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값’의 전우성 감독은 “현실에 없을 법한 극단적인 설정이지만 ‘인물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에 집중해 각본을 썼다. 인물의 사연이 드러나는 감정적인 장면도 상황에 맞지 않으면 과감히 덜어냈다”고 했다. /이태경 기자

성매매를 위해 모텔을 찾은 남자가 교복 입은 여고생과 몸값을 흥정한다. 남자가 씻으러 간 사이, 모텔방은 삽시간에 북적북적한 경매장으로 변한다. 여고생의 정체는 성 매수자를 꾀어 장기를 적출해가는 인신매매단의 조직원. 이번엔 남자의 간, 신장, 췌장까지 부위별로 경매에 부쳐지고 몸값이 매겨진다.

티빙 드라마 ‘몸값’은 쉴 새 없이 뒤집히고 예상치 못한 곳으로 빠지는 전개로 지난해 프랑스 칸 국제 시리즈 페스티벌에서 한국 최초로 각본상을 받았다. 작년 10월 글로벌 OTT ‘파라마운트+’를 통해 공개된 후엔 TV쇼 글로벌 차트 1위를 차지했다. 영국 가디언은 “‘오징어 게임’보다 영리한 드라마. 1분만 봐도 푹 빠지게 된다”는 평을 남겼다.

서로의 몸값을 두고 흥정하던 형수(진선규·앞)와 주영(전종서)은 붕괴된 건물에서 생존을 위해 협력하지만 서로를 온전히 믿지 못한다. /티빙

‘몸값’의 배경이 되는 모텔은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을 응축해놓은 공간이다. 천벌처럼 갑작스러운 대지진이 일어나 모텔이 붕괴하자, 살아남기 위해 거짓말과 사기, 배신을 일삼는 악인들의 생존 게임이 펼쳐진다. 최근 서울 상암동에서 만난 전우성(39) 감독은 “무엇이든 돈으로 사고팔 수 있는 자본주의에 관한 이야기”라면서 “악인인 캐릭터들을 따라가게 하려면, 관객이 계속해서 캐릭터를 의심하게 하고 궁금증을 일으켜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장르적으로 보는 재미가 있는 드라마를 만드는 게 우선이었고, 밑에 숨겨둔 비판적인 메시지는 해외에서 알아봐 주지 않을까 싶었지만 현실로 이뤄질 줄은 몰랐죠.”

전 감독은 한국외대 언론학과 졸업 후 독립영화를 찍어오다 생계를 위해 친구들과 제작사 ‘프로덕션 계절’을 설립했다. 광고·캠페인 등 짧은 영상부터 웹드라마까지 영역을 넓히다 ‘몸값’으로 첫 장편 연출을 맡았다. 전 감독은 “친구들과 돌아가면서 한 명이 시나리오를 쓰면 나머지 두 명이 회사 일을 하는 식으로 운영해왔다. 저예산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찍다 보니 주어진 조건으로 융통성 있게 제작하는 노하우가 늘었다”고 했다.

드라마 '몸값' 스틸컷. /티빙

전 감독은 친구 사이인 곽재민·최병윤 작가와 함께 각본을 썼다. 집필의 제1 원칙은 “잠시도 지루하지 않아야 한다”였다. 원칙에 따라 쉴 새 없이 주고받는 대사에는 블랙 코미디를 섞었다. 주연 배우 진선규의 능청스러운 연기도 한몫했다. “대본상 주인공이 계속 팬티만 입고 돌아다니는데, 이걸 받아줄 배우가 있을까 고민했거든요. 진선규 배우가 재미있다면서 흔쾌히 받아주셔서 놀랐죠.”

장면 전환 없이 한 번에 찍어 몰입도를 높인 원테이크 촬영 기법도 해외 평단의 눈길을 끌었다. 길게는 15~20분이 넘어가는 장면을 끊지 않고 한 번에 찍기 위해선 배우뿐 아니라 카메라·조명·음향 등 수십 명의 스태프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했다. 촬영 시간보다 동선 리허설 시간이 더 길었을 정도. “원테이크 방식은 모든 걸 완벽히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배우들의 반사적인 반응이나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우연적인 요소가 더해지면서 독특한 분위기가 만들어졌어요.”

드라마 '몸값'의 주역들이 지난해 프랑스 칸 국제 시리즈 페스티벌 공식 포토콜 행사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진선규, 전종서, 장률 배우, 전우성 감독. /티빙

국내 공개에 그치지 않고 여러 해외 시장을 돌며 새로운 기회를 창출한 전략도 주효했다. OTT 드라마론 이례적으로 부산국제영화제 출품 후 유럽·북미 영화제 초청, 글로벌 OTT 공개로 이어지는 로드맵을 선보였다. 토종 OTT 티빙엔 글로벌 진출의 길을 닦은 작품이 됐다. 해외 평단의 인지도를 끌어올린 끝에 최근 미국 크리틱스 초이스 어워즈에선 ‘무빙’ ’더 글로리’ 등과 함께 토종 OTT 드라마로선 유일하게 외국어 시리즈상 후보에 올랐다.

코로나 기간 호황을 맞은 OTT 시장에 너도나도 뛰어들었지만, 어디서 본 듯한 비슷비슷한 작품들이 난립하는 상황. 전 감독은 “OTT로서의 장점을 살리지 못하고 오히려 정형화된 기획이 늘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요즘은 편성도 1시간짜리 8부작이 대다수인데, OTT야말로 이야기에 맞게 형식적인 변주를 줄 수 있지 않을까요.”

신인 감독이 역량을 발휘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묻자, 전 감독은 “틀을 깨고 바라봐주는 시선”이라고 답했다. “요즘은 이야기 구조나 제작 방식, 편성 등 하나라도 새로운 요소가 있을 때 통하는 것 같아요. 앞으로 제가 만들 작품도 시청자가 봤을 때 ‘이건 못 봤던 건데?’ ’새로운데?’라고 느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