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진 작가의 ‘로기완을 만났다’는 탈북자 로기완의 사투를 그린 소설입니다. 방송작가가 벨기에 브뤼셀에서 일기를 바탕으로 그의 행적을 추적하는 줄거리인데, 여기에 얼굴에 거대한 종양을 가져 수술을 앞둔 여고생 윤주, 윤주를 도우려다 오히려 절망에 빠뜨려 현실에서 도망치는 방송작가 이야기가 교차하는 소설입니다.

◇로기완의 절망이 최고조일 때 만난 전나무

‘어머니는 저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살아야 했습니다.’

방송작가인 화자가 유럽을 유령처럼 떠도는 로기완의 행적을 추적하기로 결심한 것은 시사잡지 기사에서 로기완의 이 말을 읽고서였습니다. 로기완이 어릴 때 북한은 대홍수와 태풍 등으로 대기근에 시달리는 이른바 ‘고난의 행군’을 겪었습니다. 함경북도 온성군에서 태어난 로기완은 10대 후반에 어머니와 함께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하나, 살아남는 것이었습니다.

로기완은 연길에서 그늘진 골방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젊은 남자는 공안의 눈을 피할 수 없어 일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대신 로의 어머니가 목욕탕·노래방에서 하루 종일 일해야 했습니다. 2007년 9월 어느날 노래방으로 출근한 로의 어머니는 교통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중국 당국이 대대적으로 탈북자 수색을 하는 기간이라 로는 병원에 가볼 수도 없었습니다. 로는 어머니 시신을 판 돈으로 유럽행 자금을 마련합니다. 브로커에게 위조 여권과 비행기 티켓 비용을 주고 이런저런 다른 비용들을 제하고 남은 돈 650유로, 이것이 로의 전부였습니다.

스무살 로가 도착한 브뤼셀은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낯선 땅이었습니다. ‘눈앞의 모든 것들이 공포의 대상이었고 자기 앞에 닥친 새로운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한국 대사관이 유일한 희망이었지만, 대사관 직원은 사무적인 어투로 로가 북한에서 온 증거가 없기 때문에 난민 신청을 도울 수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로는 길거리 쓰레기통을 뒤져 샌드위치 조각으로 허기를 달랬고, 브뤼셀 남역의 간이 벤치에서 잠을 청하다 다른 노숙자들에게 쫓겨나야 했습니다.

소설에서 로기완이 고향을 그릴 때, 또는 고향을 떠나면서 기억한 인상적인 꽃이나 나무가 나오길 기대했으나 그런 식물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로기완이 브뤼셀에서 가장 최악의 상황에 빠졌을 때, 로기완의 절망이 가장 바닥에 다다랐을 때 이를 지켜본 나무가 있었습니다. 전나무였습니다.

<로는 그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구걸을 했다. 트론 지하철역의 예술의 길 방향 계단에서였다. 로는 모자를 벗은 후 무릎을 꿇고 앉아 상체를 구부려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의 자세를 취했다. (중략)

로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붉은 나방이 이끄는 대로 가로수를 따라 걷는다. 가로수는 거리 초입부터 띄엄띄엄 이어지다가 거리 한가운데 자리한 키 큰 전나무에서 모인다. 전나무는 갖가지 트리로 장식되어 있다. 주머니 안에는 땀에 젖은 돈이 들어 있었지만 로는 식당으로 들어가는 대신 그 전나무 아래에 놓인 벤치에 앉았다. 온몸이 느슨해지면서 도저히 막아낼 수 없을 것 같은 졸음이 밀려왔다. (중략) 다음날 아침 로가 깨어난 곳은 경찰서였다.>

전나무. 전나무는 30~40m까지 굽지 않고 아주 곧게 자란다.

이후 로는 난민신청국에서 벨기에 시민권을 가진 퇴직 의사 ‘박’을 만났습니다. 그는 평양 출신이어서 진짜 북한 사람인지 아닌지 판별하기에 제격이었죠. 로는 박의 도움으로 난민 지위를 얻어 안정적 삶을 찾았지만 새로운 사랑을 찾아 난민으로 누릴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하고 영국으로 향하는 내용입니다.

◇곧게 쭉쭉 뻗는 것이 전나무 특징

이 소설은 2011년 나왔습니다. 이 소설을 몰랐다가 2021년 KBS가 한국문학평론가협회와 공동 선정한 ‘우리 시대의 소설 50′ 중 하나로 이 소설을 소개하는 것을 보고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 소설은 또 지난 3월 영화화됐습니다. 넷플릭스에 공개된 영화 ‘로기완’에서 송중기가 로기완 역을 맡았습니다.

이 글을 쓰기위해 영화를 보니 소설과 뼈대만 같고 전혀 다른 이야기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소설에선 라이카라는 필리핀 여성이 로기완의 상대인데, 영화에서는 벨기에 국적을 가진 한국인 여성 마리가 등장했습니다. 영화엔 작가가 윤주 사건을 계기로 로기완의 행적을 찾아가면서 공감이나 연민에 이르는 과정이 전부 빠져 있었습니다. 어떻든 13년 전 나온 이 소설이 새로운 조명을 받는 것은 소설에 나오는 탈북자들의 절박함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조해진은 1976년생 작가로, 그의 ‘빛의 호위’라는 소설도 감명깊게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전나무는 높은 산에서 자라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침엽수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대산·설악산 등 북부지방에 주로 분포하고 있지만 남부지방에서도 높은 산에 가면 볼 수 있습니다. 전나무의 특징은 30~40m까지 굽지 않고 아주 곧게 자라는 것입니다. 원통 모양의 솔방울 열매는 길이 6~12cm 정도인데 역시 줄기처럼 위를 향해 곧게 섭니다. 오대산 전나무 숲길이 가장 유명하지만 광릉 국립수목원 입구, 내소사 입구 전나무길도 위용이 대단합니다.

전나무는 나무 모습이 원뿔 모양으로 아름답습니다. 이 때문에 유럽에서는 전통적으로 전나무를 크리스마스 트리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벨기에는 이 크리스마스 트리용 전나무 생산으로 유명한 곳 중 하나입니다. 우리나라 특산식물인 구상나무도 1907년 유럽에 전해진 후 크리스마스 트리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엔 전나무가 비교적 많습니다. 수형이 좋아서 공원이나 화단에 한두 그루씩 심어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전나무는 젓나무라고도 부르는데, 줄기에서 젖처럼 하얀 액체가 흘러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비슷하게 생긴 구상나무도 가끔 있습니다. 경복궁·홍릉숲 등에 가면 아주 근사한 구상나무를 볼 수 있습니다.

전나무와 구상나무를 구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쉬운 것은 잎을 보는 것입니다. 전나무의 잎은 구상나무 잎에 비해 길고 아주 뾰족합니다. 그래서 찔리면 아플 정도입니다. 반면 구상나무 잎은 끝이 얕게 갈라져 있습니다. 그리고 구상나무는 잎 뒷면의 흰 줄 때문에 은녹색을 띠는 부분이 많아 멀리서 보면 희끗희끗하게 보입니다. 이 은녹색 부분은 기공선(숨구멍줄)입니다.

전나무. 잎이 길고 찔리면 아플 정도로 뾰족하다.

구상나무는 우리가 관심을 덜 갖는 사이 세계 시장에 나가 크리스마스트리용으로 각광받는 나무이기도 합니다. 전나무와 같은 형제나무여서 영어 이름은 ‘Korean fir’, 즉 한국 전나무이고, 학명도 ‘Abies koreana’로 한국의 나무임을 확실히 하고 있습니다.

한라산 구상나무. 구상나무 잎은 끝이 얕게 갈라져 있다.

소설에서 로기완의 고향인 온성 숲에도 전나무가 많았을 것입니다. 로가 더 이상 벨기에 전나무 아래에서처럼 절대적인 절망을 느낄 일이 없기를, 그의 앞날이 전나무처럼 쭉쭉 뻗어가기를 바라보았습니다.

전나무. 잎 끝이 뾰족하고 곧게 자라는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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