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55주년을 맞은 동인문학상은 독자와 함께 하는 한국문학의 축제입니다. 매달 독회를 통해 추천작을 쌓아올린 뒤 연말에 그 해 수상작을 선정합니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정명교·구효서·이승우·김인숙·김동식)는 최근 서울 종로구 운니동 ‘송죽헌’에서 월례 독회를 열고 올해 초 출간된 소설 작품을 검토했습니다. 5월 독회 추천작은 서수진 소설집 ‘골드러시’(한겨레출판)와 최제훈 소설집 ‘블러디메리가 없는 세상’(문학과지성사)입니다.

/한겨레출판
/한겨레출판
/문학과지성사
/조선일보DB

다음은 독회 심사평 전문.


정명교·문학평론가

정명교 문학평론가
♦골드러시

‘서양에게 한국인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한국인들

지난 독회에서 문지혁의 ‘고잉 홈’을 후보작으로 올리면서, 그 소설의 주제를 “한국인에게 미국이란 무엇인가”라고 적었다. 서수진의 ‘골드러시’는 그에 정확하게 대응하는 책이다. 즉 서수진 소설집의 주제를 “서양에게 한국인은 무엇인가”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서양인들의 시각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건 아니라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작품들의 대체적인 내용은 미국 및 호주에 입국해 정착하는 아시아인을 바라보는 서양인의 시각 안에 포집된 한국인들 자신의 행태이다. 문장이 복잡한 것은 이중의 시각이 개재해 있기 때문이다. 우선 아시아인을 비롯해 바깥에서 들어온 사람들, 즉 에일리언에 대한 서양인의 시각이 바탕을 형성한다. 그 시각은 대체로 실용적인 것이지만, 그에 대한 한국인의 짐작은 인종적 고정관념에서부터 교양적 수준에까지 이르는 인식적‧정서적 판단들로 변주된다. 요컨대 이 소설들은 아시아인에 대한 서양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한국인의 욕망 조성 작업을 조명하고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적 차원에서 두 가지 특성이 눈에 띈다.

우선 작가의 시각이 매우 폭이 넓으면서도 디테일이 정확하다는 점을 들어야 할 것이다. 한국인으로서의 존재를 버리지 못하면서도 동시에 서양인의 눈길에 온건한 시민임을 인정받고 싶어하는 한국인들의 복합적 욕망의 세목들을 감각적으로 포착하여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그 모습은 대체로 세 방향으로 나뉘는데, 우선, 교양인의 용모를 갖추고자 노력하는 모습, 가령 우아한 의상을 고르고 집을 꾸미고 골프를 배우며, 지도층의 의견에 기꺼이 동의하면서 마을 공동체 안에 적극 합류하고자 한다. 다음, 이주민으로서의 자신을 끊임없이 의식하면서, 난민과 이주자를 구별할 뿐 아니라, 이주자 중에서도 자신들을 끊임없이 차별화하려고 애쓰는 데에 골몰한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거의 본능적인 표출들이 있다. 이런 복합적인 이주자의 심리가 잘 드러나 있다.

이 소설들의 또 하나의 특징은 사건이 거의 정태적인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다. 사건들에 움직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은 대체로 노정된 이동이지, 예기치 않은 변화가 아니다. 이는 작가의 정직한 인식 혹은 비관적인 세계관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소설의 후반부가 공허하다는 느낌 속에서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블러디메리가 없는 세상

추리소설이 불가능한 세상의 비극을 관통해 나가기

최제훈의 소설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블러디메리가 없는 세상’에서 거의 최제훈스럽지 않은 밋밋함을 보고 놀랄만하다. “이 사람이 나이를 먹었나?” 본래 매우 자극적인 말의 향신료를 듬뿍 칠한 추리적 재능이 번득였던 작가는 소재를 ‘사이파이’ 쪽으로 옮겨 가고 있는데, 그렇다고 전개되는 서사는 미래에 대한 씩씩한 도전도, 아니면 디스토피아적 세계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재앙적 사건들도 아니다.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다면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 버렸다는 느낌 혹은 판단으로부터 비롯되는 무기력의 미립자들이 작품들의 바탕에 “뿌옇고 축축한 안개”(p.213)처럼 깔려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점에 주목하면 이 작가가 창조한 작중 인물들이 대체로 세상에 대해 미리 ‘감을 잡는’ 습관에 아주 익숙하다는 점을 떠올리게 된다. 요컨대 그의 인물들이 어떤 사실이나 사태 앞에서 ‘간을 보는’ 버릇이 농후한 존재들이었으며, 이는 이번 소설집에서도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이 소설은 그의 장기인 ‘추리 소설’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지, 그로부터의 단절이 아니다. 다만 달라진 게 있을 뿐이다. 실로 소설집의 제목은 그런 우리의 추론을 뒷받침한다. “블러디메리가 없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이 정의는 특정 작품의 제목이 아니다. 작품 ‘토피아’의 한 절 ‘제14일’에 나오는 사소한 한 대목이다. 화자는 ‘토마토’를 중심에 놓고, 그걸 비롯해, “케첩과 카프레제와 블러디메리가 없는 세상”(p.169)을 상상한다. 이어지는 대목은 ‘토마토’에 대한 자신의 호오에 관한 잡념이다. ‘블러디메리’는 우연한 잡티처럼 끼어들어 있는데, 실은 제목으로 쓰여, 이 작품집 전체의 주제를 가리키는 것이다.

“블러디메리가 없”다는 건 무슨 뜻인가? 추리 소설이 불가능한 세상이라는 것으로 읽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추리적 인간들은 여전히 이 안에 살아 있는데, 그들이 추리할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길재 시조의 유명한 구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네”를 뒤집어서 “사람은 여전한데/ 세상이 변했구나”라고 말하는 품이다.

추리소설이 불가능한 세상이란 무엇인가? 추리소설은 흔히 ‘범죄의 시학(Poetics of Crime)’ 혹은 ‘살인의 시학(Poetics of Murder)’을 구현한다고 거론된다. 추리 소설은 범죄 소설이기도 하며, 소설은 범행을 시학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범죄에 시학에 있다니? 범죄 예찬인가?

문헌을 뒤져 보면, 범죄소설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 대체로 세 가지 의견이 있다.(이하의 기술은, Glenn W. Most & William W. Stowe, eds., The Poetics of Murder: Detective Fiction and Literary Theory, Harcourt Brace Jovanovic, 1983에 근거한다.)

하나는 자본주의의 무능력을 폭로한다는 주장. 왜냐하면 범죄를 해결하는 건 경찰이 아니라 사립탐정들이니까. 그 둘은 현실에서 소외된 개인의 낭만적 보상의 표현이라는 주장. 왜냐하면 무고한 자가 범인으로 의심받고 사건을 해결하는 건 아웃사이더니까. 그 셋은 범죄가 지역 공동체와 가족의 사안이던 황금기에 대한 향수의 표현이라는 주장. 그 시대에 범죄자는 공동체 사람들의 합심을 통해 법정으로 끌려간다. 이 주장은 셜록 홈스의 추리는 왓슨을 통해서 독자에게 중개된다는 점을 날카롭게 짚어낸다.

구공산권의 학자로부터 제기된 첫 번째 주장은 ‘자본주의’를 ‘거대 현실’로 대체하고, ‘무능력의 폭로’를 ‘조작을 통한 저항’으로 바꾸면 두 번째 주장에 가까워진다. 그러나 두 주장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추리소설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이런 견해들은 범죄 발생의 불가피성을 전제로 한다. 범죄는 욕망이 질서의 울타리를 넘을 때 발생한다. 그런데 욕망은 인류의 생존과 진화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정신적 요소이다.

하지만 첫 번째 주장은 범죄 발생의 장소를 ‘자본주의 사회’로 한정한다. ‘자본/노동’의 계급 분리가 타파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실현된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범죄가 발생할 리가 없고 따라서 추리소설은 불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 사회주의 국가에서 범죄는 발생하지 않았나? 80년을 못 채운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자체가 지도 집단인 당의 ‘총체적 부정’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런 주장은 사실상 생명의 본성을 착각한 무지에 다름아니다. 그런 류의 주장이, 특히 지식인들 사회에서,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건, 실로 불가사의한 일일 것 같지만, 실은 일종의 권력 투쟁과 헤게모니의 사안으로 해석하면, 그 스스로도 모르는(혹은 ‘자발적 무지’를 통해 은폐된) 음흉한 저의가 드러난다.

‘범죄의 시학’은 범죄의 불가피성에서 비롯된다. 범죄의 불가피성을 인정한다면 범죄에 대한 상상, 추적, 해결을 위한 궁리 등 모든 범죄에 관한 모든 사색이 지적 생명의 정신 훈련의 항목 속에 포함된다. 게다가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주장에 모두 보통 사람들의 참여가 들어 있다는 건, 이 정신 훈련의 민주성을 넌지시 가리킨다. 때문에 여기에 삶의 즐거움이 없을 수 없다. 프랑스의 뛰어난 인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로제 카이유와(Roger Caillois)와는 범죄의 상상과 범죄자에 대한 처단 모두에 ‘놀이’하는 쾌락이 들어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펀치[영국의 익살스러운 인형극, ‘펀치와 주디’의 주인공〕는 자기 아내와 자식을 죽이고 거지에게 동냥을 주지 않으면서 그를 심하게 때리며 갖가지 종류의 죄를 저지르고 사신(死神)과 악마를 죽인다. 그리고 마침내는, 자기에게 벌주러 온 사형집행인을 자신의 교수대에 매단다. 영국의 관객이 그토록 많은 끔찍한 짓에 박수를 보낸다고 해서, 그 고의적인 풍자 속에서 그들의 이상상(理想像)을 찾는 것은 확실히 잘못일 것이다. 관객이 그 끔찍한 짓들을 칭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요란스럽고 악의없는 즐거움이 그들의 마음을 풀어준다 : 파렴치하고 의기양양한 꼭둑각시에게 환호를 보내는 것은 현실에서 도덕이 자신들에게 가하고 있는 무수한 구속과 금지에 대해 별로 큰 돈 들이지 않고 복수하는 것이다. (Roger Caillois, ‘놀이와 인간 - 가면과 현기증’, 이상률 옮김, 문예출판사, 1994, p.127.)

최제훈의 소설은 위에서 소개된 추리소설의 기능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것은 저 위의 세 번째 견해에서 피력된 것처럼 향수의 형태로 녹아들어 있다. 가령 ‘카이파’를 발견한 ‘오 박사’가 자신의 발견이 공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과학계로부터 따돌림당하자, 스스로 입증하기 위해 실험자들을 모아 실험현장을 세팅하는데, 그 모양은 “최대 8인의 참석자들은 평등과 화합을 상징하는 원탁에 둘러앉는다.”(p.110)고 묘사되어 있다.

왜 뜬금없이 “평등과 화함을 상징하는 원탁”이라는 표현이 들어가는가? 그건 ‘오 박사’ 시도의 민주성을 암시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12세기 유럽 ‘기사도 로망’의 ‘원탁 회의’를 연상시킨다. ‘기사도 로망’의 가장 신뢰할만한 해석자 에리히 쾰러에 의하면 원탁 회의는 권력을 상실한 기사 계급의 과거 자신들의 영화에 대한 향수의 표현인 것이다. (Erich Köhler, ‘기사도 로망, 소설 속의 이상과 현실(L’Aventure chevaleresque. Idéal et réalité dans le roman)’, Paris: Gallimard, 1974[1970])

작가에 의하면 추리 소설이 불가능한 세상이 바로 ‘토피아’ 즉 현실 세계이다. 작가는 미래 세계란 오늘에서부터 비롯된 것이고 미래에 이를수록 현실 세계는 완전한 통제를 향해 가고 있다는 예감을 은밀하게 독자에게 전달한다. 그래서 이 소설들에는 현재와 미래가 혼잡하게 뒤섞여 있다.

아마도 모두(冒頭)에서 말했듯이 독자가 이번 소설집에서 예기치 않은 밋밋함을 느꼈다면, 이는 마치 ‘입시’, ‘마약’, ‘유괴와 야산 유기’ 등 오늘날 미디어들에서 넘쳐나는 그렇고 그런 사건들의 현실을 그대로 미래적 장치에 투입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인데, 그러나 다시 읽어 보면 여기에는 작가의 교묘한 반전의 씨앗이 파종되는 실제적인 장소로 해석할 수도 있다.

사실 이런 통제사회에 대한 전망은 조지 오웰의 ‘1984′(1949)을 위시해 빈번히 제기되어 온 것이고, 미래사회를 이런 시각에서 조명해 온 예술 작품은 프릿츠 랑의 ‘메트로폴리스’(1927)을 비롯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최제훈이 현재와 미래를 뒤섞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의 추리소설적 성향을 끝내 버리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완전한 통제’를 뚫고 어떤 지평을 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고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실로 이 작품들의 가장 큰 서사적 특징은 방금 얘기한 소재적이거나 주제적인 특성이라기보다는 사건에 휘말려 들어가는 방식으로 사건을 진단한다는, 특이한 체험적 사색의 양태이다. 작중 인물들은 이 완벽한 통제 안에 참여의 방식으로 내습해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통제 체제 안에서 무참히 희생당한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그 참여 자체에 의해서, 이 통제 내부가 요동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키며, 더 나아가 통제는 최종적인 승리를 이미 달성한 것이 아니라, 끝없는 일시성의 불안에 시달리며, 계속 통제를 뚫으려는 자유의 운동과 힘겨운 대결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보면, 마지막 작품 ‘추출 혹은 작곡’은 작가의 의도가 가장 큰 활력을 얻은 경우라 할 것이다. 범죄자가 전적인 착각 속에 형사반장의 모습으로 사건의 매트릭스에 참여하여 자신의 범죄를 노출하고 마는 이야기가 기본 바탕인데, 이 매트릭스안에서의 이중의 가상 사건에서 범죄 적발 수법은 TME에서 TMC로 바뀐다. TME는 ‘전 기억 추출(Total Memory Extractoin)’ 기법이고 TMC는 ‘기억 총체 구성(Total Memory Composition)’ 기법이다. 두 기법은 일종의 진화적 순서를 가지고 있다. TME는 기억의 오염으로 작동 불능이 될 수 있는데, TMC는 그 약점을 교정한 것이다. 그래서 TME에서 TMC로의 변화는 통제의 완벽성을 강화하는 듯하지만, 그러나 TMC는 사건 조작의 혐의에 걸릴 수 있다. 그래서 TMC는 ‘메타포’로만 기능하여 물증을 필요로 한다. 과학수사대가 장비를 들고 그 물증을 찾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 찬란한 통제 기술을 자랑하는 추리 드라마가, 2000년대의 CSI와 뭐가 다른가? 미래에도 여전히 세계는 인간들을 통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또한 여전히 추리 소설은 그의 ‘존재이유’들을 ‘득템’하고 있고 있지 않은가?

최제훈 소설집의 매력은 세계의 위력과 생명의 무기력을 돋보이게 하고, 그것들의 진행을 점강적인 방식으로 보여줄수록, 그 안에 휘말려 든 독자는 자신도 모르게 그 거꾸로의 사태를, 즉 생명의 기력과 세계의 불안을 지각하게 된다는 점에 있다. 그걸 느낄 수 있는 독자는 고급독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고급 독자는 오로지 고급 작품에만 반향하는 것이다.


구효서·소설가

소설가 구효서
♦골드러시

‘외곽의 단독주택을 계약했다. 북향이라 해가 잘 들고 뒤뜰이 넓은 집이었다.’(73쪽)

북향이라 해가 잘 든다니 무슨 소리인가 싶지만 금방 당연해진다. 북반구 한국이 아닌 남반구 호주 이야기니까. 그러니 ‘8월, 겨울이 한창이었다.’(110쪽)라는 문장은 차라리 자연스러워진다. 작가가 이미 독자를 호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골드러시’에 실린 모든 소설을 시드니에서 살며 쓴 것 같다.

8월의 겨울이 자연스럽기는 해도 어쨌거나 한국에 사는 한국의 독자는 소설을 읽을 때만큼은 8월의 뜨거운 여름을 잠시 접어두어야 할 터인데, 자연스러운 것과는 달리 이는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호주가 호주겠지만, 호주 사람이 호주에 살면서 이야기하는 호주와 한국 사람이 호주에 가 살면서 이야기하는 호주는 다른 호주일 것이다. 북반구의 한국어를 쓰는 한국 사람이 호주에 가 살면서 보고 듣는 호주는 남반구의 영어를 쓰며 호주에 사는 호주 사람에게 보이는 호주보다 당연히 더 낯설 것이며, 그러므로 호주에 사는 이방인인 한국인에게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라는 것이 좀 더 선명하게 부각될 거라는 말이다.

서수진의 소설을 읽어보면 소설의 배경이 반드시 호주여야만 할 이유가 없다는 걸 알게 된다. 호주는 한국인 작가에게나 독자에게 매우 강렬한 자각, 환기, 소격효과를 제공하는, 말 그대로 효과적 요소로서의 일국이며 타국일 뿐이다. “내가 지금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거지?”라는 질문은 아무래도 한국에 사는 한국 사람에게보다는 타국에 사는 한국 사람에게 훨씬 빈번하고도 절실하게 찾아올 테니까.

그런 면에서 서수진은 그곳에서 무얼 써야 하는지 아는 작가인 것 같다. 알기에 그에 해당하는 사례들을 날렵하게 붙잡고 놓치지 않을뿐더러 더러는 맥락에 맞게 사태들을 만들어 넣으면서까지 써야 할 것을 써내고 만다.

서수진의 호주가 그 세계 안에 사는 이방인에게 보다 절실한 존재론적 질문을 유도하는 효과적인 무대 혹은 장치라고 했듯이, 서수진의 소설에서 호주는 내셔널리티와 관련된 이슈를 환기하지 않는다. 호주는 이방인으로 하여금 자신이 속해 있는 세계를 보다 선명하게 자각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실존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뚜렷해지게 만들 뿐이다.

뭐가 괜찮은지도 모를뿐더러 괜찮다는 것이 무언지도 모른 채 기도처럼 신음처럼 잠꼬대처럼 괜찮다고만 중얼거리는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그들이 빠져 있는 알지 못할 수렁의 끔찍한 깊이가 느껴진다.(‘졸업여행’) 그런가 하면 갈등과 화해를 반복하는 레즈비언 커플 희율과 은영은 사람 키를 훨씬 넘는 높이의 동굴형 수로 안으로 속수무책 걸어 들어 간다. 앞의 부자의 것과 다를 것도 없고 끝도 없는 어둠 속으로.(‘외출 금지’)

슬럼가의 한국인 여자가 집요하게 찾고 있었던 것이 마약도 돈도 아닌 ‘작고 까만 조약돌 세 개’였다는 사실이 이야기 끝에 밝혀지는 순간, 그녀에 관한 정보가 하나도 주어져 있지 않았음에도 그녀의 존재 전부가 와락 압도해오는 ‘캠벨타운 임대주택’은 기이하기까지 하다. ‘골드러시’는 어떤가. 피곤한 금광체험 여행을 다녀오던 한국인 남녀 커플 진우와 서인이 자신들의 렌터카에 치여 사경을 헤매는 캥거루를 보고 ‘타이어를 갈아 끼울 때 쓰는 끝이 휜 쇠막대를 쥐고 길을 건너 캥거루가 쓰려져 있는 초원으로 들어’가 머리를 내리찍는다. 그들이 정작 끝장을 내려고 했던 게 무엇이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죽지 않고 꿈틀거리는 캥거루로 남겨두는 서수진의 잔혹한 리얼리티를 보게 되는데, 잔혹하다기보다는 차라리 누구나 삶의 굴곡에 따라 본의 아니게 극도로 혹은 허망할 만큼 쉽게 취약해질 수 있는 인간의 여린 속내를 눈감지 않고 응시해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서수진은, 그곳이 어디든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 세계를 극적으로 혹은 섬세하게 타자화하는 전략으로서 호주를 이야기한다.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자주 ‘배영’의 여진처럼 ‘아주 오랫동안 복도에 쭈그리고 앉아서 울’고 싶어진다. 자기기만적 희망에 들떠 웃는 웃음보다 어쩌면 더 자기가 단단해질 울음을.


이승우·소설가

소설가 이승우
♦블러디메리가 없는 세상

추리와 SF적 기법, 참신한 아이디어와 상상력으로 만든 이야기의 미로. 최제훈 소설의 개성이 이번 소설에도 여전하다. 인간의 고유한 정신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꿈, 기억, 의식, 영혼 등을 과학기술적 언어로 번역하는 그의 소설들은 인간의 삶에서 신비와 경이를 제거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꿈은 화석 연료가 고갈된 세상의 대체 에너지가 되고(‘애프터서비스’), 기억은 주입과 제거가 가능한 데이터가 되고(‘사라진 배우들’, ‘토피아’), 의식은 운영체계(‘혈액, 순환’), 영혼은 인간 내부의 에너지 발전소에서 생산되는 소립자들의 흐름(‘닥터블랙의 영혼추출기’)로 변환된다. 이런 과학기술적 정보들은 중층 구조의 이야기들에 설득력을 제공하는 디테일이 된다.

탁월한 이야기꾼인 그는 자기가 만든 이야기의 미로 안에 독자를 가둔다. 이 미로는 평면에 설계된 것이 아니라 입체적일 뿐 아니라 여러 개의 차원을 거느리고 있어 빠져나오기가 더 어렵다. 그는 변화된 세계를 배경으로 오랫동안 문학이 추구해온 주제를 탐구하고, 문학의 미래를 고민하는 작가이다. 그런 탐구와 고민에 과학기술적 용어들이 적절히 사용된다. 그의 소설의 주제가 자아 찾기(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건, 그런 뜻에서 이상하지 않다. 자기를 찾기 위해 기존의 소설들은 인간의 내부로 파고들어야 했다. 그러나 최제훈은 인간 밖에서 자기를 보는 시선을 개발했다. 심리학의 언어가 과학기술의 언어로 바뀐 것이다.

역설적 ‘유토피아’의 세계를 상상한 소설 ‘토피아’에서 ‘토피아’는 ‘인간 본성에 대한 시뮬레이션’으로 설명된다. “적정한 풍요와 자유가 평생 보장될 때, 인간은 범죄 충동을 느끼지 않고 호의적으로 상생할 수 있는 존재인가를 보는 거죠.” 이 문장은 최제훈의 소설에 대한 정의로 맞춤하다. 그의 소설은 달라진 시대의 인간 조건을 상정하고 시도되는, 인간 본성에 대한 시뮬레이션처럼 읽힌다. 시대가 달라졌어도, ‘인간의 의식은 설명될 수 없는 요소들의 복합체’(‘혈액, 순환’)이고, 인간은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로는 살 수 없는 존재다(‘토피아’).

과학기술에 의존하는 인류의 미래에 대한 어두운 전망과 우려가 소설 곳곳에서 발견된다. 인간에게는 무한히 진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만, 어느 지점에서 그만 멈추는 선택을 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돋보인다. 그렇지 않으면 과학기술이 제시하는 낙원은 새로운 유형의 감옥이 되고, 인간의 삶은 ‘낙원에서 꾸는 악몽’(‘토피아’)이 될 것이다.


김인숙·소설가

김인숙·소설가
♦골드러시

8편의 단편소설이 촘촘히 실린 이 소설집의 주인공들은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떠나 살고 있다. 이민이든, 유학이든, 혹은 부모의 선택 때문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역사가 묻혀 있는, 계속되고 있는 땅을 떠나 살고 있는 사람들. ‘촘촘히’라고 말하는 것은 수록작품들의 편수 때문이 아니라 이 소설들이 보여주고 있는 인물들의 서사, 그리고 그 외로움의 밀도 때문이다. ‘작가의 말’에서 작가가 스스로 하고 있는 말이다. 이 소설집을 읽은 독자들의 마음이 좀 덜 외롭기를 바란다고 썼다.

살아가는 일은 신산하다. 어디에서나 그런 것처럼. 어느 때에나 그런 것처럼. 이유를 막론하고. 그러나 이야기에 구체성이 붙으면, 그 이야기는 깊어진다. 겹이 생기고 결이 생긴다. 막연했던 외로움이 스산해지고, 그 스산함의 근원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살아가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 살아내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의 모습은 이민자로서 지닐 수밖에 없는 조금은 특별한 서사를 입고, 그래서 좀 더 명징하다. 은유와 암시와 침묵 대신에 먼저 소리를 지르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 언어의 한계, 문화의 차이, 온갖 편견과 차별. 그래서 돌려 말하거나, 더 깊이 생각하거나, 잠깐 침묵하는 대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 단 한마디라도 더 소통해야 살아낼 수 있는 사람들.

이 소설집의 표제작인 ‘골드러시’에서는 시민권을 얻기 위해 애를 쓰는 젊은 부부의 이야기가 나온다. 시민권 심사 통과 조건인 영어 레벨을 획득하기 위해 아내를 공부시키며 남편은 과도한 노동과 부당한 대우를 감내한다. 그 와중에 아내에게 다른 남자가 생기고, 그 남자와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자 남편이 하는 말이다. “그냥 호주에만 있어줘. 제발 부탁이야” 다른 남자와 잤다고 말하는 아내에게, 그러니 더는 당신과 살 수 없다고 말하는 아내에게 남편이 무릎을 꿇고 하는 애원이다. 아내가 한국으로 돌아가면 시민권이 영원히 사라져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그 때문이다. 여기에 무슨 사랑이 있나. 여기에 무슨 희망이 있고 은유가 있나. 삶의 어떤 순간은 이토록 치사한데, 그걸 돌려 말했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면 이 외로움은 그리 깊게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존재와 존재의 이유가 사라지거나 전도되어버린 사람들. 이민자들이어서가 아니라 이민자여서 다만 좀 더 명징하게 드러나는 상처들. 그것은 이 소설집의 무대인 호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여기에 살면서 여기에서도 무언가에 완전히 전복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골드러시’의 마지막 장면은 사막에서 캥거루를 차로 치는 장면이 나온다. 사고로 차에 치였으나 아직 덜 죽은 캥거루. 이제 마지막 질문만 남았다. 완전히 죽게 할 것인가. 그냥 저 홀로 죽게 놔둘 것인가. 그 질문 속에는 이런 질문도 있다. 과연 캥거루를 치기는 한 걸까. 피 흘리며 죽어가는 캥거루가 저기 사막 어딘가에 있기는 한 건가.


김동식·문학평론가

김동식 문학평론가 인하대 교수
♦블러디메리가 없는 세상

지극히 개인적인 고백이 되겠지만, 최제훈의 소설들을 읽을 때면 순수한 허구를 향한 의지라는 말이 그냥 머릿속에 떠오른다. 일반적으로 소설은 우리가 살아왔고 지금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반영으로 여겨지거나, 어느 시대를 살아온 한 개인의 인생에 대한 실존적인 기록으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소설은 지어낸 이야기로서 허구이지만 현실이나 인생과 같은 객관적인 영역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많은 경우 우리는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이나 인생이 아니라 지어낸 이야기(허구) 그 자체에다 소설의 근거를 마련함으로써 아예 계보를 달리하는 소설도 존재한다. 최제훈의 소설이 그러한데, 현실이나 인생은 소설의 프레임 바깥에 놓여지고, 허구를 향한 의지 또는 순수한 공상의 자유가 소설의 원천적인 근거가 되어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소설집 ‘블러디메리가 없는 세상’에서 순수한 허구를 향한 욕망은, 가까운 미래사회에서 그 지평을 마련한다. “4년간 미래를 배경으로 한 단편들을 쓰며 나를 처음 글쓰기로 이끌었던 순수한 공상의 자유를 즐겼다.”(’작가의 말’)

맞춤형 기억, 유전자 분석 데이터에 근거한 VR 시뮬레이션, 죽은 자와의 재회를 주선하는 영혼추출기, 기억을 모두 지우는 브레인 포맷, 꿈에 대한 의식을 검열하는 드림캐처, 용의자의 의식에 잠입하여 기억을 들여다보는 형사 등등이, 소설집 ‘블러디메리가 없는 세상’에 주요하게 등장하는 미래 현실의 모습들이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인간의 꿈, 지각, 기억 등이 데이터로 처리되어 저장, 재생, 추출, 편집, 부분 및 전체 삭제, 전송하는 일이 가능해진 상황이, 미래 현실의 기본값이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 헤어진 연인과 관련된 기억 구간의 데이터를 반복해서 지웠던 상황을 떠올린다면, 최제훈 소설의 기본적인 상황들이 보다 친숙하게 다가올 것이라고 생각된다.

단편 ‘토피아’는 브레인 포맷 시술을 받고 기억을 모두 삭제 당한 후에 이상향적인 공간으로 이주해서 살게 된 어느 남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자유롭게 노동을 하고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감상하고 소설가의 낭독회에 참석하며 살아가는 이상향이기는 하지만, 뭐라 말할 수 없는 답답함에 짓눌려 남자는 자신의 목을 펜으로 찌른다. 하지만 실시간 감시체제에 의해 구조되고, 그 과정에서 토피아가 브레인 포맷의 부작용을 체크하는 생체실험이 시행되는 공간이며, 이곳의 사람들은 감옥을 대신할 선택지로 토피아를 선택한 무기수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미래 사회를 대상으로 하는 순수한 공상의 기록이, 이상향의 모습을 한 생명정치의 거대한 실험실에 이르렀다는 것. 어쩌면 현재의 후사(後史)가 지금 여기의 현재를 비추어 줄 거울로서 최제훈의 소설 속에 자리를 잡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문학상 심사를 위해 다시 읽어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