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조선일보 문화부 신정선 기자입니다. ‘그 영화 어때’ 78번째 레터는 31일 개봉하는 조정석 주연 영화 ‘파일럿’입니다. “배급사 롯데에서 자신 있어 한다”는 소문이 일찌감치 돌았던 영화죠. 시사회는 지난 14일이었는데요, 달려가서 봤습니다, 봤고요. 제 의견은 뒷부분에 말씀드리기로 하고~ 먼저 챗GPT, 그중에서도 유료(!) 챗GPT에게 물어봤습니다. “조정석 영화 ‘파일럿’ 재밌어?” 과연, 당장이라도 세상을 삼킬 것처럼 연일 언론에 대서특필되는 인공지능은 어떤 답을 내놨을까요. 녀석의 심도 깊은 분석에 기자도 평론가도 직업을 잃을 위기인 걸까요. 이제 관객은 챗GPT와 대화하면 영화의 전모를 척척 파악할 수 있게 된 걸까요. 거금 22달러를 지불하고 얻은 답변을 레터 독자분들께 소상하게 공개합니다.

배우 조정석이 26일 오전 서울 광진구 롯데시네마 건대입구에서 열린 영화 ‘파일럿’ 제작보고회에 참석해 생각에 잠겨 있다. 영화 ‘파일럿’은 스타 파일럿에서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된 한정우(조정석 분)가 파격 변신 이후 재취업에 성공하며 벌어지는 코미디물로 오는 7월 31일 개봉 예정이다. /뉴스1

저는 챗GPT를 비교적 일찍 써봤습니다. 재작년이던가, 소문 돌기 무섭게 가입해서 이것저것 물어봤는데요, 답변이 너무 유치하고 단편적이어서 크게 실망했습니다. 연극 영화 뮤지컬 미술 음악 문학 등등 돌아가며 여러가지 다 물어봤는데 어느 하나 제대로 된 답변이 없더군요. “이게 인공지능?” 녀석의 본토 언어인 영어로 물었는데도요. 곧바로 흥미를 잃었습니다. 그 후로 여기저기 나오는 기사를 보니 그새 엄청 나아졌나 궁금하기도 하고, 저희 신문사에서 월 구독료의 절반을 지원해준다고 해서 혹시나 하는 맘에 이번에 결제해봤습니다. 월 이용료는 부가세 포함 22달러.

챗GPT에게 답변을 잘 얻으려면 질문이 중요하다고 해서, 어떤 영화를 물어볼까 하다가 최신작인 ‘파일럿’을 골랐습니다. 포털사이트에 검색하면 이미 상당수 기사가 검색됩니다. 내용은 대동소이합니다. 배급사의 보도자료가 거의 그대로 실린 경우도 있고, 시사회 리뷰는 몇 건 정도. “그러니까, 챗GPT가 이런 것들을 긁어모아서 분석해서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는 것인가.” 궁금증을 풀기 위해 간단한 질문부터. 아래 캡처 파일 보시죠.

챗GPT야, 이게 최선이니?

답변을 긁어오려다 캡처 파일로 보여드립니다. “조정석 영화 ‘파일럿’ 재밌어?”라고 물으니 사이트 5곳에서 얻었다는 정보를 나열해서 보여줍니다. 하. “이러려고 내가 22달러를?” 기대했던 ‘심도 깊은' 답변이 나오지 않아 다시 물었습니다. 아래 캡처 파일 보시죠.

"심도 깊은 답변을 달라"고 했더니 뇌정지 온 챗GPT.

“심도 깊은 분석을 달라”고 했더니 곧바로 두뇌가 정지된 챗GPT. 저, 정말로 빵터졌습니다. 아니, 이럴 거면서 뭘 그렇게 잘난척 했니. 그래도 한번 더 기회를 줘봐야겠죠? 똑같은 질문을 다시 던졌더니 심기일전한 녀석, 이번엔 다른 방식을 시도합니다. 아래 보시겠습니다.

챗GPT의 절치부심 답변. 그런데 여기에도 구멍이 있으니...

한번 뇌정지가 왔던 챗GPT가 절치부심 다시 시도한 것은 체계적인 구조에 따른 답변 재배치입니다. 답변을 긁어온 소스는 동일한데, 이걸 그럴싸한 트리 구조로 보여주면서 뭔가 있어보이려고 합니다. 제목을 ‘영화 ‘파일럿’에 대한 심층 분석'으로 달고 ‘줄거리 및 설정-캐릭터 분석-테마 및 메시지-연출 및 제작-관객 반응 및 평가-결론' 이렇게 나눠서 보여주는데요, 소스가 동일하다보니 사실 내용상으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걸 뒤집어 말하자면, 동일한 (별거 없는) 내용이라도 체계적으로 분류해서 보여줄 수 있다는 거죠. 소스가 5군데뿐인 ‘파일럿’의 경우는 차라리 제가 원소스를 읽어버리는게 빠르겠지만, 소스가 500군데, 5000군데가 되면 완전히 다른 얘기가 되겠습니다. 즉, 대량의 데이터를 짧은 시간에 분류·분석해야할 때는 도움을 받을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오호라, 너가 질은 안 되지만 양은 확실히 되겠구나. 그리고 어느 지점을 넘어가면 그 양이 담보하는 질도 가능하겠구나. 그럼, 녀석이 자체 분석을 통해 전망까지 내놓을 수 있을까요. “‘파일럿'이 손익분기점을 달성할지 분석해달라”고 했습니다.

또 다시 뇌정지가 온 챗GPT. 물어본 내가 잘못했네.

또 다시 뇌정지가 온 챗GPT. 손익분기점 달성에 대한 자료가 없어 답이 궁했던 걸까요. 이 질문도 재기회를 줬습니다. 그랬더니.

챗GPT가 내놓은 '파일럿' 손익분기점 달성 전망. 엄청 아는 척 하는데 기본 전제부터 오류가 있다보니 결론도 하나마나.

이번 질문도 소스는 동일한 듯한데, 같은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분류해서 결론을 도출(하는 척)합니다. 그런데 얼마 안 되는 데이터로 무리하게 결론을 끌어내다보니 기본 사실관계부터 틀려요. “영화 ‘파일럿’이 손익분기점을 넘기기 위해서는 약 1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해야 합니다”라고 하는데, 100만명 아니고 200만명 이상입니다. 막 지르네요, 이 녀석. 그 뒤에 “초기 리뷰와 조정석의 팬덤, 코미디 장르의 대중성 등을 고려할 때, ‘파일럿’이 손익분기점을 넘길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하지만, 최종 성과는 상영 기간 동안의 관객 수와 경쟁작들의 영향, 그리고 입소문의 확산 정도에 달려 있습니다”라고 하는데 “밥 먹으면 배부르다” 수준이군요. “가능성은 있지만 관객 수를 봐야 안다”니. “공부 잘하면 원하는 대학 갈 수 있다”네요. 이러려고 내가 유료 결제했나 자괴감이.

결국 아직까지도 챗GPT는 긁어다 재조립할 수 있는 원본 데이터(의 양)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수시로 뇌정지가 되는 수준이란 거, 그런데도 모른다는 말을 못 하고(안 하고) 아는 척, 정답인 척 답하는 수준이란 거. 유료 버전도 그렇다는 거가 오늘의 결론이 되겠습니다. 이 역시 듣고보면 당연히 얘기처럼 들리지만, 유료 버전은 혹시나 신통방통한 기술로 다른 차원의 답을 내주려나 했던 기대가 어긋났네요. 자, 그럼, 지극히 평범한 사람 기자인 저의 ‘파일럿’ 감상은 어땠을까요. 한마디로 ‘조정석, 이번에도 날았다!’

뮤지컬 '헤드윅' 2016년 공연 캐스팅. 잘 보시면 조승우, 조정석, 윤도현, 정문석, 변요한이 보이실 겁니다. 누가 누구일까요.

영화 ‘파일럿’을 보며, ‘헤드윅’이 계속 떠올랐습니다. 저는 ‘헤드윅'을 6~7번 봤는데 조승우, 조정석, 송창의, 송용진, 오만석 공연이 기억납니다. 뮤지컬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그쪽 분야에서 조승우는 원탑이었죠. 전체 공연 시장에 미치는 영향력이 영화계에서 조승우가 가진 비중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절대적이었습니다. 조승우 개런티에 맞먹은 배우는 시아준수뿐이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헤드윅’도 예매 오픈하면 조승우 표는 빛과 함께 순삭. 그런데 저는 조정석 버전이 더 좋았어요. 조승우가 못해서가 아니라 조정석 헤드윅(팬들은 뽀드윅이라고 부릅니다. 너무 뽀얗다고요)은 특별했어요. 사랑해보고 싶었고, 살아보고 싶었던, 마침내 모든 걸 던져버리고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길 택했던 헤드윅의 처절한 몸짓에는 조정석만 표현할 수 있는 애잔함이 보였거든요.

영화 ‘파일럿’에서 잘 나가던 항공기 조종사 한정우(조정석)은 하루 아침에 해고되고, 이혼을 당하고, 여자로 변장해서 취업을 합니다. (자세한 줄거리는 말씀드리지 않을게요. 저희 지면에 백수진 기자가 쓰는 기사가 나갈 예정입니다) 이야기가 흘러흘러, 조정석이 “나 진짜 열심히 살았어”라고 한탄하면서 말해요. “결국 아무 것도 지켜낼 수 없었습니다. 제 자신마저도.” 어릴 적 꿈을 지키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살았던 남자는 자신을 버려야 하는 상황에 내몰린 후에야 한동안 잃었던 자신을 다시 찾게 됩니다. ‘파일럿'은 코미디 영화라 ‘헤드윅’과는 다르지만, 조정석이 코믹한 여자 분장이 아니라 원래 모습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장면에서는 어김없이 그만의 애잔함이 배어나옵니다. 저는 그래서 조정석의 코미디가 더 빛난다고 생각해요. 그의 연기엔 웃음과 눈물이 등을 맞대고 울면서 웃거든요.

“나 정말 열심히 살았어”라는 대사는 조정석 자신과도 겹치는 말이라 더 기억에 남네요. 단역 배우로 시작해 오늘의 조정석이 있기까지 그가 정말 ‘열심히' 살았다는 것은 공연계 사람들 사이에 유명한 사실입니다.

‘파일럿’ 보다가 시쳇말로 ‘현웃터진’ 순간이 두 번 있었는데(저의 좌우에 계시던 두 분께 이 자리를 빌어 심심한 사과를) 상황이 웃겨서라기보다는 조정석의 표현(이라 쓰고 얼굴이라 읽는다) 때문에 폭소가 터졌습니다. 다들 조정석 여장을 주로 얘기하는데, 어차피 이 영화에서 조정석은 여자처럼 나오지 않습니다. 누가 봐도 남자고요. 얼마나 여자같으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아닌 줄 알면서 그렇다고 치고 넘어가는 지점을 메우는 배우의 연기력이 관건인데, 그걸 조정석이 해냅니다.

시사회 보고 나와서 친구와 통화를 하다가 말했습니다. “조정석, 심지어 영어 발음도 좋아.” (그가 광고하는 그 교재, 그걸로 영어 공부까지 한 걸까요) 아, 쓰다보니 이젠 저희 메일 발송 시스템에 원고를 앉혀야 하는 마감 시간이 됐네요. 아쉽지만 급마무리, 이만 줄여야겠습니다. 다음 레터에서 뵐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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