한 입간판이 있다. ‘영원한 챔피언 홍수환’이라는 글과 함께 앳된 얼굴의 그가 보인다. 1971년 한국 챔피언이 됐을 때 모습이다. 홍수환에게 유일하게 2패를 안긴 멕시코 선수 알폰소 사모라와 나란히 찍은 사진도 있다. 그는 “사람들은 내 영광의 순간만 기억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사모라에게 두 번이나 졌기 때문에 4전 5기의 승리가 가능했던 것”이라고 했다. “사모라를 이겨서 챔피언을 빼앗았으면 주니어 페더급으로 한 체급 올리지도 않았고, 그러면 4전 5기도 없는 거죠. 내가 가장 비참하게 졌을 때 4전 5기의 씨앗을 뿌린 거예요.”

그는 “살아보니 복싱과 인생은 똑같더라”며 “내가 권투하면서 깨친 것은 하늘은 누구도 완전한 인간으로 만들어주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했다. “펀치가 세면 맷집이 약하거나 순발력이 떨어집니다. 반면 펀치는 좀 약해도 상대의 허점을 낚아챌 순발력이 있으면 언제든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어요. 복싱은 말이에요, 상대랑 내가 1대1 맨몸으로 근수(몸무게)까지 똑같은 조건에서 싸우는 겁니다. 같은 조건에서 싸워서 지는 놈이 어떻게 세상을 이기겠습니까. 그 정신으로 인생을 살아야 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