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은 봄과 가을, 각각 2주 동안만 열리던 비밀스러운 공간이었다. 벚꽃이 피는 4월, 밤이 낮보다 길어지는 10월이 되면 그 안에서 기다리는 고미술품을 감상하러 관람객들이 골목길을 휘감아 줄을 서곤 했다. 백공작이 푸드덕 날개를 펴는 새장 앞에 다다르면 곧 입장이었다. 어떤 날은 2시간씩 줄을 서야 하기도 했지만, 국보급 문화유산을 그것도 무료로 볼 수 있기에 불만을 가질 생각을 미처 못 했던 기억이 있다. 서울 성북동에 있는 간송미술관 얘기다.

공사를 거치고 재개관한 간송미술관. /사진=간송미술문화재단


10년 만에 다시 열린 정기 전시

간송미술관은 2014년 추사정화전을 마지막으로 정기 전시를 열지 않았다. 그렇게 닫혀 있던 문이 10년 만에 열렸다. 지난 5월 1일부터 6월 16일까지 ‘보화각 1938: 간송미술관 재개관전’을 열었다. 닫혀 있던 기간 동안 미술관엔 큰 변화가 있었다. 건물 내외부를 보수하고 수장고를 새로 지었다. 2022년 10월부터 1년 7개월 동안 이어진 대공사였다.

지난 5월 30일 간송미술관을 찾았다. 정문에서 미술관까지 가는 길이 조금 달라졌다. 정원이 있던 곳에 수장고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경사를 얼마쯤 오르자 새하얀 미술관 건물이 나타났다. 보화각(葆華閣)이다.

골동에 관심이 없어도 간송 전형필(全鎣弼·1906~1962년)이라는 이름은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간송은 서울 종로 거부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손이 귀한 가문인 데다, 간송이 성년이 되자 할아버지며 형까지 손위 어른들이 차례로 돌아가셨다. 20대의 그가 소유하게 된 재산은 대단했다. 서울과 경기도·황해도·충청도 곳곳에 있는 논밭만 해도 800만 평(4만 마지기, 2640만㎡)이었다. 여기에서 나오는 쌀이 매해 200만 석(2880만㎏)이었다고 한다. 요즘으로 치면 재벌이었던 셈이다.

막대한 재력을 이용해 무얼 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그가 문화재 수집가의 길로 본격적으로 들어선 데에는 위창 오세창(1864~1953년) 선생과의 만남이 결정적이었다. 위창은 3·1 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삼국 시대부터 조선조까지 우리나라에서 활동한 서화가들을 총망라한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을 집필한 서화의 대가였다.

위창과의 첫 만남에서 전형필은 고서화를 두고 ‘우리 문화의 자존심이기에 수집한다’고 말했다. 이런 전형필이 퍽 마음에 들었던지 위창은 ‘간송(澗松)’이란 호를 지어준다. ‘산골짜기에서 흐르는 맑은 물과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란 뜻이다.

이후 간송은 그의 호처럼 살았다. 가뭄 속의 단비처럼 예술가와 학자들을 후원하고, 태풍 속 촛불과도 같았던 한민족의 문화유산 위에 숨어 있을 그늘을 드리워줬다. 일제강점기 내내 곳곳에 흩어져 있는 우리 문화유산을 사들여 보관하고, 일본으로 유출된 문화재를 되찾아왔다. 그가 남긴 수만 점의 컬렉션 중에는 국보가 12점, 보물은 32점이 있다.

2011년 10월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 가을 정기전 ‘풍속인물화대전’을 찾은 관람객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조선DB


최초의 사립 박물관

간송의 또 다른 위대한 업적은 사립 박물관 설립이다. 골동을 수집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박물관을 지어 전시와 연구를 독려했다. 일제 시대 플레장이란 프랑스 출신 석유상이 성북동 초입에 프랑스식 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1933년부터 간송은 그 터와 주변 땅을 사들인다. 그러곤 건축가 박길룡(朴吉龍·1898~1943년)에게 설계를 맡긴다. 경성의 화신백화점을 설계한 우리나라의 1세대 근대 건축가다. 1938년 준공됐다. 콘크리트가 귀하던 시절이라 뼈대만 콘크리트로 짓고 나머지 부분엔 벽돌을 사용했다. 상량식에서 위창은 완성된 건물에 보화각이라는 이름을 선사했다. ‘빛나는 보물을 모아둔 집’이라는 뜻이다.

보화각으로 들어갔다. 1층 전시 공간에는 보화각의 역사가 숨어 있다. 보안상 비밀로 했지만, 사실 그곳엔 숨겨진 수장고가 있었다. 이번에 보수 공사를 하며 수장고 공간을 튼 덕에 1층 전시 공간이 늘어났다.


‘속이는 줄 알고 사야 진짜를 산다’

1층을 둘러보고 2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엔 간송의 생전 집무실이 복원되어 있었다. 이전엔 최완수 간송미술연구소 소장을 비롯한 ‘간송학파’의 연구실이었던 공간이다. 아담한 크기의 집무실 겸 응접실엔 온실로 설계된 선룸이 딸려 있었다. 집무실에서는 전인건(55·全寅建) 간송미술관 관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간송의 손자다. 아버지 전성우 전 관장의 뒤를 이어 미술관을 맡고 있다. 그와 함께 2층 전시실을 둘러봤다.

일기대장이 눈에 띄었다. 간송이 골동을 사들이며 품목과 가격을 기록한 일기다. 1936년부터 1938년 사이에 작성됐다. 일기대장을 들여다보며 전 관장에게 물었다. “간송이 속아서 산 적은 없을까요” 전 관장의 답은 흥미로웠다.

“삼성의 호암 이병철(1910~1987년) 회장님이 호암 컬렉션을 모을 때 고고학자 삼불 김원룡(金元龍·1922~1993년) 선생이 많이 도왔어요. 호암이 삼불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해요. ‘간송은 거간들이 대여섯 개를 가져와 한 번에 팔려 하는데, 그중에 수준이 떨어지는 것이나 가품이 있어도 그냥 사셨다고 한다. 가품인 줄 알면서도 산다는 걸 거간들이 알면, 나중에 진짜 좋은 게 나오면 무조건 가장 먼저 가져온다고 말씀하시면서 말이다. 그래서 나도 그리한다.’”

간송의 이런 혜안 덕에 세상의 빛을 본 게 바로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간송의 혜안이 빛을 발해 들어온 경우다. 흔히 ‘간송본’이라 불리는 이 《훈민정음》 해례본은 본래 안동에 있는 광산김씨 종택인 긍구당에 보관되어 있었다. 광산김씨 집안의 사위였던 이용준이 가지고 나와 김태준을 통해 간송에게 팔았다. 김태준은 매매가로 1000원을 요구했는데 간송은 1000원은 수고비로 주고 매매가로 1만원을 주었다. 당시 경성의 기와집 한 채가 1000원쯤이었던 시절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서울 아파트 11채 값을 주고 해례본을 구입했단 얘기다.

간송은 해례본의 존재를 철저히 숨겼다. 1940년대 당시 일제는 조선어 교육을 금지하고 창씨개명을 실시했다. 그때 우리 문화의 정수인 해례본의 존재를 만약 총독부가 알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일본 황실의 유물 창고인 쇼소인(正倉院·정창원) 깊숙이 숨겨졌을지 모른다.

간송은 해방 후 학자들에게 해례본의 존재를 알렸다. 한국 전쟁 당시 피란을 가면서도 해례본을 품고 다녔다. 잘 때는 베개 속에 넣고 지켰다. 1956년엔 영인본을 만들어 연구에 활용하도록 했다.

1934년 공사를 시작해 한창 공사 중인 보화각. /사진=간송미술문화재단


신보 기조와 개스비

이런 간송을 도운 일본인이 있다. 거간꾼 신보 기조(新保喜三)다. 간송이 귀한 고려청자나 백자 등 도자들을 수집하는 데 신보 기조가 큰 역할을 했다. 당시 조선의 거간꾼들은 도자에는 손을 대지 못했다. 서화와 비교해 도자의 매매가가 컸기 때문이다. 신보 기조는 조선 땅에 남아 있어야 하는, 일본에서 찾아와야 하는 귀중한 유물이 나오면 가장 먼저 간송을 찾아갔다. 신보는 경성미술구락부 경매에 참여해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을 간송 대신 낙찰받았다. 역시 조선 도자를 수집하고 있던 일본의 거상 야마나카를 물리치고 경성미술구락부 설립 이래 최고가인 1만4580원을 내고 찾아왔다. 경성미술구락부는 일본인과 극소수의 조선인만 출입할 수 있는 회원제 클럽으로 운영돼, 간송이 직접 경매에 참여할 수 없었던 탓이다. 전 관장에게 물었다.

― 신보 기조의 후손과 연락을 하고 있나요

“아버님 때까진 교류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끊겼습니다. 그러고 보면 존 개스비(Gadsby)의 후손과도 연락이 닿았으면 좋겠다 싶어요. 청자 두 점을 뺀 자신의 모든 컬렉션을 간송에게 넘겼는데, 그 청자 두 점은 어떻게 됐을까 궁금해요.”

변호사였던 영국인 존 개스비는 일본 여성과 결혼해 일본에서 살며 고려청자를 수집했다. 그는 자신이 가진 것 중 수준이 덜한 청자를 팔아 수준이 높은 청자를 사는 식으로 소장품의 질을 높이며 수집하는 수집가였다. 1937년 정세의 불안함을 느낀 개스비는 영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이에 그동안 모은 명품 청자 22점을 처분하기로 한다. 일본으로 건너간 간송은 개스비에게 35만원을 제안하고, 개스비는 55만원을 제시한다. 협상 끝에 타결된 금액은 40만원. 금액을 깎아주며 개스비는 22점 중 고려청자양각모란문잔 1점과 고려청자향합 1점을 기념으로 갖겠다고 했다. 간송은 40만원을 마련하기 위해 공주의 논 1만 마지기를 처분했다. 이때 일본에서 조선으로 건너온 청자 20점 중 7점이 훗날 국보 또는 보물로 지정된다.

1938년 보화각 개관을 기념하며 찍은 사진. 앞줄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간송 전형필이다. /사진=간송미술문화재단


보성중고 운영

소년들의 목소리가 전시실에 울려 퍼졌다. 단체 관람 온 보성고등학교 학생들이었다. 보성학교는 간송의 또 다른 ‘문화보국’이었다. 일제강점기 최초의 민족사학이었던 보성학교가 재정난으로 폐교 위기에 빠졌다. 그러자 간송이 인수했다. 지금의 보성중고다. 여전히 간송의 후손들이 운영 중이다.

당시 보성학교엔 기억할 만한 또 한 명의 일본인이 있었다. 고마쓰사키 긴지로(小松崎金次郞) 선생이다. 전 관장의 설명이다.

“1940년대에 들어서면 조선의 주요한 고등학교의 교장들이 다 일본인으로 교체되기 시작합니다. 몰래 조선의 역사를 교육한다는 걸 총독부도 아니까 아예 교장들을 바꾼 거죠. 그런데 보성학교의 역사엔 일본인 교장이 단 한 명도 없어요. 고마쓰사키 긴지로라는 선생님 때문이었어요. 일본어 교사였는데, 이분이 일본 교육계에서 굉장한 원로였습니다. 간송의 교육 철학과 조선 문화에 매료되어 총독부의 압력을 나서서 막아주셨어요. 총독부에 가서 ‘내가 이 학교에 있는데 무슨 일본인 교장이 필요하냐’고 하니 총독부도 밀어붙이지 못한 거죠.”

간송과 그의 가족들은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고마쓰사키 등 일본인들과의 친분이 영향을 미쳤는지도 모른다. 여기에 바깥에 비친 그의 이미지도 큰 역할을 했다. 간송은 ‘돈은 많은데 골동품에 미친 사람’으로 인식됐다. 총독부로서는 당시 그의 골동 수집이 실은 은밀한 문화보국 행위였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을 터다.

간송이 이렇게 모은 문화재가 위험에 처한 적이 있다. 한국 전쟁이다. 1950년 6월 25일 38선을 넘어와 단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 중 일군이 보화각으로 달려왔다. 그들은 문화재를 평양으로 가져가기 위해 서예가 소전 손재형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일하던 혜곡 최순우를 불렀다. 포장을 하라고 명령했다. 첫날 저녁 이들이 보화각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우며 한숨을 쉬고 있는데 근처에 숨어 있던 간송이 나타났다. 간송은 표구를 위해 쓰이던 한옥에 숨어 있었다고 한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보자. 시간을 끌다 보면 기회가 오지 않겠나’ 세 사람은 결론을 내렸다.

훈민정음 해례본, 청자상감운학문매병 등 수많은 문화재를 수집해 후세에 전한 간송 전형필. /사진=간송미술문화재단


계단에서 구르며 북송 저지

이때부터 소전과 혜곡은 별별 요구를 하며 시간을 끌기 시작한다. 귀중한 문화재를 포장하기 위해 특정 종류의 목재 등 포장재를 구해야 한다며 말이다. 포장을 한 다음 몰래 다시 풀어놓기도 했다. 애주가였던 간송이 지하에 보관하고 있던 ‘화이트호스’ 양주를 인민군들에게 먹이기도 했다. 하루라도 더 시간을 끌기 위해서였다. 급기야 소전은 일부러 계단에서 구르기까지 했다. 다리를 다쳤다며 포장을 중단하기 위해서였다. 마음이 급해진 인민군들은 결국 ‘며칠 안에 마치지 않으면 당신들을 다 죽이고 우리가 포장해 가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날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했다.

한숨 돌린 보화각의 보물들은 중공군이 밀려 내려오자 또다시 위기에 빠진다. 1·4 후퇴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던 유물들을 부산으로 옮기기 위해 특별 열차를 편성한다. 간송에게도 그 열차 중 한량이 할당됐다. 하지만 간송의 소장품 중 10분의 1도 실을 수 없었다. 간송의 어린 아들들까지 나서 열차로 문화재들을 옮겼다. 싣지 못한 문화재는 보화각과 그 주변에 숨겨놓았다. 서책들은 보성학교 도서관 서고에 넣고 문을 잠가버렸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기차로 일주일 남짓 걸렸다. 석탄이 떨어지면 멈추고, 군용 열차가 오면 옆으로 비켜주며 움직인 탓이다. 그런데 부산에 도착해보니 기막힌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간송이 서울에 두고 온 골동들이 시장에서 팔리고 있었다. 오래된 서책들은 연료로 쓰이기도 했다. 이때 분실한 걸로 추정되는 서책 중 일부는 대학 박물관들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해당 박물관에서 간송 측에 돌려준 경우도 있다.

간송미술관에서 '보화각 1938, 간송미술관 재개관전'이 열렸다. 1층 전시실에 간송미술관 건물의 청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조선DB


급성 신우염으로 세상 떠난 간송

전 관장과 함께 보화각 3층, 옥상으로 올라갔다. 루프톱 식으로 난간 너머 조망이 가능한 공간이다. 성북동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전 관장은 할아버지가 지은 이곳에서 태어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발자국을 바라보며 평생을 살아왔다. 궁금했다.

― 유물을 관리하는 일 말고 다른 걸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나요

“저희 집안엔 가훈이 없습니다. 간송도, 돌아가신 아버님도 자식들에게 무엇을 해라, 무엇이 돼라 말씀하신 적이 없어요. 아버님은 원래 화가를 꿈꾸셨어요. 1953년 미국으로 건너가서 화가로 활동을 했습니다.”

간송의 차남 전성우(全晟雨) 전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장 얘기다. 1953년 서울대 조소과에 입학한 전성우는 곧장 미국 유학을 떠난다.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샌프란시스코 아트인스티튜트에서 공부한다. 4학년 때 볼즈갤러리(Bolls Gallery)와 전속계약을 맺으며 미국에서 주목받는 화가로 활동했다. 휘트니미술관이 신진 작가를 발탁하는 ‘영 아메리카(Young America)’ 전시 작가로 3회 연속 선정되기도 했다. ‘영 아메리카’는 지금은 휘트니 비엔날레로 불린다. 전성우의 작품은 지금도 휘트니미술관과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SFMOMA)에 소장되어 있다.

그러던 그가 1962년 화가의 길에서 걸어 나와 한국으로 귀국한다. 아버지 간송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급성 신우염. 간송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지 못했으리라. 스스로 걸어서 전철 타고 지금의 국립의료원 자리에 있던 스웨덴병원으로 진료를 보러 갈 때는 병세가 중하지 않았다. 그러다 한 달 만에 악화되어 그리됐다.

― 간송은 유언이나 유서를 남겼나요

“남길 상황도 아니었고 그런 걸 남길 성품도 아니셨어요. MBTI로 따지면 극 I(내향형)지요. 해방 후 미스코리아대회가 처음 생겼을 때 할아버님께 심사위원을 맡아달라고 간곡하게 부탁이 들어왔답니다. ‘간송 선생만큼 한국의 미에 대해 이해하는 사람이 누가 있나. 나와야 된다.’ 그런데 간송은 그런 자리에 나간다는 걸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분이었거든요. 왜 맡으면 안 되는지 10장짜리 편지를 써놓고 2주 동안 숨어 있으셨대요.”


얼리어댑터였던 간송

― 간송이 갑자기 돌아가셨으니 유산 정리 문제가 복잡했겠군요.

“당시 주요한 수입원 중 하나가 종로에 있는 상가들이었어요. 전쟁이 끝나고 인플레이션이 심하고 하니, 상가들에서 힘들다며 임차료를 내지 않고 있었어요. 워낙 성품이 그러시니 그러라고 두고 있었지요. 기본적으로 사업가셨으니 간송 머릿속에서는 재정 상황이 그려져 있었겠지만, 돌아가시는 순간 그게 사라진 겁니다. 그럴 경우 으레 등장하는 이야기들이 있잖아요.”

― 어떤 얘기들이지요

“없었던 빚이 생기고, 돈을 빌려준 사람은 나 몰라라 하고, 믿고 자산 관리를 맡겨놓았던 분들이 알고 보니 엉뚱한 짓을 해놓고요. 결국 종묘 건너편에 있던 집안 대대로 살아온 99칸짜리 주택을 매각해 정리를 했습니다. 할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아버님은 미국에 계셨고 숙부께서는 대학교 2학년이었잖아요. 고생을 많이 하셨지요.”

간송 가문의 재력 중 하나였던 서울과 경기도, 충청도 등지의 농지는 문화재를 구입하고 보성학교를 인수하는 데 쓰였다. 해방 후 남아 있던 토지도 농지개혁으로 대부분 잃어버렸다.

가장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 남은 유산을 가지고 친인척간에 분쟁이 일어나기도 한다. 간송의 집안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전 관장의 설명이다.

“저희 집안이 손이 귀해 분쟁을 할 사람이 없기도 했고, 집안 분위기도 무척 화목했어요. 간송께서는 상당한 ‘얼리어댑터’였어요. 아버님이 미국으로 건너가시자 RCA에서 나온 릴테이프 녹음기를 구입하셨어요. 거기에 가족들의 목소리를 녹음해 아버님에게 보내셨지요. 그 릴테이프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 뭐가 녹음되어 있나요

“만리 타향에 있는 아들(전성우)을 위로하기 위해 온 가족이 모여서 양금(洋琴)도 치고 하모니카도 불면서 노래를 불러요. 간송도 노래를 하시고요. 들어보면 정말 사랑이 느껴집니다. 간송은 무척 다정한 아버지였어요. 자식들에게 매질은커녕 거친 말 한마디 안 하셨으니까요.”

전인건 간송미술관 관장. 간송의 손자다. /사진=간송미술문화재단


국보를 경매에 내놓은 이유

2018년 전성우 이사장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2년 후인 2020년 5월 간송미술관은 논란에 휩싸인다. 소장하고 있던 보물 제284호 금동여래입상과 285호 금동보살입상을 케이옥션을 통해 경매에 올린 탓이다. ‘간송이 지킨 국보를 후손이 파는 거냐’며 비판이 쏟아졌다. 전 관장에게 물었다.

― 그때 왜 경매로 내놓은 겁니까.

“아버님이 돌아가신 2018년 당시 정부에서 대출을 굉장히 조였어요. 간송미술문화재단을 설립하고 운영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적자의 일부를 아버님 개인 명의의 대출로 메웠는데,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대환이 안 되는 겁니다. 대출을 물려받는 게 안 되는 거예요. 갑자기 정리해야 하는 비용이 늘어난 겁니다. 저희가 모기업이 있는 곳도 아니고, 사업하는 집안도 아니잖아요. 그러니 방법이 없었어요. 간송미술관의 문을 닫든지, 어떻게든 융통을 해서 끌고 가든지 선택의 기로였지요.”

― 그랬군요.

“간송의 주요 소장품은 서화와 서책, 도자기입니다. 그 외에 불교 유물이 4점 있었어요. 그에 대한 연구는 사실 저희가 많이 하지 않았고 하니, 불교 유물 4점을 구조조정해 다른 유물들을 지키자고 결론 내린 거죠. 실제로 외국의 사립 미술관에서 종종 그렇게 합니다.”

― 굳이 경매에 내놓아야 했나요? 다른 방법은 없었나요

“자세한 뒷얘기를 밝히긴 힘들지만, 저희에게 유일한 선택지가 옥션 회사였어요. 다른 길을 열심히 찾아봤지만 결국 찾을 수 없었습니다. 2020년 옥션에 내놓을 수밖에 없었지요. 경매 회사에서 선급금을 미리 받아서 대출 대환 등을 해결했기 때문에 저희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미술관 2층에 복원한 간송의 집무실과 응접실. /조선DB


2022년에 또 내놓은 이유

그렇게 경매에 나온 보물 두 점은 결국 국립중앙박물관의 품으로 옮겨졌다. 2년 후인 2022년 다시 간송의 국보 두 점이 케이옥션 경매장에 등장했다. 왜 또 경매에 내놨을까. 전 관장의 설명이 궁금했다.

“사실 2022년엔 재정적으로 경매에 내놓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어요. 어떻게든 빚을 줄여가고 있던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옥션 회사와 이미 맺어놓은 계약이 있잖아요. 계약을 변경하려면 큰 액수의 위약금을 지불해야 했어요. 하지만 저희에겐 그럴 능력이 없어 어쩔 수 없었어요.”

이때 출품된 것이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癸未銘金銅三尊佛立像)과 금동삼존불감(佛龕)이다. 둘 다 국보다. 경매 소동은 의외의 결말로 귀결됐다. 경매가 유찰된 후, ‘헤리티지 다오(DAO)’라는 일종의 블록체인 투자자 모임이 나타났다. 금동삼존불감을 위해 만들어진 모임이었다. 이들은 금동삼존불감을 25억원에 구입한 후 유물의 지분 51%를 간송미술문화재단에 기탁했다. 유물을 간송미술관이 영구 보존하는 조건이었다.

― 헤리티지 다오에서는 그 후로 연락이 없나요

“기탁 이후에 몇 번의 행사가 있었고, 최근 들어서는 연락이 없습니다. 저희가 지분의 51%를 갖고 있으니 전시 등 운용에 크게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 왜 이런 사정을 당시에는 안 밝혔나요? 개인적인 이득 때문에 두 번이나 경매에 내놨다는 오해를 받았는데요.

“당시엔 외부에 이런 얘기를 하지 말고 침묵하자는 분위기였습니다. 제게 돈 버는 재주가 있었다면 그런 고육지책은 택하지 않았을 텐데 당시 그런 재주가 많이 부족했네요.”

간송미술관은 오는 9월 새로운 시기를 맞는다. 대구시가 짓고 간송문화재단이 위탁 운영하는 형태로 대구간송미술관이 개관한다. 간송의 유물들을 대구에서도 만날 수 있게 된다. 개관을 맞아 《훈민정음》 해례본이 대구를 찾을 예정이다. 해례본으로서는 일종의 친정 나들이인 셈이다. 발견된 곳(안동)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전시가 열리니 말이다. 재단장한 보화각과 대구에서 간송의 문화보국은 어떤 식으로 이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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