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작가 브로드벡과 드 바르뷔아의 사진 ‘평행의 역사-만 레이의 눈물에 관한 연구 1930-2022′. 초현실주의 사진가 만 레이의 사진 ‘유리 눈물’을 AI에 만들어보라고 주문해 나온 결과물이다. /성곡미술관

여기, 눈물을 흘리는 여인의 얼굴 사진이 있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하다. 또르르 흘러내리는 눈물 줄기가 다섯 갈래다. 프랑스 사진 작가 브로드벡과 드 바르뷔아가 초현실주의 사진가 만 레이(1890~1976)의 유명한 사진 ‘유리 눈물’을 AI에 만들어보라고 주문했더니 이런 사진이 나왔다. 작가는 AI 이미지 생성 프로그램 미드저니에 사진 내용을 묘사하는 명령어를 입력했다. 여인이 눈물 흘리는 모습이 그럴 듯하게 나왔지만, AI는 디테일까지 정교하게 담아내지는 못했다.

신기법을 활용해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의 본질이 무엇인지 묻는 사진 전시가 서울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다섯 갈래 눈물을 흘리는 여인의 사진은 서울 종로구 성곡미술관에서 열리는 대규모 기획전 ‘프랑스 현대사진’에 나왔다. 200여 년 전 사진술이 탄생한 프랑스에서 역동적으로 펼쳐지는 동시대 사진에 주목한 전시다. 프랑스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사진작가 22명의 작품 86점을 소개한다. 이번 전시를 공동 기획한 에마뉘엘 드 레코테 전 파리시립미술관 사진 전문 큐레이터는 “AI를 사용한 브로드벡과 드 바르뷔아의 ‘평행의 역사’ 연작은 기술 데이터를 활용해 역설적으로 우리의 눈을 망가뜨리는 신기술을 비판한다”고 했다.

쥘리에트 아넬, '풀피의 지오드'. 잉크젯 프린트. 2022. 스페인 암석 동굴의 투명한 석고 결정체를 근접 촬영해 그림 같은 효과를 냈다. /성곡미술관
라파엘르 페리아, '조류 시장 #4'. 2021. 프린트 표면을 긁어내는 ‘그라타주’ 기법을 사용했다. /성곡미술관

‘이런 것도 사진이야?’ 싶을 정도로 파격적인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단순히 찍고 인화하는 게 아니라, 긁고 보정하고 덧칠하는 등 이미지에 물리적으로 개입하는 현대 사진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라파엘르 페리아는 데생에 가까운 작업을 한다. 전시에 나온 ‘조류 시장 #4′는 프린트 표면을 긁어내는 ‘그라타주’ 기법을 사용했다. 표면을 규칙적으로 긁어 흰 부분을 드러내는데, 작가는 이 기법이 존재에 대한 기억을 불러낸다고 했다. 회화 같은 장-미셸 포케의 사진은 실제로 붓을 댄 작품이다. 작가가 자신의 아틀리에를 채우는 오브제를 찍고, 이후 사진에 유화를 덧칠해 그림 같은 작품이 탄생했다.

노에미 구달, '무제(산 III)'. 라이트젯 프린트. 2021. 채색한 패널을 풍경 속에 설치해 마치 채석장처럼 산이 잘린 듯한 효과를 내고, 이를 통해 암석의 역사를 드러낸 사진이다. /성곡미술관

과학계와 활발한 교류를 통해 나온 작품도 많다. 노에미 구달은 고대 기후를 연구하는 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채석장 같은 사진을 연출했고, 쥘리에트 아넬은 스페인 암석 동굴의 투명한 석고 결정체를 근접 촬영해 그림 같은 효과를 냈다. 이수균 성곡미술관 부관장은 “사진은 기록이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기록을 벗어나 완전히 예술로서 안착한 현대 미술로서의 사진 작품을 선보인다”고 했다. 8월 18일까지. 성인 1만원.

신기법 활용한 주요 사진전
리차드 미즈락, ‘코끼리 우화 #22’. 하와이 대나무 숲을 담은 하나의 이미지에서 출발해 작가가 사진 속 숲 색상을 바꾸거나 일부를 확대하는 등 다양하게 변형한 사진이다. /페이스 갤러리

서울 한남동 페이스 갤러리에서는 미국 사진 작가 리처드 미즈락의 국내 첫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미국 서부 사막 화재, 핵실험장, 동물 시체 매립지 등 인간이 자연에 미치는 파괴적인 영향을 사진에 담아온 작가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제작한 신작 ‘코끼리 우화’는 시각장애인과 코끼리 우화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하와이 대나무 숲을 담은 하나의 이미지에서 출발해 작가가 사진 속 숲 색상을 바꾸거나 일부를 확대하는 등 다양하게 변형했다.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경험에 의해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전시다. 15일까지. 무료.

알렉스 프레거, '웨스턴 메카닉스'. 2024. 외젠 들라크루아의 작품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연상케 하는 이 사진은 인물과 풍경 모두 완벽하게 연출된 이미지다. /리만머핀 갤러리

한남동 리만머핀 갤러리에서는 미국 사진 작가 알렉스 프레거 개인전이 22일까지 열린다. 영화제작자이기도 한 작가는 기술의 발전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사진을 통해 표현했다. 외젠 들라크루아의 작품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연상케 하는 ‘웨스턴 메카닉스’는 인물과 풍경 모두 완벽하게 연출된 이미지다.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초현실적 사진들이 낯선 감흥을 안긴다. 무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