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자택에서 만난 방송인 이상용이 초록색 군복 스웨터를 입고 뽀빠이처럼 주먹을 들어 보였다. ‘우정의 무대’는 1997년 종영했지만 중고 시장에서 구한 이 스웨터는 30년 넘게 아끼며 입고 있다고 했다. /박상훈 기자

나이 여든을 바라봐도 뽀빠이는 뽀빠이였다. 주먹을 쥐고 알통을 자랑하는 포즈가 예전 그대로였다. 지난달 27일 자택인 서울 서초구 빌라에서 만난 방송인 이상용(79)은 마당 구석에 역기를 두고 지금도 운동을 한다고 했다. 인터뷰는 그 옆에 놓인 테이블의 파라솔 아래에서 진행됐다. 비가 내리고 입김이 나왔지만 뽀빠이는 추운 기색이 없었다.

오래된 군복 재킷, 군용 스웨터, 뽀빠이가 그려진 티셔츠들…. 이상용이 ‘보물’을 꺼내 보였다. ‘우정의 무대’ 의상을 포함해 그간 모아 온 옷들을 기부한 뒤에도 간직하고 있는 옷들이라고 했다. “부대에 촬영을 가면 제 사이즈에 맞춰서 의상을 해 줬어요. 공군에 가면 조종복, 해병대에 가면 빨간 명찰 군복…. 그런 옷들을 포함해서 800벌쯤을 성당에 기부했지요. 그런데 이 옷들은 애착이 남아서 아직도 갖고 있어요.”

1940년대 영국군 스타일의 갈색 재킷 가슴에는 ‘이상용’과 ‘육군 홍보대사’라는 문구를, 견장에는 ‘필승’이라는 문구를 ‘오바로크’쳤다. 티셔츠에 그려진 뽀빠이의 모습도 여전히 기운찼다. 뽀빠이 이상용의 명함 같은 옷들이었다.

‘육군 홍보대사’라는 문구가 적힌 자켓을 입은 뽀빠이 이상용씨./박상훈 기자

◇60만 국군 장병의 ‘큰 형님’

국군 방송 ‘위문열차’ 등을 포함해 “군 위문 방송만 4300번”이라고 했지만, 이상용 하면 떠오르는 프로그램은 MBC ‘우정의 무대’다. 첫 방송은 1989년 4월 22일. 처음 출연한 부대는 육군 9사단 백마부대였다. 이상용은 “ROTC 출신이어서 내가 진행자로 낙점됐다”면서 “처음엔 부대들이 잘해야 본전이라며 출연을 꺼려서 지인이 사단장으로 있었던 9사단을 찾아가 방송을 성사시켰다”고 말했다. 초기에는 막사를 비롯한 군 시설이 방송 배경에 나오지 않게 하려고 야간에 촬영했다고 한다. 이후 프로그램의 인지도가 올라가고 부대 훈련 장면을 홍보할 수 있게 되면서 출연 신청이 이어졌다.

당초 군을 예능의 소재로 삼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상용은 “처음엔 우리 군의 용맹함을 강조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가 장병들의 장기자랑이나 ‘그리운 어머니’ 같은 코너를 도입하면서 프로그램 성격이 달라졌다”고 했다.

‘우정의 무대’는 점차 인기를 끌었다. 이상용은 “저러다 없어지겠지 하던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졌고 나도 ‘목숨을 걸었다’고 할 만큼 열심히 했다”고 말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을 비롯한 당대의 인기 연예인들이 위문 공연을 했다. 군대 시절 이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유해진·이종혁 등은 후에 인기 배우가 됐다.

이상용은 “군 프로그램이라고 출연료가 짜서 돈은 많이 못 벌었다”고 했다. “전국 부대를 찾아다니느라 방송국에 드나들지 못해서 연예인 인맥도 별로 없어요. 부대들이 대개 벽지에 있고 도로 사정도 지금처럼 좋지 못했을 때라서 눈이 오는 11월부터는 삽과 모래 주머니를 차에 싣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이상용은 이 프로그램을 통해 ‘60만 장병의 큰 형님’ ‘국군 전문 MC’라는 별명을 얻었다. “장군들을 자주 만나니 부대에 촬영 가면 명예 장군으로 불리기도 했지요.” 그는 “이름이 알려진 뒤로는 옷도 아무렇게나 입기보다는 중고 시장에서 군복을 구해 입곤 했다”며 재킷과 스웨터를 가리켰다.

1996년 공금 횡령 의혹이 불거졌다. 한국어린이보호회 회장을 맡고 있던 그가 심장병 어린이 수술비로 모금한 돈을 유용했다는 의혹이었다. 약 3개월 뒤 사건은 무혐의로 끝났지만, 의혹이 불거질 때 떠들썩했던 것만큼 주목받지 못했다. ‘우정의 무대’는 이상용이 하차하고 진행자를 교체한 지 약 넉 달 만인 1997년 3월 폐지됐다. 방송이 끊긴 이상용은 미국으로 건너가 라스베이거스에서 한국 관광객 상대로 가이드를 했다. “손대면 돈을 다 잃는다고 해서 카지노 한 번 안 하고, 팁을 받으면 베개 안에 차곡차곡 모았다”고 했다. 3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방송의 고정 프로그램을 맡지는 못했다.

방송인 이상용씨의 보물 3가지. 가슴에 이름 ‘이상용’과 ‘육군 홍보 대사’를, 견장에 ‘필승’을 새긴 군복 재킷(위), 데뷔 때부터 별명 뽀빠이가 그려진 티셔츠(아래 왼쪽), 장병들이 출연한 ‘우정의 무대’를 진행하는 모습(아래 오른쪽)./박상훈 기자·MBC뉴스 유튜브

◇”뽀빠이는 내 분신”

이상용은 과거 방송과 인터뷰 등에서 병약했던 어린 시절을 여러 차례 이야기했다. 살 가망이 없어 보일 만큼 작고 약해 태어나자마자 버려졌다가 이모 덕에 구사일생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열한 살 때부터 아령을 들면서 체력을 키워 미스터 대전고, 미스터 고대로 뽑혔다”고 했다.

방송 데뷔는 1973년 ‘유쾌한 청백전’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외판원으로 어렵게 살다가 연예인이 되기로 마음먹고 대전고 선배였던 MBC 유수열 PD를 무작정 찾아갔다고 한다. “눈 오는 날 새벽부터 방송사에 나가 마당을 쓸면서 간청한 끝에 출연 기회를 잡을 수 있었어요. 고대 응원단장 시절에 익힌 입담을 선보였는데, 그때까지 서로 때리고 물 뿌리기가 일쑤였던 코미디에서 신선해 보였는지 그 뒤로도 몇 번 더 출연할 수 있었죠.” 미국 만화 뽀빠이가 국내에서 방영되고 삼양식품에서 뽀빠이 라면 과자(1972)를 내놨던 그때 이상용은 뽀빠이를 자신의 별명으로 삼았다. “그때부터 뽀빠이라고 소개하고 다녔어요. 덩치는 작아도 거구의 블루토와 당당하게 맞서는 모습이 좋았고, 키 큰 여자친구 올리브와 함께인 모습도 아내가 키가 더 큰 나와 비슷하니 딱이라고 생각했지요.”

지금은 전국에서 ‘폭소 강연’을 하며 지낸다고 했다. “이 나이에 이만큼 바쁘게 지내는 것이 자부심”이라고 했다. “전국을 다니다가 수박밭이 보이면 들어가서 하나 사 먹고, 고구마 캐는 곳이 있으면 맨발로 같이 캐기도 합니다. ‘뽀빠이입니다’ 하고 인사하면 몰라보는 분들이 없으니, 이만하면 잘 살았다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