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2월20일~21일 부민관에서 열린 최승희 도구고별공연 포스터. 개막 1시간반전에 좌석이 가득차 관객이 더 이상 입장할 수없을 만큼 성황을 이뤘다.

‘입신(入神)의 율동미(律動美)! 만목도취(滿目陶醉)·열광’

1937년 2월20일 경성 도심 한복판 부민관 주변엔 오후 4시부터 군중이 몰렸다. 무용스타 최승희 공연이 열릴 예정이었다. ‘최승희 무용의 첫날 20일의 개막은 밤 7시라는데 4시경부터 몰리는 군중은 5시반경 벌써 부민관이 터질듯이 차고 넘어 만원 패(牌)를 걸고 입장을 거절하지 않을 수없이 되었다. 태평통 넓은 거리 일대에 입장 못한 군중이 수없이 겹겹이 쌓여 경관대까지 출동하여 교통을 정리하는 등 인기는 무서운 것이었다.’(조선일보 1937년2월21일)

◇공연 1시간반 전 만원으로 입장거절

일본에서 활약하던 최승희는 그해 미국·유럽 진출을 앞두고 고별 공연차 경성을 찾았다. 조선일보 후원으로 열린 ‘최승희 도구(渡欧)고별공연’은 2월20일과 21일 두차례 열렸다. 동경 최승희 무용연구소에서 만든 창작 신작으로 구성했다. 타악기 반주의 ‘위력에의 길’로 시작한 공연은 차이콥스키 작품 ‘안단테 칸타빌레’에서 받은 감상적인 기분을 무용화한 ‘마음의 흐름’, 아리랑을 무용화한 ‘아리랑의 리듬’에 이어 민속음악에 맞춰 제자 김민자와 함께 한 ‘조선의 듀엣’으로 피날레를 장식했다.(’만도(滿都)를 뒤집는 인기, 광란의 공연전주곡’, 조선일보 1937년2월19일)

입장료는 2원, 1원50전, 1원이었다. 관객이 많이 몰려 극장 문짝과 기구가 부서져 ‘55원55전의 수선비’가 들 정도였다. 부민관 개관 14개월 만에 가장 많은 관객이 몰린 공연이었을 것이다.(’대경성의 집회상’, 조선일보 1937년3월12일) 보조석을 합해 2000석 짜리 대극장은 최승희 신드롬을 만드는데 기여했다. 최승희는 한해전인 1936년4월3일~4일에도 부민관에서 무용발표회를 가졌다. 1942년2월과 1944년 5월에도 이곳에서 대대적인 공연을 가지면서 비(非)인기장르인 무용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미 군정아래 부민관은 미군전용극장으로 사용됐다. 1949년 미군 철수와 함께 서울시로 넘어왔다./서울역사박물관

◇연극, 무용, 영화 등 다목적 문화공간

1935년12월10일 경성부민의 문화 복지를 내걸고 개관한 부민관은 음악뿐 아니라 연극, 무용, 영화, 가극은 물론 각종 강연회 등 다목적 문화공간이었다. 특히 연극계에선 기껏해야 몇백석짜리 무대에서 2000석짜리 대극장의 등장이 획기적 변화를 가져왔다고 본다. 1931년 창단한 대표적 신극단체인 극예술연구회는 제10회 공연부터 부민관에 올랐다.1936년4월11일~12일 이광래 작, 유치진 연출의 ‘촌선생’(3막),이서향의 ‘어머니’(단막)를 올렸다. 극예술연구회(후신 극연좌 포함)는 이후 4년간 이곳을 주무대로 썼다.

1936년 9월29일~30일 유치진이 각색, 연출을 맡은 연극 ‘춘향전’은 관객 몰이에도 성공했다. 유민영 단국대 명예교수는 ‘극예술연구회는 부민관 때문으로 해서 전문극단을 지향해 보려는 의지까지 보일 수가 있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극예술연구회는 일제 통제로 1938년 3월 극연좌로 이름을 바꿔야했고, 이듬해 5월 강제해산당했다.

극예술연구회 이외에도 중앙무대, 인생극장, 낭만좌, 고협, 황금좌 등 상업극단들이 부민관을 주무대로 삼았고, 동양극장 전속극단인 청춘좌와 호화선까지 부민관 무대에 올랐다. 배구자 악극단, 콜럼비아 악극단, 라미라, 신세계, 조선악극단 등 악극단체 10여개와 조선창극단 등 몇몇 단체까지 부민관을 무대로 썼다. 말그대로 복합공연장으로 활용된 것이다.

1991년부터 서울시의회 본관으로 사용중인 옛 부민관. 내년이면 건립 90주년이 된다. /김기철기자

◇결혼식 ‘핫플’로 급부상…탁구대회도 열려

부민관은 결혼식 핫플로 인기였던 모양이다. 1937년 1월에만 31쌍이 결혼식을 올렸다고 한다.(‘대경성의 집회상’, 조선일보 1937년3월12일) 부민관 결혼소식을 알리는 신문 기사도 자주 등장한다.

스포츠 경기장으로도 쓰였다. 좌석 400석에 입석 1000명까지 들어가는 중강당이 무대였다. 조선체육회는 1936년 10월 개최한 전조선종합경기대회 중 탁구 종목을 이곳에서 열었다.(’신량(新凉)의 호절(好節)마저 스포츠 대(大) 페이젠트’, 조선일보 1936년 9월17일) 부민관 중강당에서 탁구 경기가 열렸다는 보도는 종종 나온다.

◇1940년대 친일어용물 양산

부민관은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후 총독부의 전시(戰時) 예술정책의 주무대가 됐다. 조선연극문화협회 주최로 1942년~1943년 부민관에서 열린 연극경연대회가 대표적이다. ‘국민극 수준을 높이고 각 부분의 연극인들로 하여금 예술가로서의 각자의 역량을 기울여 전시하 반도의 문화전’을 이룬다는 목표를 내건 이 대회는 조선총독부 정보과, 국민총력조선연맹과 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 매일신보가 후원했다. 총력전 체제 아래 불가피한 상황으로 변명할 수있으나 비판을 피하긴 어렵다.

음악계도 마찬가지였다. 국민총력조선연맹(1940) 조선음악협회(1941) 경성후생실내악단(1942) 등 음악인들이 소속된 단체들은 내선일체와 총력전체제를 선전, 홍보하는 데 동원됐다.’음악보국(報國)주간 대연주회’(1941년6월)’국민음악연주회’(1943년2월) ‘전함헌납음악보국의 실내교향악의 밤’(1943년6월) 같은 전시체제하 관제(官製)공연에 당대의 대표적 음악인들이 출연했다. 부민관은 광복 후 문화예술계를 친일(親日)논란에 빠뜨린 오명(汚名)의 현장이 됐다.

◇전문 공연장 발전 막은 다목적 복합문화공간

유민영 교수는 부민관이 다목적 복합공간의 선례로서 부정적 유산을 현재까지 남겼다고 지적한다. 광복후 세종문화회관을 비롯, 전국 지자체마다 들어선 시민회관, 구민회관이 전부 비슷비슷한 다목적 복합문화공간을 지향하면서 클래식 전용홀이나 연극 전문극장이 들어서는 것을 막았다는 것이다. 식민 당국의 후진적 문화정책을 광복 이후 그대로 받아들여 현재까지 이어진다는 비판은 아프다.

◇광복 20일전의 ‘부민관 폭탄의거’

부민관 건립은 ‘식민지 도시사회의 특징이라고 할 지배관계 간, 계층간 그리고 동족간 차별과 갈등, 경쟁으로 분산된 식민지 도시민들을 부민으로 통합할 수 있는 적절한 기제로 고안된 프로젝트’(김순주논문 29쪽)였다. ‘경성부는 부민관 건립을 통해 관민간, 민족간 통합을 향한 메시지를 표방’했다. 광복을 채 한달도 남기기 전인 1945년 7월24일 일어난 부민관 폭탄의거는 일제의 식민통치에 균열을 낸 사건이었다. 대한애국청년당을 결성한 조문기, 유만수, 우동학 등 스무살 안팎의 열혈청년들은 이날 저녁 친일파 거두인 박춘금 일당이 ‘아세아민족분격대회’를 개최한다는 보도를 듣고 의거를 결행했다. 현재 서울시의회 앞에 부민관 폭탄 의거를 알리는 표지석이 설치돼있다.

부민관은 광복 직후 미군정하 미 24군단 극장으로 쓰이다 1949년 미군 철수와 함께 서울시로 반환됐다. 이후 국립극장, 국회의사당, 시민회관, 세종문화회관 별관 등으로 쓰이다 1991년 지방자치제 실시와 함께 서울시의회 본관으로 사용중이다. 90년 가까운 굴곡의 현대사를 수도 한복판에서 지켜본 역사의 증인이다.

◇참고자료

유민영, 예술경영으로 본 극장사론, 태학사, 2017

유민영, 한국근대연극사, 단국대출판부, 1996

이경분, 부민관을 통해 본 경성의 조선양악계: 태평양전쟁 이전까지, 경성의 소리문화와 음악공간, 서울역사편찬원, 2022

김순주, 식민지시대 도시생활의 한 양식으로서의 ‘대극장’-1930년대 경성부민관을 중심으로, 서울학연구 2014 가을, 2014, 8

김호연, 1930년대 서울 주민의 문화수용에 관한 연구-부민관을 중심으로, 서울학연구 15, 2000,9

송방송, 부민관을 통해 본 일제 말기의 음악상황, 진단학보 80,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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