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55주년을 맞은 동인문학상은 독자와 함께 하는 한국문학의 축제입니다. 매달 독회를 통해 추천작을 쌓아올린 뒤 연말에 그 해 수상작을 선정합니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정명교·구효서·이승우·김인숙·김동식)는 최근 서울 종로구 운니동 ‘송죽헌’에서 월례 독회를 열고 최근 출간된 소설을 검토했습니다. 6월 독회 추천작은 김종광 소설집 ‘안녕의 발견’(마이디어북스)와 성혜령 소설집 ‘버섯 농장’(창비)입니다.

/마이디어북스
/전기병 기자
/창비
/창비

다음은 독회 심사평 전문.


정명교·문학평론가

정명교 문학평론가
♦안녕의 발견

그가 선배 작가의 소설을 이어 쓴 까닭은?

- 세상을 변화시키는 삐쭉빼딱한 말들의 향연

김종광은 대 작가 이문구와 동향으로서, 비슷하게 고향의 현장을 소설적 소재로서 취해 왔다. 이문구의 고향 소설은 철저한 지역성에 근거해 있다. 그 지역성은 타지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웃 지역의 사람들도 해독하기 까다로운 방언의 광범위한 사용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문구 문학의 지역성은 중앙 정부의 정책에 휘둘리는 지역 주민들의 애환을 생생하게 표출하였다. 생생하다는 말은 농촌의 상황을 정부와 농민 사이의 직접적인 대립으로 단순화하지 않고 다양한 상호작용을 통해서 갈등의 예각을 다면화하여 삶의 복잡한 실상을 체감하게 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 방향에서 보면, 그의 방언은 지역민들의 생활어로서 실제 삶의 증빙요소로 존재할 뿐만 아니라 지역민의 문제가 상호 이해의 난제와 맞물려 있음을 환기시킨다. 바로 이 소통의 어려움에 의해서 갈등들은 지역민들 내부에서 유발되기 일쑤이고, 또한 각종의 우연한 사건들을 방아쇠로 해서 예기치 않은 폭발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런 류의 특징적인 사건을 다룬 작품이 암소가 술을 먹고 죽은 소동을 다룬 「암소」(1968)이다.

한데 김종광은 이 소설의 후일담을 써서, 최근 작품집 『안녕의 발견』의 첫 작품으로 싣고 있다. 「암소가 술 마신 집」이다. 그가 이 소설을 이어 쓰기로 결정한 데에는 강력한 의도가 엿보인다. 요컨대 이는 단순히 고향의 선배 작가에 대한 오마주만이 아니다. 그는 다른 이야기를 쓸 필요를 느꼈음이 틀림없다.

이문구의 「암소」는 비극으로 끝난다. 머슴이 빌려준 돈을 주인이 떼먹고 고리채로 신고해 버려 발생한 심각한 갈등은 화해의 조건이 되었던 암소가 술 먹고 죽음으로써 파국이 되고 만다. 김종광의 소설은 그 후일담을 다루고 있다.

전편이 비극인 데 비해, 후일담은 희극이 된다는 것이 결정적인 변화인데, 그 계기는 「암소」의 머슴 ‘선출’이 애인 ‘신실’과 함께 고향을 떠난 데 있다. 후배 작가는 선배의 작품에 나온 한 가지 암시(그러나 작품에서는 전혀 사용되지 않은),

“그는 아주 어려서부터, 그리고 군대에 있을 때에도 사주쟁이나 관상쟁이로부터 고향을 떠나야 하며 타관에 나가야만 비로소 성공하고 밥술이나 놓치지 않고 살리라는 말과 그 비슷한 예언 같은 소리를 들어온 터였다.”

에 착안해, ‘선출’을 출향시키고 그의 성공 내력을 추적하고 복각한다. 그리고 주인이었던 ‘황구만’의 아들, ‘공식’이 찾아와 옛집을 사달라고 요청을 하면서, 귀향하게 되는데, 귀향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선출’의 아내 ‘신실’과 ‘선출’이 전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윤유’, 그리고 그곳에 남아 있던, 신실의 친구이자 ‘황구만’의 딸인 ‘양순’이다. 이들이 작품 제목에 해당하는 식당을 차리는 것으로 작품은 메지를 대니, 시야를 넓혀서 보면 이는 ‘금의환향’의 드라마다.

이런 해피엔딩은 어떤 진실을 담고 있는가? 통상적으로 소설은 현실을 ‘문제화’해서 자각하고 성찰하게 하는 문화적 장치로 작동하기 때문에, 해피엔딩은 권장되지 않는다. 그러나 김종광의 소설에서는 그럴 이유가 있어 보인다.

우선 김종광 소설의 주인공들은 방언을 쓰지 않고 비속어에 가까운 막말로 삐쭉빼딱하게 대거리를 하듯이 말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방언과 비속어는 그 말의 특이성에 의해서 현실과의 마찰을 가리키는 표지로 기능하기 일쑤이다. 그런데 앞에서 말했듯, 이문구의 방언이 소통의 난맥이라는 정황을 가리키는 상징적 지표로 쓰였다면, 김종광의 비속어들은 현재의 소통 방식을 깨고 새로운 인간관계를 겨누는 소통의 인화물질로 작용한다. 게다가 비속어는 그 자극성에 의해서 특별한 ‘극적 상황’을 늘 떠올리게 한다. 런던의 역사와 도시 문화에 정통했던 소설가 피터 에크로이드(Peter Ackroyd)는 워즈워스(Wordsworth)를 원용해, 런던의 비속어(slang)를 가리켜 “모든 것은 오로지 쇼를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고, 도시는 일종의 어릿광대가 되는 강렬한 ‘연극성’”(Jeremy Gibson, Julian Wolfreys ed., 『피터 에크로이드: 장난기 가득하고 미로투성이인 텍스트 Peter Ackroyd: The Ludic and Labyrinthine Text』, London: Palgrave Macmillan UK, 2000, p.257)의 한 요소라고 지적한 적이 있는데, 김종광식 인물들의 거친 대거리가 바로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덧붙이자면 프랑스의 누보로망 작가 미셸 뷔토르 역시 “제임스 조이스가 특수어, 은어, 토막 난 외국어들, 의성어‧의태어들을 상시로 사용”한 것은 “언어를 과장”해 “침묵 속에 빠져 있는 사물들을 선명히 드러내기 위한 것”(Michel Butor, 「조이스 열도 Archipel Joyce」『근대성에 관한 에세이 Essai sur les modernes』, Paris: Gallimard, 1960,1964, p.255)이었다고 풀이하였다.

여기에서 언어의 연극적 과장은 단순히 감각적 자극을 노리는 것도 위악적 표현도 아니다. 필자가 보기에 이는 김종광 소설에서 인물들을 현실에 확고하게 정착시키는 매개체로 기능한다. 그들은 막말을 통해서 상황을 동요시키고 상황의 변화를 유도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상황 속의 자연인으로서 당당히 진입한다. 진입의 성공 후에 점잖은 태도를 회복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이때 상황의 동요를 일으켰던 계기들은 정착인의 삶 속에 내장된다. 즉 이 정착인은 저 옛날의 수렁에 발을 담근 정착민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를 모색하는 정착민, 즉 정착 자체가 끝없는 이주를 예비하는 그런 존재라는 것이다.

작품의 시간적 전개에 비추어 보면, 이는 뜨내기로부터 정착민으로의 변화 과정이다. ‘선출’이 머슴으로 살았다는 사실이 이 변화 과정의 시간 벨트에 미묘한 어긋남을 준다. 즉 ‘선출’이 고향에 있을 때 그는 이미 ‘뜨내기’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뜨내기스러움을 자각하지 못한 상태이다. 그러다가 고향을 떠난 시간부터 뜨내기적 삶의 자각적 실천이 시작되는데, 그 출발은 동시에 정착인이 되어가는 시간대의 기점이 된다.

그래서 시간대의 변이는 ‘정착인 → 뜨내기 →정착인’이라는 상투적인 이행이 아니라, ‘뜨내기(비자각적) → 뜨내기(자각적) → 정착인(변화를 내장한)’의 절차가 된다. 즉 물리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이 시차를 두고서 겹쳐져 있는 모양이다.

이런 겹침은 인물을 넘어 시대 자체의 성격을 규정한다. 즉 첫 번째 시간대에서 그저 ‘선출’만이 뜨내기인 것이 아니다. 훗날의 파탄을 다 살피고 보면, 실은 주인 노릇을 한 ‘황구만’ 역시 뜨내기에 지나지 않는다. 모두가 뜨내기였는데, 누구는 여전히 멍청한 뜨내기로 남았고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뜨내기성을 자각하고 그 주어진 운명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그 자각적 실천은 뜨내기를 정착인으로 유도한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도 맹한 뜨내기들은 여전히 있지만, 의식이 또렷한 정착인들도 일정한 군을 이루게 되었다.

이 시간대 전체는 1965년부터 코로나 이후까지 걸쳐져 있다. 그것은 이 작품의 사건이 한국 현대사와 평행을 이루고 달려왔다는 것을 가리킨다. 작품의 전개에 미루어보면 작가는 제3공화국에서부터 한국인의 뜨내기적 삶이 시작되어 ‘IMF 구제금융 시기’에 자각적 뜨내기들의 본격적인 진출을 보았으며, 코로나 이후 변화를 내장한 정착인들의 세계가 형성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한데, 구체적인 기점에 대한 작가의 속내에 관해서는 좀 더 살펴봐야 할 것같다.

다만 이 소설집을 통해서 독자가 읽는 것은 한국인의 현대사를 상당 부분 차지했던 뜨내기적 삶을 이제는 청산해야 한다는 분명한 메시지이다. 뜨내기적 삶이란 때마다의 변덕에 의해 작동된 임기응변과 투기의 삶이다. 그 삶을 지탱하는 것은 불타오르는 생존 욕망과 억척스러운 부지런함과 끊임없는 모방이다. 그러나 그 삶에는 축적이 없고 창안이 없으며 당연히 자기 갱신이 없다. 변화하는 정착인이란 그 반대의 형상을 떠올리면 된다. 한국의 현대사는 이 두 유형의 집합적‧군중적 교체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작가는 글쓰기의 무의식 속에서 이 교체 과정에 계속 기름을 부으면서 선배가 파국으로 직면했던 세계를 희극으로 바꾸었다. 이 희극 속에 진실이 있는지는 두 방향을 통해서 확인해야 할 것이다. 하나는 지금, 이곳의 역사적 전개로부터. 코로나 사태 이후 한국 사회는 지금 어느 단계에 와 있는가?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여러 부면들의 지독한 비균질성이다. 어떤 부면은 느리지만 꾸준히 불굴의 전진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부면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거머리들처럼 바글거리며 거짓의 깃발들을 추종하면서 우왕좌왕하고 있다. 형이상학의 층위로 갈수록 그런 현상이 유독 두드러진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여하튼 이런 현실에 대해 작품은 거울로 작용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작품 그 자체 안에서 진실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교체 과정이 실제로 확인되기 위해서는, 연극적 과장이 범상한 사실들로 환원되어야 한다. 말의 힘은 사실들의 바닥 중력으로 옮겨져야 할 것이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연극의 활력 자체가 바닥의 중력으로 작용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소설의 문체는 어떤 변화를 치러낼 것인가? 작가가 숙고할 문제이다.

‘역사는 두 번 되풀이된다’는 마르크스의 그 유명한 문구로 흔히 알려졌다. 정확한 대사는 다음과 같다. “헤겔은 어디선가 위대한 역사적 사건들과 인물들은 두 번 되풀이 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런데 그는 다음 사항을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처음에는 비극이지만, 다음번에는 소극(笑劇)이라는 것을.”(「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이 대목을 통해 이 저명한 진보주의자의 무의식 속에 역사에 대한 냉소적인 심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면, 화를 낼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소극’의 잡다한 장면들을 나열하고는 “19세기의 사회혁명은 과거로부터가 아니라 오로지 미래에서 영감을 받는다. 과거와 관련되어 있는 모든 미신을 벗어 버리고서야 비로소 19세기의 사회혁명은 시작될 수 있다. [...] 과거의 혁명에서는 형식이 내용을 압도하였다. 19세기의 혁명에서는 내용이 형식을 압도한다”(칼 마르크스, 『프랑스 혁명사 3부작』, 허교진 옮김, 소나무, 1987, p.49)라고 썼다는 것은 그가 혁명과 역사를 대립적인 것으로 이해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에 비해 김종광의 ‘소극’은 다른 형식을 제시한다. 그의 작품은 과거의 형식이 내용을 압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신생(혁명)의 내용은 과거의 형식을 끌어안고 그것을 변용할 때 창출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김종광의 과장된 대거리는 이문구의 충청도 사투리의 변용이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또한 그가 선배를 추앙하며 이어 쓰기를 한 까닭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역사와 혁명, 혹은 전통과 혁신의 관계에 대해서 새삼 성찰을 촉발한 것도 이 작품집의 미덕이라 할 것이다.

♦버섯 농장

트라우마를 양식화하는 문학의 출현

성혜령의 『버섯 농장』은 종래의 소설적 문법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두드러지는 건 인물들의 집요한 의식 혹은 몸의 성향이다. 그들 앞으로 사건들이 툭 튀어나와 나무토막들처럼 굴러다닌다.

이 사건들은 원인이 희박하고 맥락도 거의 없다. 최초의 원인은 있으나 전개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갑자기 발발한 것들이 사라지질 않는다. 사건들에 긴박한 논리적 연결이 있을 때에는 인물들이 그 사건 둘레에서 겉돌기 일쑤이다. 그들은 사건에 참여하지 못한다.

인물들은 그런 사건들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집요하게 매달리거나, 거꾸로 끊임없이 무시하려고 하지만 그것들이 인물들을 끈덕지게 괴롭힌다. 그리곤 어떤 이해나 의미부여가 안 되는 데도, 인물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대부분 이 사건들은 보이스피싱 등 사기 사건들같이 인물들에게 치명상을 입힌다.

겉으로 봐선 자질구레하지만, 당사자에게는 절박한 사태들을 해결할 방책은 없다. 범행에 연루된 사람도 의도적으로 그걸 계획하거나 거기에 가담한 것이 아니라 우연히 얽혀든 존재들이어서 변명은 가득하지만, 해결책은 없다. 가만히 보면 그 사람들 하나하나는 선량한 시민들이다. 요컨대 별 볼 일 없는 존재들이다.

굉장히 많은 사건들이 터졌지만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다. 다만 삶은 하염없이 어떤 파국으로 흘러들어 가는 것 같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죽음이 등장한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은 망하나? 그것도 아니다. 예전에 백가흠은 첫 소설집의 모든 작품에서 하나 이상의 인물을 시체로 만들었다. 거기에는 서사적 인과관계가 있었다. 그런데 성혜령 작품의 죽음은 우연하고 낯설고 그냥 거기에 발생한 채로 있다. 서사 내부의 한 고리가 아니라 이야기의 동체에 와서 툭 부딪치는 돌덩이 같다.

그렇다면 이런 소설이 왜 필요한가? 고전적인 의미에서 소설이 ‘발단-전개-위기-클라이맥스-대단원’으로 전개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들에는 이런 문법이 부재한다. 있다면 오로지 ‘위기’들만이 계속되는데, 이 위기들에는 당연히 충만해야 할 것 같은 에너지가 제로이다. 아드레날린이 왜 분비되지 않나? 마치 여기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그냥 시커멓게 변해버린 암 덩이들 같다.

독자는 다시 묻는다. 이 소설은 왜 존재하는가? 왜 이렇게 쓰는가? 이런 회의적인 질문에 대답이 하나 올라온다. 그런데 거기에서 벌어지는 거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늘 벌어지는 일 아니야? 생각해보니 그렇다. 그러나 소설이 현실을 나열하는 건 아니잖아. 사건은 움직여야 해. 그래서 인물이 됐든 독자가 됐든 이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를 발동하게끔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즉시 누군가 대꾸한다. 그런데 거기엔 분명 글쓴이의 의도가 작용하고 있어. 잘 읽어 봐. 휴대전화가 울리는데, 안 받잖아. 실은 안 받는 게 아니라 인물의 강박증을 묘사하는데 시간을 다 써버려서 인물이 휴대전화를 받는 다음 행동이 나오기 전에 작품이 끝나버리고 만 거야. 화자가 인물에게 정신이 팔린 거라고. 작가가 일부러 그랬다고 봐야 하지 않나?

그렇군.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방기’의 형태로 사건들을 내버려두는 건 소설 윤리에 어긋나는 것 아닌가? 다시 대답이 들려온다. 방기라고 할 수 없네. 첫 작품을 다시 봐. 피해자 일행이 찾아간 범죄자의 아버지는 초점 화자가 화장실에 다녀왔더니 죽어 있었어. 그 아버지의 머리를 피해자가 골프채로 툭툭 건드리지. 그걸 사이코패스의 위악적 행동이라고 봐서는 안 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황에 대한 일종의 상징적 기습이라고 봐야지. 좀 놀래 봐! 일어나 봐! 하면서 힘을 주는 것이란 말일세. 그런 거였군. 하지만 이런 상징적 처리가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네. 다시 대답. 그래. 세상은 요지부동이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상징적 행위들이 독자에게 전하는 게 있다네. 절대로 잊지 못하게끔 하는 것. 이 말 없는 끔찍한 사건들을 영원한 악몽으로 느끼게 하는 것.

『버섯 농장』은 독자의 머릿속에 끊임없이 의혹들을 주입한다. 그것들은 독자의 강박관념이 된다. 소설 속 인물들의 강박증이 독자에게 전이되는 것 같다. 그렇게 해서 삶의 사건들이 항구적으로 못 박힌 트라우마가 된다. 왜 그렇게 하나? 오늘날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게끔 하기 위해서다, 라고 밖에는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그렇다. 끊임없이 끔찍한 사건들이 벌어지지만, 사람들은 거기에 적당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지나간 사건으로 만든다. 그리고 잊는다. 그런데 유사한 사건들은 여전히 일어난다.

일본의 영화감독 기타노 타케시는 폭력이 난무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폭죽처럼 터뜨리고는 신나게 춤을 춰대는 가학적인 영상들을 만들었다. 영화학자 숀 레드몬드는 이런 영화 미학을 두고, “폭력을 이미지 속에 트라우마처럼 심고, 불규칙적으로 일어나는 기억들을 통해 폭력의 사건들을 관객의 눈동자 속에 집어넣은 후 나사를 죄어 잠금”으로써, “폭력을 항상적 형식으로서, 모든 것 속에 있는 ‘그것’으로서, 피가 낭자한 아수라장이 없어도, 폭력을 음울한 현존 혹은 현재로서 굳어버리게 한다”라고 풀이한 적이 있다. (Sean Redmond, 『기타노 타케시의 영화: 꽃처럼 피어나는 피 The Cinema of Takeshi Kitano: Flowering Blood』,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3, p.37)

양태는 다르지만 『버섯 농장』이 트라우마를 상징화하고 고착시킨다는 점에서 기능은 같다. 이는 트라우마를 극복, 혹은 그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고전적인 문학적 기능을 거꾸로 거스르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유가 있어 보인다. 우리는 너무 쉽게 해결책을 찾고 잊어버리고 있는 건 아닌가? 좀 더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해야 하는 건 아닌가? 그러니 이 소설이 독자를 더욱 꼼짝달싹하게 만든다 할지라도, 그 정지의 순간 괴로운 사색을 할 수밖에 없는 건 독자의 위생에 필요한 일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타고 한 시구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기 드보르(Guy Debord)가 프랑스어로 번역했던 15세기 스페인 시인의 그 시구가:

잊지 말게, 잠자는 영혼이여,

너의 마비상태에서 빠져나와,

똑바로 보게,

삶이 어떻게 돼 가는지,

죽음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경악하시게.

기쁨이 어떻게 달아나는지.

그 다음에, 그에 대한 추억은

어떻게 우리를 괴롭히는지.

그리고 그런데도 우리는 왜 믿고는 하는지.

무엇이든 지나가고 나면, 더 좋아질 거라고.

- 호르헤 만리케,『그의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절』(Jorge Manrique, Stances sur la mort de son père, traduit par Debord, Guy, Paris: Le temps qu’il fait, 1980[1480], p.5)


구효서·소설가

소설가 구효서
♦안녕의 발견

“이런 게 바로 낭만주의였어. 감상적인 그림 같은 이야기로 본질을 덮어버리는 게 낭만이었다고. 홍길동, 임꺽정, 장길산, 일제 때 건달들은 어렸을 때부터 폭력배였고 도둑놈이었고 강도였어. 걔들 때문에 다치고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그것들을 의적, 활빈당, 독립운동가로 포장하는 게 낭만주의란 말야.”(161쪽)

《안녕의 발견》은 그런 ‘감상적인 그림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처럼 들린다. 그런 소설은 쓰지 않겠다는 작가의 다짐으로도 읽힌다. 단편 <농사는 처음이지?>에 등장하는 대학생 곽감희라는 인물은 문창과 3학년생인데 시급을 받고 농촌봉사활동에 참여하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돈도 돈이지만 농촌을 알고 싶어서 왔어요. 모름지기 작가가 될 사람으로서 우리 민족의 근원 농촌을 모르는 건 터무니없잖아요. 시골 소설만 줄창 써대는 듣보잡 소설가가 하나 있는데, 그러더라고요. 미디어에 나오는 농촌은 조작된 농촌이다. 도시 사람들이 보고 싶은 것을 보여줄 뿐이다. 진짜 농촌이 어떤지 겪어보려고요.”(304쪽)

과연 곽감희는 ‘진짜 농촌’을 겪을 수 있었을까. 설령 곽감희가 진짜 농촌을 겪었다 하더라도 그게 진짜 농촌인지 아닌지 누가 ‘감히’ 판단할 수 있다는 말일까. 아무도 판단할 수 없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라 김종광은 어쩌면 진짜 농촌이라는 게 있고 그것을 겪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 자체가 낭만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우리 민족의 근원 농촌’이라는 거창하고 어색한 말에서 이미 곽감희의 낭만성이 드러날 뿐 아니라 ‘작가가 될 사람으로서’라는 말에서도 그런 면이 엿보이도록 김종광은 슬쩍 쓴다.

그러면 곽감희라는 작중 인물에 의해 언급되는 김종광(임이 분명한)은 농촌을 어떻게 말하고 있나. 미디어에 나오는 농촌은 조작된 농촌이다, (미디어에서는) 도시 사람들이 보고 싶은 것을 보여줄 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인용된 김종광의 문장에는 진짜 농촌이라는 말이 없다. 미디어 속의 농촌은 ‘나는 자연인이다’의 자연인이 그렇듯이 도시인들에 의해 조작된(완곡하게 말하자면 소망이 창출한) 농촌이라고 했을 뿐, 조작 이전의 농촌에 대해 긍정하거나 그것이 진짜라고도 하지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다르다고 했을 뿐이다. 소설집에 실린 작품을 다 읽어보아도 작가의 의중이 개입되었다고 여겨지는 서술에서는 진짜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 말을 특별히 경계하기라도 한 것처럼. 대신 다음과 같은 투의 담화가 눈에 띈다.

“참말로 아리랑스리랑 혀. 새마을들 말로는 우리 농촌이 참 살기 좋은 곳이 되었다는데 살겠다는 젊은이가 드문 걸로 봐서 그건 아닌 것 같단 말여. 전봉준들 말로는 우리 농촌이 천 번은 망했어야 하는데 그럭저럭 살고들 있으니 그것도 아닌 것 같단 말여.” (143쪽)

이도 저도 모르겠다는 말이다. 이 담화는 ‘농촌이 알고 싶어서 왔다’고 한 문창과 3학년생 곽감희의 말을 무색하게 한다. 그렇다고 작가가 농촌을 모를 곳으로만 여기는 건 아닌 듯하다. 같은 농촌을 두고 누군가는 살기 좋아졌다고 하고 누군가는 망할 거라고 하는 까닭에는 쌍방의 수상한 의지가 발동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려는 듯하다. 그 의지가 무엇이고 그것이 어째서 수상한가에 대해서 소설은 끝까지 선명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 선명함 자체에 혐의를 두는 소설이 선명해질 리 없다. 모르겠다고 할밖에.

<시골 악귀>는 악귀 앞에 시골이라는 말을 붙여 만든 단편의 제목이다. 악귀에도 시골 악귀가 있고 도시 악귀가 있을까, 악귀면 악귀지. 악귀는 왠지 도시에 더 많거나 어울릴 것 같다는 편견을 깨려는 제목일 듯싶은데, 아닌 게 아니라 <시골 악귀>의 악귀는 김종광이 즐겨 쓰는 말처럼 ‘괴랄’하기 짝이 없어서 혹시 누가 이 소설을 볼까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몰래 읽게 될 정도다.

이런 끔찍한 악귀에 하필이면 ‘시골’을 붙여 애먼 시골을 명예훼손하나 싶겠지만, 실인 즉 ‘그런 시골은 없다’라는 쪽에 가까우니 명예훼손 당할 시골도 없게 되는 셈이다. 그러니 김종광이 소설에서 다루는 농촌은 ‘진짜 농촌’ 같은 것은 물론 아니려니와 ‘그런 농촌’마저도 아닌 것이다. 어떤 작가는 파리라는 도시를, 어떤 작가는 강남이라는 지역을 즐겨 다루듯이 김종광에겐 그것이 농촌인 것이다. 김종광의 입담, 취향, 관심이 가장 잘 발휘되고 독자에게도 그 분위기와 효과가 가장 잘 전달될 수 있는 문제적 공간이 김종광에겐 대한민국 충청도의 농촌인 것이다.

‘발견’이란 미처 보지 못했던 사물이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찾아내는 것을 말한다. 감추어졌거나 숨겨졌던 것을 찾아내기도 하지만 때로는 코앞의 것을 뻔히 눈 뜨고도 내내 못 찾다가 문득 발견하고 새삼 놀라기도 한다. 몰라서 못 찾기도 하지만 너무 알아서, 너무 선명해서, 그 밝고 자명한 것에 외려 눈멀어 못 찾기도 한다.

《안녕의 발견》은 충청도 안녕시 이야기다. 작가가 괜히 안녕이라고 이름 지은 것 같지는 않다. 들여다보면 도무지 안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앎과 명분 따위에만 집착하다 보면 안녕하지 않음 속에서의 안녕을 발견해 낼 수 없다. 때로는 무사안일의 안녕이 우리의 눈을 속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김종광 소설에서의 안녕이란 안녕하지 않음을 뜻한다고도 할 수 있다. 불안하고 불화하는 듯하면서도 거칠게 생동하며 삶을 단련시키는 안녕을 김종광은 특유의 너스레와 익살로 새롭게 발견해 낸다.


이승우·소설가

소설가 이승우
♦버섯 농장

공포가 일상의 무대 위에서 재현될 때가 가장 무섭다. 종말 서사나 미래를 다룬 소설은, 과도한 비극성에도 불구하고, 그 서사가 보여주는 시간적 공간적 거리로 인해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느껴진다. 남의 이야기거나 지금이 아니라 먼 미래에 일어날 사건이니까. 남의 이야기나 먼 미래에 일어날 사건에는 거리를 둘 수 있다. 그러나 일상을 타격하는 공포에는 피할 거리가 없다. 그런 뜻에서, 나는 방금 가장 무서운 소설을 읽었다.

성혜령의 소설에서는 어떤 일이 특별한 동기나 그럴듯한 원인 없이 불쑥 나타난다. 갑자기 사람이 죽고, 그런데 왜 죽었는지 누가 죽였는지 알 수 없다.(「버섯 농장」) 작가는 그런 걸 굳이 말해야 하느냐는 듯 말하지 않는다. 원인이 있어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이유가 있어야 무슨 일을 한다는 생각이 촌스럽지 않으냐는 듯 말하지 않는다. 일들이, 사건이 ‘그냥’ 일어난다. 원인과 이유를 방기한 서술로 인해 공포는 배가된다. 무서운 것은 난폭함이 아니라 무지이다. 파악되지 않은 것이 항상 가장 무섭다. 파악된 무서움은 대처할 수 있기 때문에 덜 무섭다. 파악되지 않은 것은, 무서움에 대한 예감 때문에 더 무섭다. 작가는 사건의 발생을 인과의 관습에서 빼낸다. 충동과 우연과 정념 같은 것이 행동의 발생에 작용한다. 독자는 인과관계가 끊어진 벼랑에 설 수밖에 없다. 벼랑에서는 사소한 움직임도 긴장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성혜령의 소설이 무서운 것은, 독자가 읽는 내내 일어날, 무서운 일을 예감하지 않을 수 없다는 데 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것 같지 않다. 소설에서는, 일어날 가능성이 시사되다가 정작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기도 한다. 작가의 서늘한 문장은 평범한 움직임조차 신경을 곤두서게 한다. 마치 캄캄한 밤길의 아주 작은 바스락 소리와도 같다. 주말에 귀가한 남편은 아내가 모르는 여자와 자기 침대에 있는 것을 본다. 그녀는 어떤 사이비종교 집단의 일원이라고 소개되고 꽤 심각한 일이 일어날 것처럼 암시되는데, 정작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는다.(「주말부부」) 그렇다고 해서 무서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일어난 일이 일어나지 않고, 일어나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고 해도 소설의 진행에는 무리가 없다. 핵심은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일어나지 않은 일은 다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일 뿐이다. 소설은, 일상을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부비트랩과 같은 것으로 만든다. 작가는 일어난 무슨 일에 대해서도 별말을 하지 않지만, 일어날 듯하다가 일어나지 않은 무슨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하지 않는다.

작가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단서를 제공하려 하지 않고 다만 재현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 소설가는 이유를 따지는 자가 아니고,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무슨 일’들을 상상하고 펼쳐보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소설을 읽고 나면 두 사지 사실이 확실해진다. 세상은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곳이고, 그러나 그 일이 왜 일어나는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김인숙·소설가

김인숙·소설가
♦버섯 농장

8편의 단편소설이 실린 이 소설집의 표제작은 ‘버섯 농장’이다. 사기범의 아버지를 찾아가는 친구와의 동행, 하루 동안 이어지는 짧은 여정이 이 소설의 줄거리다. 당연히, 복잡한 이면이 있기 마련. 화자의 친구는 어쩌다 사기를 당했을까. 그 친구는 왜 굳이 사기범의 아버지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화자는 왜 친구와 동행해야 했을까. 무엇보다도, 왜 이 소설의 제목은 버섯 농장일까.

소설 속 버섯은 불길하다. 탐스럽게, 먹음직스럽게 솟아오른 것이 아니라 그늘지고 음습한 곳에서 툭 하고 솟아올라 사라지지 않는 것. 버섯이라 이름붙였으나 균, 혹은 곰팡이인 것. 이 소설을 흥미롭게 읽는 독자라면, 이 버섯 혹은 균의 근원을 찾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작품의 화자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이다. 비전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삶, 그에 더해 사기까지 당하는, 전형적으로 불운하고 불행한 청춘. 그런가 하면 부모의 비극적인 죽음을 대가로 경제적 곤란에서 벗어난, 약간은 비전형적인 청춘이 있다. 상속으로 살아가게 된, 살아갈 수 있게 된 비전형적인 청춘이기는 하지만, 그 대가가 삭막하거나 야비하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무언가를 스스로 이루기에는, 그러려고 노력하기에는 그들이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크다. 게다가 잔혹하다.

작가는 이러한 사실을 고발하거나 웅변하는 대신 태연하게 묘사한다. 소설은 불길한데 그 소설을 묘사하는 작가의 태도는 태연해 보인다. 문장은 단문으로 끊기고, 감정은 휘둘리지 않고, 장면은 섬뜩하다.

죽였을까?

소설을 읽다 이런 단순한 질문을 하게 되는 순간, 독자들은 어떤 함정에 빠지는 느낌이 드는데, 작가는 그 함정에 대해 딱히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같이 빠져보지 않고는 그 대답을 찾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버섯 농장’ 이외에도 이 소설집의 소설들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불길함이다. 일상적인 관계의 균열, 그 안으로 툭 하고 밀고 들어온 침입자, 그리고 붕괴되는 일상.

거기에 무엇이 남아있을까.

죽음뿐일까.

그러나 누구도 누가 죽였는지 모른다는 점에서, 왜 죽었는지 모른다는 점에서 이 소설집의 소설들이 주는 질문들은 무한히 낯설어지기도 한다. 곰곰이 들여다보게 하는 소설들이다.


김동식·문학평론가

김동식 문학평론가 인하대 교수
♦안녕의 발견

충청남도 안녕시 육경면 역경리. 김종광의 소설집 ‘안녕의 발견’에 등장하는 농촌 마을의 주소이다. 안녕시는 지도에는 존재하지 않는 허구적인 장소이지만, 한국의 지방 어느 곳에 가더라도 만나게 될 장소 같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집 ‘안녕의 발견’에서 작가 김종광은 안녕시에서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방송의 관점에서 보자면 드라마 ‘전원일기’(1980-2002) 이후에 농촌은 연속극의 형태로는 재현되지 않는다. 저녁시간대에 방송되는 정보전달 프로그램이나 유명 연예인들이 지방을 방문하는 연예 프로그램을 통해 호명될 따름이다. 농촌은 외부자 또는 방문자의 관점에서 고향이나 자연의 상징적 대체물로서 소환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반면에 김종광은 농촌에 몸을 두고 부대끼며 살지 않는다면 도저히 묘사할 수 없는 삶의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농촌인구의 감소와 고령화 때문에 소멸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들이, 소설에서 재현된 농촌 현실의 기본 값이다. 그 속에서도 1세대 외국인 아내와 그 이후에 한국에 시집 온 외국인 아내 사이에 공감과 연대의 감정이 피어나고, 폐교 직전의 초등학교를 어떠한 방식으로라도 유지하기 위해서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무의식적인 합의가 마을을 감싼다. 모든 사회문화적 변화가 소멸을 지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중에도, 이문구가 1965년에 발표한 소설 「암소」의 등장인물이 여전히 살아 있어서 자신의 젊은 시절을 소설로 읽기도 하며, 문화센터의 프로그램을 통해서 시도 쓰고 받아쓰기도 하고 토론도 배우며 자신들의 삶을 기록하고자 하는 준비와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안녕시에 소속된 농촌 마을에 여전히 사람들이 살고 있어서 반갑다는 의미에서 안녕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와 동시에 마을의 모든 사회문화적 변화가 소멸로 수렴되고 있기에 예견되는 작별이라는 의미에서 안녕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반가움의 안녕과 작별의 안녕 사이에서 안녕시의 농촌마을이 지금도 자신의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만들어 내고 있음을, 김종광의 소설들은 증명하고 있다. 발터 벤야민이 이야기한 두 가지의 이야기꾼 유형에 기댄다면, 김종광은 먼 곳을 떠돌다가 이야기보따리를 챙겨서 돌아오는 선원(船員)이라기보다는, 고향에 눌러앉아 생업을 유지하며 마을의 신비한 전설과 너절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농부(農夫)에 가깝다. 김종광은 이야기를 경작하는 농부이다. 문학상 심사를 위해 한 번 더 읽어야 할 이유를, 굳이 다른 곳에서 찾을 필요가 있을까. 농촌에서 살면서 농촌 이야기를 경작하고 있는 농부라면, 한 번 더 만날 볼 이유로는 충분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