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지낸 세월이 38년, 가족 같은 분입니다. 영화 ‘라디오스타’ 때도 현실인지 촬영인지 모를 정도로 한몸이 돼서 찍었습니다.”

강원도 춘천 메가박스 영화관에서 지난 9일 만난 이준익 감독은 "영화에 몰입하는 순간에만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불안과 초조를 잊는다"며 "앞으로도 끊임없이 영화를 구상하고 만들겠다"고 말했다. /춘천영화제

배우 박중훈이 이준익(64) 감독을 두고 ‘가족 같다’고 하자 옆에 앉은 배우 안성기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10일 강원도 춘천 메가박스 영화관에서 열린 ‘이준익, 영화 나이 서른’ 기념전 자리였다. 제10회 춘천영화제(11일 폐막)에서 이 감독의 데뷔 30주년을 맞아 9~10일 이틀간 ‘왕의 남자’(2005), ‘동주’(2015), ‘라디오스타’(2006)를 특별 상영했다. 상영관은 매회 만석이었다.

박중훈은 이날 ‘라디오스타’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 자리에서 “삽입곡 ‘비와 당신’을 녹음할 에너지를 만들기 위해 보드카까지 마셨다”며 “요즘도 자정 무렵 지인이 전화를 걸어와 ‘노래방에서 ‘비와 당신’을 부르고 있다고 한다. 너무나 감사한 영화”라고 말했다. 안성기는 “연기를 하려고 한 게 아니라 느낀 대로 표현했다”며 “그게 잘되면 관객들이 좋아해주신다”고 말했다. 최근 병마로 목소리는 가라앉았으나 표정은 환했다. 이 감독은 “두 배우의 연기를 보며 마법에 빠진 것 같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전날인 9일 ‘왕의 남자’ 상영 때는 해외 팬들이 몰렸다. 대만에서 왔다는 관객은 어눌한 한국말로 “‘왕의 남자’ 보고 한궁말 배웠어요”라며 꽃다발을 전했다. 프랑스, 우즈베키스탄 관객도 있었다. 배우 이준기가 등장하자 카메라를 든 팬들이 앞다퉈 나섰다. 이준기는 “이준익 감독님은 제 은인”이라며 “대중의 사랑을 잊지 말고, 신뢰를 저버리지 말라는 가르침 덕분에 아직도 배우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동주’ 상영 후 송몽규 역을 맡았던 박정민도 관객 앞에 나섰다. 그는 “감독님의 전화를 받고 송몽규처럼 보이려고 눈도 좋은데 안경을 쓰고 만나뵀다”며 “감사한 마음에 춘천까지 한걸음에 달려왔다”고 했다.

이준익 감독은 9일 본지 인터뷰에서 “지난 30년간 ‘나는 미숙하다’는 강박에 시달려왔다”고 말했다. “미숙함에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해요. 과거의 부족했던 것, 과거의 실수, 모자랐던 걸 끊임없이 지우고 고쳐가는 과정에서 영화가 나오는 거죠.” 자신의 철학에 대해 “일관되지 않은 게 저의 30년 영화 철학”이라며 “일관된 인간은 자기 뇌의 감옥에서 나오지 못한 인간”이라고 했다.

10일 춘천영화제 '이준익 영화 나이 서른' 상영전에 참석한 배우 안성기(맨 왼쪽)와 박중훈(왼쪽에서 둘째)이 관객 질문에 답하고 있다. /춘천영화제

이 감독의 데뷔작은 ‘키드캅’(1993)이다. 이제까지 장편영화 15편을 찍었다. 세종대 미대를 중퇴하고 미술학원 선생, 고구마 장수,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수위도 했다. 합동영화사 선전부에서 만든 ‘변강쇠’(1986) 신문광고 디자인을 시작으로 포스터 팸플릿 카피 로고 타이포까지 다해봤다. 그의 손을 거친 영화는 줄잡아 1000편. 1993년 영화사 씨네월드를 세우고 창립작으로 ‘키드캅’을 내세웠다. 삼성에서 전액 투자를 받았다. 당시 히트한 할리우드 영화 ‘나 홀로 집에’ ‘애들이 줄었어요’를 적당히 섞은 줄거리가 먹혔다. 그래도 감독은 언감생심이었다. “나 같은 시정잡배가 영화 하는 건 영화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도 연출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나라도 해보자고 나섰다. 폭삭 망했다. “밤에 자다가도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괴로웠죠. 남의 것 베끼지 말고 우리 얘기를 해야 한다는 걸 그때 깨달았어요.” ‘사극 영화의 대가’ 이준익의 시작이었다.

배우에게 상을 보따리로 안긴 감독으로 유명하다. ‘왕의 남자’로 제43회 대종상에서 감우성(남우주연상), 유해진(남우조연상), 이준기(신인남우상)가 연기상을 휩쓸었다. ‘라디오스타’로 박중훈과 안성기가 제27회 청룡영화상 공동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동주’의 박정민은 제52회 백상예술대상 남자신인연기상과 제37회 청룡영화상 신인남우상을 가져갔다. 이 감독도 상복이 있다. 제42회 백상예술대상에서 ‘왕의 남자’로, 52회에 ‘사도’와 ‘동주’로, 57회에 ‘자산어보’로 영화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이 상을 세 번 수상한 감독은 그가 유일하다. 그의 지문(指紋)은 올해 유일한 천만 한국 영화인 ‘범죄도시 3′에도 살아있다. ‘범죄도시3′ 초롱이 역 고규필의 데뷔작이 ‘키드캅’이다. ‘범죄도시 3′ 이상용 감독은 이 감독의 ‘소원’ 조감독이었다.

차기작도 준비 중이다. 일제강점기 한 인물을 둘러싼 10부작 OTT 영화다. 주인공이 누구냐고 묻자 “지금은 알려줄 수 없다”며 눈을 찡긋했다. “변방의 아름다움을 빛나게 보여주는 게 제 정체성에 가까워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 역사도 중국과 일본 제국주의의 변방이었잖아요. 제국의 문명을 수용하면서도 독자적인 문명을 잃지 않고 독립성을 갖고 있는 독특한 나라, 위대한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춘천=신정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