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니얼 대 김은 “촬영 시간 외엔 한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맛집을 탐방하고 있다”고 했다. 부산 출신인 그는 “경상도에 가면 어릴 때 자주 들었던 사투리가 들려서 마음이 따뜻해진다. 사투리는 통역사보다 더 잘 알아들을 때도 있다”며 웃었다. /Tyler Miles

스티븐 연과 산드라 오 이전에 대니얼 대 김(56)이 있었다. 미국 드라마 ‘로스트’에 출연하며 이름을 알린 한국계 배우 대니얼 대 김은 당시 주간지 피플이 선정한 섹시 스타 톱10에 뽑히는 등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바꿔놓았다. 2017년 제작자로 참여해 리메이크한 한국 드라마 ‘굿 닥터’는 미국에서 흥행 돌풍을 일으키며 시즌7까지 이어졌다. 한국 드라마가 미국에서 시즌제로 이어진 것은 처음이었다.

이번엔 한국에서 미국 드라마를 제작한다. OTT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의 신작인 ‘버터플라이’는 한국에 사는 전직 미국 정보 요원 데이비드(대니얼 대 김)가 자신을 살해하려는 세력에 쫓기는 첩보 스릴러. 국내에서 촬영한 해외 드라마 중 역대 최장 기간, 최대 제작비를 투입했다. 6개월간 서울·안동·부산 등을 오가며 촬영 중인 그를 화상으로 만났다. 그는 “촬영 첫날 제작진 앞에서 ‘내 꿈을 이루게 해줘서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한국과 미국 문화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은 내 평생의 목표였다”고 했다.

-최근 서울시 명예시민증을 받으면서 “침대맡에 태극기를 붙이고 살던 소년에게는 엄청난 일”이라고 했다.

“어렸을 때부터 태극기가 ‘쿨한(멋진)’ 국기라고 생각했다. 10년 가까이 침대맡에 태극기를 걸어놓았다. 부모님은 항상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을 심어주셨다. 한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회복력이 강한 민족이다. 식민 지배와 전쟁 등 수많은 고통을 겪고도 다시 일어섰고, 그런 나라가 내 모국이라는 게 늘 자랑스러웠다.”

-어린 시절엔 미국 TV나 영화에서 아시아계 배우를 보기 어려웠을 텐데, 언제부터 배우를 꿈꿨나.

“어렸을 땐 상상도 못 했다. 당시엔 배우가 명예로운 직업이 아니었고, 부모님은 의사나 변호사가 되길 바라셨다. 대학에 가서 배우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돈 한 푼 없이 작은 배역이라도 구하러 다니며 힘든 시절을 보냈다. 그때는 어리고 순진해서 미국에선 무엇이든 이뤄낼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을 믿었다.”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의 신작 '버터플라이'는 배우 김태희의 할리우드 진출작으로도 기대를 모으고 있으며, 박해수·김지훈·성동일·이일화가 함께 출연한다. 사진은 왼쪽부터 배우 겸 감독 키타오 사쿠라이, 김태희, 대니얼 대 김. /대니얼 대 김 인스타그램

-‘로스트’에서 맡은 배역 ‘곽진수’는 시즌1에 죽을 수도 있었다던데, 어떻게 제작진을 설득해 생존했나.

“어느 일터에서든 정치가 존재한다. 드라마 현장에서도 사람들과 잘 어울려야 하고, 때로는 내 캐릭터를 위해 싸울 수도 있어야 한다. 작가, 감독에게 ‘이 캐릭터는 더 탐구할 것이 많고, 아직 발견하지 못한 면이 많다’고 끊임없이 말했다. 마치 상사에게 승진을 부탁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다. 실력이 없으면 요구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정말 열심히 일했다.”

-한국에선 곽진수가 골프장에서 분노를 터뜨리는 10분짜리 독백 장면이 화제가 됐다.

“그 대사들은 전부 영어로 대본에 적혀 있었고, 하와이에 있는 번역가와 같이 한국어로 번역했다. 당시엔 한국인 캐릭터가 비중 있는 역할로 나온 적이 없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자랑스러워해 주길 바랐다. 방영이 되고 나서 한국인들이 제 서툰 한국어를 놀렸을 때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곽진수를 잘못 발음해 붙게 된 ‘꽈찌쭈’라는 별명도 서운한가.

“처음 들었을 땐 상처가 됐지만, 이젠 받아들이게 됐다. 모욕적인 뜻이 아니라 애정 어린 별명이라고 친구들이 말해주더라. 나한텐 제2외국어였고 다른 배우보다 두세 배는 더 연습했기 때문에 돌이켜봐도 후회는 없다. 그 고충을 알기 때문에 지금 같이 연기하는 김태희, 김지훈씨한테도 영어가 필요하면 언제든 돕겠다고 했다.”

대니얼 대 김(왼쪽)이 제작자 겸 배우로 참여한 미국 드라마 ‘굿 닥터’. 한국 드라마가 원작으로 시즌7까지 이어졌다. /ABC

2010년부터 드라마 ‘하와이 파이브 오’에 출연해온 그는 백인 배우와의 임금 차별에 항의하며 하차하는 등 아시아계 배우의 권익을 위해 목소리를 높여왔다. 코로나 이후 아시아계를 겨냥한 혐오 범죄가 늘자 폭행범을 잡기 위한 현상금을 내걸고, 미국 내 인종 차별을 알리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그는 “부모님 또래의 어르신들이 단지 외모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공격을 당했다. 누구도 우리를 대변해주지 않기 때문에 이름이 알려진 배우일수록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믿는다”고 했다.

-최근 들어 할리우드에서도 다양성에 대한 논의가 늘어났다.

“로스트가 처음 방영된 20년 전과 비교하면 정말 많이 변했다. 지금 촬영 중인 ‘버터플라이’도 10년 전이라면 만들어질 수 없을 것이다. 한국에 대한 관심도 없었고, 미국 제작사에서 믿고 주연을 맡길 만한 아시아계 배우도 없었으니까. 지금까지 변해왔듯, 앞으로 20년 뒤를 위해서 입체적이고 흥미로운 캐릭터를 더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작자로서는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만들고 싶나.

“‘버터플라이’는 교포에 대한 이야기다. 한국으로 돌아온 한국계 미국인이 새로운 한국 가족을 만나게 된다. 내 주변엔 많은데 한국인과 결혼한 교포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나 영화는 본 적이 없다. 아직도 한국과 미국 사이에서 그려내고 싶은 이야기가 많이 남아있다.”

☞대니얼 대 김(56)

부산 출신으로 2세 때 미국에 이민해 할리우드에서 배우로 활동해왔다. 2004년 드라마 ‘로스트’에서 김윤진과 부부로 출연하며 국내에도 잘 알려졌다. 2017년 한국 드라마 ‘굿 닥터’를 미국판으로 리메이크해 흥행에 성공하며 제작자로도 활약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