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회 그래미상 시상식이 열리고 있던 4일(현지 시각) 밤 미국 로스앤젤레스 크립토닷컴 아레나. 짧은 암전 뒤 특별 공연이 시작됐다. 아날로그 조명만으로 이뤄진 단출한 무대에 두 가수가 섰다. 조명이 공연자 얼굴을 비추는 순간 객석이 탄성과 환호로 뒤덮였다. 지난해 미국 대중음악계 컨트리 열풍을 이끈 노래 ‘패스트 카(Fast Car)’를 부른 백인 남자 가수 루크 콤스(34)와 1988년 이 노래를 쓰고 불렀던 흑인 여자 가수 트레이시 채프먼(60). 그래미가 준비한 회심의 깜짝쇼였다. 이 노래로 컨트리 노래로는 드물게 빌보드 핫100 2위에 오르며 최고의 순간을 보낸 콤스는 앞머리가 은빛으로 물든 초로(初老)의 채프먼이 첫 소절을 시작할 때부터 시종일관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

1988년 자작곡 '패스트 카'를 불렀던 흑인 포크 가수 트레이시 채프먼(왼쪽)과 35년 뒤 이 노래를 리메이크해 히트시킨 백인 컨트리 가수 루크 콤스가 4일 그래미상 시상식 특별 공연에서 열창하고 있다. 이 노래는 비록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미 언론들은 이날 두 사람이 함께 부른 '패스트 카'를 올해 그래미 최고의 순간으로 꼽았다. 이 공연 직후 채프먼이 부른 원곡은 아이튠스 실시간 음원 순위 1위를 기록했다. /로이터 뉴스1

“You got a fast car(당신은 빠른 차가 있지)/ And I want a ticket to anywhere(그리고 난 어디든 갈 수 있는 차표가 필요해)/ Maybe we make a deal(우린 거래할 수 있을 거야)/ Maybe together we can get somewhere(어딘가로 함께 갈 수 있을 거야)”.

화려한 화음이나 기교도 없었다. 기타줄을 튕기며 정직하고 잔잔하게 부르는 두 가수의 노래에 객석을 메운 최고 팝스타들이 일제히 떼창으로 따라왔다. ‘야이 야~’ 하는 후렴구에서는 이날 시상식에서 통산 네 번째 ‘올해의 앨범’을 가져간 팝의 지존 테일러 스위프트가 어깨를 흔들며 따라 부르는 장면도 포착됐다. 4분여 무대가 끝나자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패스트 카’는 이날 그래미상 컨트리 솔로 퍼포먼스 후보에 올랐지만 상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미국 언론은 두 흑백 가수의 공연을 이번 그래미상 시상식 최고의 순간으로 꼽았다. 뉴욕타임스(NYT)는 이 공연에 대한 별도 비평까지 냈다. 이 신문의 음악 비평가 린지 졸라즈는 “문화는 너무 자주 우리를 분열시키는데, 채프먼과 콤스가 미국에 ‘화합’이라는 아주 드문 선물을 안겨줬다”고 했다. CNN도 칼럼을 통해 “채프먼이 마땅히 받았어야 할 기립박수를 받았다”고 극찬했다. 미 언론과 비평가들은 ‘패스트 카’의 원곡이 사랑받고 잊혔다가 뒤늦게 재조명되는 과정에는, 미국 사회가 겪고 있는 극심한 인종·계층 간 분열, 그리고 화합과 희망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평가한다.

그래픽=김현국

빈민층 가정의 젊은 흑인 여성이 화자(話者)로 어렵게 살아가면서 막연하게 더 나은 삶을 꿈꾸는 포크송이다. 노래 제목 ‘패스트 카’는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막연한 꿈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채프먼은 1988년 이 노래를 통해 그래미상에서 최우수 신인·최우수 여성 팝 보컬·최우수 컨템퍼러리 포크 등 3부문 상을 받았지만, 이후 주류가 아닌 언더그라운드 가수로 활동했고 대중의 뇌리에선 점차 잊혔다.

그 노래를 35년 뒤 백인 남자 가수가 컨트리 리듬으로 변주했다. 한국으로 치면 세시봉 시절 포크송을 신세대 트로트 가수가 리메이크한 셈이다. 다양성과 정치적 올바름을 중시하는 풍토 속에서 소외되어가고 있던 백인 노동자·농민들은 자신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한 노래에 열광했다. 노래의 인기에 힘입어 리메이크 버전의 ‘패스트 카’는 지난해 컨트리음악계 최고 권위의 CMA 시상식에서 ‘올해의 노래’ 부문을 수상했다. 수상자는 작곡가인 채프먼이었지만 시상식에는 나오지 않았다.

이날 그래미 특별 공연은 최근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해오던 채프먼이 20여 년 만에 처음 선 라이브 무대라고 미 언론들은 전했다. 이 특별 공연 직후 채프먼이 1988년에 부른 오리지널 ‘패스트 카’는 실시간 아이튠스 음원 차트 1위까지 치솟았다. 공연 뒤 콤스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이번 특별 공연을 성사시켜준 채프먼에게 그저 고맙다는 말밖에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채프먼은 그의 말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공유하며 “그에게 이 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후배의 건승을 기원했다.

채프먼과 콤스의 듀엣처럼 앞서 미국 사회의 고질적인 인종·계층 갈등을 음악으로 치유하려는 흑백 하모니가 명곡의 반열에 올랐다. 인종 화합을 흑백의 피아노 건반에 빗댄 스티비 원더와 폴 매카트니의 1982년 노래 ‘에보니 앤드 아이보리(Ebony And Ivory)’를 시작으로, 당대 최고의 흑백 가수들이 굶주리는 아프리카를 돕자며 의기투합한 1985년 위 아 더 월드(We Are The World) 등으로 이어졌다. 이런 흑백 하모니를 통해 ‘흑인 음악’ ‘백인 음악’의 장르도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2000년에는 당대 최고의 흑인·백인 래퍼인 닥터 드레와 에미넘이 합을 맞춘 ‘포갓 어바웃 드레(Forgot About Dre)’가 발표됐고, 이번 ‘패스트 카’처럼 35년의 세월과 장르의 벽을 한꺼번에 뛰어넘는 변주로까지 진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