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55주년을 맞은 동인문학상은 독자와 함께 하는 한국문학의 축제입니다. 매달 독회를 통해 추천작을 쌓아올린 뒤 연말에 그 해 수상작을 선정합니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정명교·구효서·이승우·김인숙·김동식)는 최근 서울 종로구 운니동 ‘송죽헌’에서 월례 독회를 열고 최근 출간된 소설을 검토했습니다. 7월 독회 추천작은 김기태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문학동네)와 김희선 장편소설 ‘247의 모든 것’(은행나무)입니다.

/문학동네
/이태경 기자
/은행나무
/은행나무

다음은 독회 심사평 전문.


정명교·문학평론가

정명교 문학평론가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자기애의 진화사를 톺는다

한국소설이 개인들의 사생활을 소비해온 지 꽤 시간이 흘렀다. 이러한 소설적 경향의 득세가 소설에만 국한된 건 아니다. 이는 세계적인 문화 추세의 한 단면을 반영할 뿐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개인주의의 첨예화로서 ‘자기애’의 보편적 확산 현상을 가리킨다. 오늘날 대중 스타들은 자기애를 공공연하게 표방하고 그것을 하나의 사상으로까지 끌어올리는 데서 팬들의 공감을 블루베리를 따 담듯 수확하고 있다.

방탄소년단이 유엔 연설(2017)에서 “진정한 사랑은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발언하고 미국의 팝스타 마일리 사이러스(Miley Cyrus)가 “나는 너보다 더 잘 나를 사랑할 수 있어 / 나는 나 혼자 나를 위해 꽃을 살 수 있어”(「플라우어스」, 2023)라고 외친 것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경향이 요 근래에 폭발한 특별한 21세기적 현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개인이 중심이 되는 사고는 정보화 사회의 대두와 거의 평행적으로 개시되었다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이미 1980년대에 휘트니 휴스턴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The Greatest Love of World)’(1986)에서 “나는 오래전에 어느 누구의 그늘 속에서도 걷지 않겠다고 결심했어 / […] / 나는 가장 위대한 사랑은 내 안에 있다는 걸 알았어 / 너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게 가장 위대한 사랑이야”라고 노래했었다. (이 노래의 원곡이 처음 발표된 건 1977년인데, 미국의 소울 차트와 R&B차트에서 랭킹에 들었으나, 1986년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는, “1986년초 미국, 호주, 캐나다 및 미국의 R&B 차트에서 정상을 차지했다”고 한다. - Wikipedia 참조. 따라서 이 노래의 정서적 반향은 1980년대 중반에 와서 폭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중음악의 차원에서 보자면, 바브라 스트라이샌드가 “하나 된 사랑은 둘이 함께 만든다는 걸/ 나는 너와 함께 찾았어”(「에버그린」, 1976, 이 노래는 ‘빌보드 핫 100 차트’에서 3주간, ‘이지리스닝 차트’에서 6주간 정상을 차지했었다. - Wikipedia)라고 노래했을 때의 정서로부터 근본적인 전회가 불과 10년 사이에 일어난 것이다. 휘트니 휴스턴이 꼭 이런 노래만을 부른 것은 아니지만, 넓은 시야에서 보면, ‘비틀스’가 “왜 나의 기타는 점잖게만 우나”(1968)라고 탄식하거나, 그 멤버였던 존 레넌이 「이매진」(1976)에서 “천국이란 없다고 상상해 봐 / […] / 모든 사람이 모든 세상을 나누는 것을 상상해 봐”라고 호소했던 20세기 중반기 ‘로큰롤 세대’ 혹은 ‘반전세대’의 ‘함께 하는 문화’로부터 ‘나만의 문화’로의 전환이 이즈음에 싹이 돋아났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1980년대는 미국에서는 퍼스널컴퓨터의 제1단계 혁명이 일어나던 때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10년 후 한국에서도 어린이 인권에 대한 요구가, 문화산업의 영역 확장 사업과 맞물리며, 천둥을 치게 되는데, 오늘날 4,50대를 이루는 이 세대가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국민교육헌장」, 1968)를 외우며 자란 전 세대와 결정적인 빗금을 그으며 새로운 사회적 세력으로 자라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절은 한국에도 16비트 퍼스널컴퓨터가 세운상가를 중심으로 양산되기 시작하였고, 처음으로 어린이의 능력이 어른의 능력을 앞지르는 분야가 있다는 걸 알려준 때였다. (그 이전에 ‘큰 이야기’로부터 ‘작은 이야기’로의 전환을 요구했던 준비기가 있었다는 것도 유념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순수 개인의 출현과 개인 중심의 사유는 1990년 전후에서 피어나기 시작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앞의 진술에서 ‘결정적인’이라는 말은 기미가 사실로 정착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혹시 오해가 있을까 봐 덧붙이지만, 이 문화적 전회 자체는 가치평가 대상이 아니다. 앞의 진술을 꼼꼼히 읽은 분들을 금세 알겠지만, 이는 불가피한 변화이다. 그리고 모든 시대와 그 시대의 중심 세대는 저마다 고유한 가능성과 한계를 가진다. 때문에 각 시대의 탄생과 전개에서 나타난 현상들을 ‘전수조사’하는 것도 꼭 필요한 일이고, 시대들 사이의 맥락을 추적하고 상호참조하는 것도 필수적인 일이다.

여하튼 지금의 시점에서 돌이켜 보면, 자기애를 테마로 하는 긴 진화의 역사가 펼쳐져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발적이거나 단편적이거나 특이한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는 그 과정과 결과를 함께 들여다보아야 할 때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이제는 묵을 대로 묵은 ‘새 패러다임’ 자체를 신줏단지 모시듯 보듬고 사는 것보다는 훨씬 생산적이다.

김기태의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문학동네)은 바로 이 진화의 후과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젊은 작가의 문장이 아주 밀도가 높다는 점을 평가해야 하리라. 그것이 짧은 단편 둘레에 역사를 감을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하였다. 즉 하나하나의 문장들이 되풀이를 가능한 한 줄이고 이야기의 여백 너머로 펼쳐지는 작품 밖의 상황을 은밀히 암시함으로써 적은 어휘들 주변으로 삶의 전체적 상황이 요동치는 광경을 느낄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코메티가 한 인물의 조각을 통해서 세계 전체를 그리려고 했던 것과 비슷한 기도를 품는다(물론 모든 작품이 다 성공했다고 말한다면 작가의 오만을 방치하는 꼴이 되리라.)

필자는 모든 소재를 우겨넣는 오늘날 한국 소설들의 풍조(영화 「국제시장」을 상기해 보라)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언급한 적이 수차례 있는데, 작품 바깥으로 세계의 상황이 방사되면서 작품의 내부 사건들과 서로 반향하는 것과 어울리지도 않는 소재들을 억지로 덧붙이는 것은 아주 다른 것이다.

가령, 외국인 이주 노동자의 아들과 고아나 다름없이 자란 소녀의 밋밋한 연애관계를 다룬 작품,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에서 『오징어 게임』의 성공담과 우크라이나 전쟁은 왜 나오는가? 별 볼 일 없는 두 인물의 일상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 ‘자기 지키기’에 대한 강박행동이라면, 저 “수백억을 두고 목숨을 건 게임을 한다는 줄거리의 한국 드라마”가 상기된 것은 바로 자기애의 극단적 양상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전쟁과 대통령 선거는 문제의 드라마의 세계적(그렇다기보다는 실은 ‘제국에서의’라고 해야겠지만) 요란 법석에 환유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환유적 연결은 작품 제목을 통해서 이 소설의 실질적 주제임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두 인물의 국제적 관계와 오늘날 국제적으로 벌어지는 소동 사이에 벌어져 있는 ‘위상’의 엄청난 격차가 주제라는 것이다.

실로 소설가 김기태는 자기애의 진화사의 도정에서 확산된 엄청나게 다양한 양상들을 촘촘하게 모집해 기초 질료들로 밑바탕에 깔면서 그 중 거의 무작위로 선별된 특정 인물들과 세계 일반, 혹은 인물들 사이의 어긋남, 다시 말해 ‘자기애’라는 동일한 감정 핵으로부터 출발했으나 그 실제적인 현 상태는 너무나 큰 차이를 벌리고 있어서, 그 뿌리가 같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그런 양상들을 작품의 표면에 부각시킨다. 그리하여 인물들의 성공과 실패, 선전되는 것과 실제로 얻는 것, 외양과 이면, 마음과 행동, 지구촌과 민족국가, 서울과 시골, 더 나아가 자기애의 강화와 포기, 그리고 여전히 깃발처럼 날리는 자기애에 대한 다혈증적 이념-집념과 그것의 ‘자발적 시계태엽 오렌지’식의 전환(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동명의 영화에서 나타난 양상이 ‘회유적[음모적]’이라면) 등…. 모든 면들 사이의 대비를 부조하면서, 그것들의 근본원인이었던 정서 쪽으로 독서의 눈길을 돌렸다가 사건으로 되돌아오도록 하기를 되풀이하는 와중에 독자로 하여금, 그 차이와 동일성에 대한 의혹과 성찰의 늪지대를 시종 종종거리게 한다.

이와 같은 작업을 통해 20세기 후반기부터 오늘날까지 세계의 가장 보편화된 정서에 대한 본격적인 해부가 작가의 무의식적 기도로서 진행된 게 이 작품집이라 할 수 있으니, 그런 탐사가 결국 독자에게 촉발했을 깨달음의 정도는 작가의 공력과 독자의 노력이 얼마만큼 교섭하며, 어느 수준에서 화응하느냐에 달렸을 것이다.

작가의 편에서 보자면, 그의 시도를 드러내는 역선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욕망과 실제의 공방, 즉 욕망의 연쇄에서의 환유적 연결이라 할 수 있으니, 그가 얼마나 그 연결을 정직하고 정확하게 이었는가가 문학적 성취 여부를 판별케 할 것이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한 세미나에서 ‘환유’를 ‘리얼리즘’의 동의어로 사용하면서, 이렇게 풀이한 바가 있다. “소설은 현실에 대한 감각적 질료들을 무더기로 사용하는데, 그것들은 그 자체로는 어떤 것도 말하려 하지 않고, 어떤 가치도 갖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들이 자신들 너머의 어떤 의미의 선율을 떨며 연주하게 할 때, 소설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전쟁과 평화』의 초입에서 어깨를 드러낸 숙녀들의 테마는 무언가 다른 것을 부각시키는 데 봉사한다. 위대한 소설가들의 위대함의 정도는 그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집중하는 모든 것들이 상징적으로도 아니고, 우의적으로도 아니라, 서로 거리를 두고 반향하면서 무언가를 조형하는 정도라 할 것이다. 그것은 영화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어떤 영화가 좋다면, 그것은 환유적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주체의 도착perversion du sujet이 기능하는 바 역시 환유적이다.”(「도라와 젊은 동성애 여성」『세미나 제 4권』, Seuil, 1994, p.145; 마지막 문장은 이 글에서는 불필요하지만, 관심 있는 사람들을 위해 부기한다.)

지나친 동일시라고 할 수 있겠으나, 예술에서의 리얼리즘이란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성찰을 지속하는 힘이며, 그 힘의 유지를 통해서 현실의 밑바탕에 놓인 의미를 발굴하거나 혹은 현실을 넘어설 무언가를 창출하고자 하는 노력이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선이 길쭉이 놓여 있으니, 그 노력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오랜만에 보는 유망(有望? 流亡?)한 젊은 작가를 기대하는 마음에 주름이 많이 접힌다.


♦247의 모든 것

감염병 사태의 볼록거울

지난 5년 동안 전 세계는 ‘코로나 감염병 사태’로 독한 몸살을 앓았다. 많은 사람들이 감염되었고, 사망자도 많았을 뿐만 아니라 감염으로 인한 후유증도 심각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여러 차례의 변이를 통해 약화되어 이제 풍토병(엔데믹)으로 정착했다는 선언이 나온 지가 1년이 넘었는데, 며칠 전 신문에는 미국 대통령이 코로나에 걸렸다는 보도가 실렸다.

‘나무위키’에 의하면 코로나를 다룬 문화물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만화(웹툰 포함), 영화, 드라마, 게임, 노래 등에서 상당수 배경으로 쓰였는데, 사태 자체를 다룬 작품은 몇몇 드라마에서 단편의 에피소드용으로 제작된 게 보인다. 소설이 안 보여서, ‘아마존’을 뒤지니, 프랑스에서 독립출판된 한 소설이 나오는데, 포탈에서 자체 평가한 바에 의하면 개연성이 희박한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희선의 『247의 모든 것』(은행나무)은 ‘코로나 사태’를 정면으로 다룬 최초의 소설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다만 이 소설은 ‘코로나 사태’를 사실주의적 관점에서 추적한 게 아니라, 일종의 정신적 볼록거울로 크게 확대해 ‘니파바이러스’를 둘러싼 미래 세계의 소동으로 만들어 그렸다는 게, 얼마 전의 재앙에 대한 해부라는 인지에 혼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꼼꼼히 들여다보면 이 소설 안에는 코로나 사태 때 우리가 직접 겪고 보았던 거의 모든 사건들과 거의 모든 반응들이 총망라되어 압축적으로 동원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당시 사람들의 공포와 원인에 대한 각종 억측과 공격, 그리고 사람들 사이의 불신과 집단 분리 충동의 격화와 발병위험이 표지된 집단에 대한 매도와 위협, 당국의 점점 강화되어 간 조치와 그에 대한 시민들의 반발, 슈퍼전파자에 대한 조치와 사람들의 공포와 분노, 그에게 일어난 인간적인 비극, 감염에 대한 미신들의 창궐과 객관적 관찰의 무기력, 그리고 사태의 정치적 이용들, 희생양 만들기를 통한 공동체의 단결을 강화하기, 더 나아가 이 사태 내내 동시적으로 전개된 인간의 동물에 대한 편견과 학대, 요컨대 인류세의 종언을 예고하는 징후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작품 속의 ‘니파바이러스 사태’가 ‘코로나 사태’의 은유라는 서술상의 단서들이 있다. 하나는 미래 사회에 대한 묘사가 오늘날의 현실 묘사와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독자는 작품을 읽는 도중에 특별한 ‘사이파이’적 감각을 느낄 수가 없다. 더욱 결정적인 또 하나의 단서는 ‘구제역’을 병발적 사태로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구제역’은 바로 코로나 사태의 이전과 이후에 걸쳐져 있는, 즉 코로나 사태를 둘러싸고 있는 사태이다. 세 번째 단서. ‘니파 바이러스’ 자체가, 「제7장. 다큐: 순가이 니파 마을의 비극」을 통해 암시되었듯이, 1998-1999년에 발생한 것으로 파악된 감염병으로서, 최근 아프리카와 베트남에서 치명적인 바이러스로 확산 중이어서 화제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주로의 추방’이라는 사건을 제외하면 모두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에 일어난 일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단서들을 놓고 보면, ‘신종 니파바이러스 사태’는 ‘코로나 사태’의 은유이다.

다만 작품 속의 사태는 실제의 코로나 사태보다 훨씬 과장되어 있다. 즉 전자는 후자의 볼록 거울이다. 왜 이런 볼록 거울을 비출 생각을 했을까?

과장의 기본 양상들을 살펴보자.

(1) 감염병 사태로 인한 비극을 강화함으로써 인간들의 비참을 강화하였다.

(2) 감염병 사태에 대한 사람들의 허둥지둥을 광기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3) 정치적 통제를 강화하면서, 이를 권력자들에 의한 권력의 무분별한 전용이 야기하는 재앙을 환기시켰다.

(4) 정치적 이용을 음모론으로 확대했다.

볼록거울은 실제의 모습을 일그러뜨린다. 즉 볼록거울의 일차적인 의도는 풍자이다. 이 풍자는 과장이 극심해질 때, 희롱과 희화(戲畫)로 발전한다. 이는 특정 세력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관여자 모두를 단죄의 심판대에 올려놓는다. 즉 인간과 인간의 역사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이 소설의 핵심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인류세의 폐기가 도래한 때라는 주장이 은근히 밑바닥에서 일렁이는 것이다. 그 주장을 가장 실질적으로 지원하는 게 ‘니파바이러스사태’에 연동시킨 ‘구제역 사태’ 이다.

그러나 표면에서 일어나는 것은 온통 코미디이다. 풍문 속에서 일어나는 별의별 망상, 오판, 독선, 감상, 발작의 버라이어티쇼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희롱 대잔치 이상 나아갈 수 없다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 의사와 약사, 그리고 247(김홍섭)의 생체험에 대한 보고는 희박한 사실 요소가 반복되면서 감성적 호소의 수액을 채우는 일에서 허덕이고 있다.

다만 우리는 이 일그러진 미래사회의 공간적 과장이 시간적 축적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즉 작품 속의 일그러진 모습을 시간의 길이로 늘리면 그것은 인류가 스스로 초래한 재앙의 점진적인 도래를 각성시키기 위한 충격 요법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것을 이해하는 독자는 코미디를 웃어넘기지 못하고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런 독자가 점증하기를 바란다.


구효서·소설가

소설가 구효서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의 소설들은 피상적이다. 그 점이 참 묘하고 좋아 보인다. 피상적이라는 건 좀 안 좋게 들릴 수밖에 없는 표현인데 좋다고 말하고 있으니 이 또한 묘하지 않을 수 없다.

피상적이라는 말을 사전에서는 대체로 ‘본질적인 현상은 추구하지 아니하고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현상에만 관계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뜻으로만 보면 딱히 안 좋게 들릴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겉보다 속이 좋은 것’이라는 통념에서라면 그리 이해할 만하다.

겉이라는 뜻을 포함한 비슷한 말에는 표피적이라는 말도 있다. 표와 피를 겉이라는 같은 의미로 읽다 보면 표상이라는 말도 떠오르면서 급기야 표상체계라는 복잡한 말까지 따라 나온다. 표상이 표상에서 그치지 않고 체계를 갖추다 보면 더는 표상이 아니라 표상의 대척항목이랄 수 있는 본질을 대신할 수 있게 된다.

여기까지 오면 피상과 본질이 과연 무엇인지,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것을 나누는 기준이나 의도는 무엇이며, 누가 나누고 어떻게 활용하는지까지를 자꾸 묻게 된다. 묻다 보면 겉보다 속이 좋다는 생각이 머잖아 흔들릴 뿐만 아니라, 겉 없는 속이 있을쏘냐? 라는 억하심정마저 들게 된다. 그러니 ‘겉’은 기존하는 ‘속’을 감싸는 게 아니라 되레 속을 비로소 있게 하고 규정하는 매우 ‘본질적’인 요소라고 아니할 수 없게 된다.

고등학교 3학년 역도 선수인 송희에게 무거운 바벨을 들어 올리는 의미랄까 은유랄까 본질, 즉 ‘속’은 영광이며 미래다. ‘오늘의 무게가 내일의 영광(240쪽)’이니까. 영광은 ‘꿈’과 ‘희망’으로 대체되기도 한다(262쪽). 그러나 김기태의 서술자는 <무겁고 높은>에서 바벨은 바벨이라고 한다. ‘그냥 100킬로그램의 손때 묻은 쇳덩이(262쪽)’. 그것은 바벨의 겉, 즉 피상이면서 어떤 면에서는 바벨의 본질이기도 하다. 이처럼 김기태는 겉과 속을 뒤집는 유희를 계속하는데 유희를 따라가다 보면 뒤집는 게 아니라 (모르긴 해도)원래대로 되돌려놓는 것 같기도 하다. 원래? 그런 게 있을까 모르겠지만, 있다면 말이다.

아무려나 바벨이 그냥 100킬로그램의 쇳덩이일 뿐인 송희에게는 미래나 영광이나 꿈이나 희망의 ‘속’이 보이는 게 아니라 눈앞의 ‘눈 내리는 겨울 오후의 고요, 산등성이의 헐벗은 자리, 교정의 새파란 인조 잔디(262쪽)’의 ‘겉’이 보일 뿐이다. 이 겉의 문장들을 지날 때 어찌나 눈이 개운해지고 아닌 게 아니라 눈 내리는 겨울 오후처럼 고요해지던지. 김기태의 소설이 피상적이어서 좋다고 말하는 이유다.

<팍스 아토미카>의 피상은 어떤가. 세계 평화가 위험천만한 핵에 의해 지탱된다니 이걸 평화라고 해야 할까. 평화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평화가 아니라고도 할 수 없다. 전쟁이 없는 상태거나 있더라도 국지전 정도라면 평화라고 할 수 있는 걸까.

이러한 아이러니의 평화는 비단 핵의 항목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며, 위키피디아 WWW을 통해 핵분열하듯 삽시간에 퍼져나가 세계를 속속 정복해 나아가는 정보 쓰나미에다가 우리의 삶과 지식을 오롯이 의존하려는 현상도 어찌 보면 핵만큼이나 위험천만 하면서도 손쉬운 평화 상태에 해당할 것이다. 그런 평화가 아닌 다른 평화를 찾으려고 다시 WWW 속 정보의 거미줄을 뒤져본들 거기에는 ‘길이 칠십오 미터 폭 팔십 미터의’ ‘네 개의 터보팬 제트 엔진을 장착했으며 이백 톤의 화물과 육백 명 이상의 승객을 싣고 한 번에 만 오천 킬로미터를 날아갈 수 있’는 ‘초대형 복층 광동체 여객기(296쪽)’ 등의 초미세먼지 같은 초미세정보가 그야말로 거미줄처럼 촘촘히 그리고 끝없이 얽혀 있을 뿐이다.

그런 ‘속’의 것들, 위험하면서도 손쉬운 거미줄을 지워버리지 않고는 좀처럼 그 올가미에서 헤어날 수 없다. 그래서 없앤다. ‘문을 없앤다. 문도 문틀도, 그것들을 지지하는 벽과 기둥도 없애버린다. 모두 사라진 곳에 활주로가 나타난다.’ 그리고 나는 말한다. ‘나는 활주로 위에 있다(299쪽).’

‘나는 활주로 위에 있다.’ 이 주문은 소설 곳곳에 흩어져 있는 ‘나는 알람을 오전 여섯 시에 맞추었다(282쪽).’, ‘나는 캐비닛을 잠갔다(279쪽).’, ‘나는 보일러를 껐다(278쪽).’라는 피상의 간결한 문장들에 상응하는 것으로서 ‘지속적인 긴장과 불안과 회의에 대한 종전선언이며 결정적 주문(285쪽).’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미래나 영광이나 꿈이나 희망과 같은 ‘속’을 지웠을 때 보였던 <무겁고 높은>의 눈 내리는 겨울 오후의 고요에 해당하는 ‘겉’이다.

기존하는 속을 감싸는 게 아니라 되레 속을 비로소 있게 하고 규정하는 것이 겉이라고 할 때, 그 겉을 김춘수의 ‘이름’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꽃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주었을 때 꽃은 꽃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겉으로서의 이름을 기표라고도 할 수 있고 언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름이 먼저고 꽃이 나중이라면 이름을 지울 때 꽃도 지워져 겉 없이는 속도 없게 되는 것이다.

표피나 표상이었던 ‘겉’이 체계를 갖추면 표상체계라는 지위를 얻게 되고 그것은 마치 이름 이전부터 있어왔던 것처럼 완강한 ‘속’으로 행세하며 핵처럼 위키피디아처럼 빠르고 광범위하게 사람과 사회의 의식을 지배해 나간다. 작은 시내가 강이 되고 강물이 바다가 되듯이.

그렇게 <세상의 모든 바다>는 환경이라든가 인권이라든가 평화라든가 하는 표상체계로 국적 및 인종에 상관없이 하나로 이어진다. 그것이 ‘ALL THE SEAS OF THE WORD(10쪽)’ 이며 ‘We Are The World(112쪽)’이다. 거대한 흐름이다. 이 흐름은 소통과 연대라는 이름의 교류를 확대하면서 자본이 요구하는 통상적(通商的) 기류를 제공한다. 하나로 연결되었으므로 원활하게 이득을 한 곳으로 끌어 모을 수 있다(<로나, 우리의 별>).

‘겉’에 의해 비로소 존재하게 된 ‘속’이 외려 겉을 지배하고 조종하는 리바이어던의 지위를 갖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러한 속이 요구하는 삶을 슬프지만 모범적으로 내면화할 것인지(<전조등>, <태엽은 12와 1/2바퀴>) 크게든 작게든 거부와 저항의 몸짓을 보일 것인지(<세상의 모든 바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로나, 우리의 별>) 선택하게 된다.

전자에 해당하는 이야기에서는 그래서 인물들의 발화가 애처롭기까지 하다. ‘그녀는 예쁘고 착하고 똑똑하고 재밌고 저를 사랑하는 사람이죠(102쪽)’ 라고 하거나 ‘당연히 사랑하지. 이게 사랑이지. 이 정도면 굉장히 사랑 아닐까. 하하(103쪽)’라고는 하지만 어딘가 자조적으로 들린다.

그런가 하면 후자에 해당하는 이야기에서는 ‘속’의 요구에 멈칫거리거나, 훼방을 놓거나, 적극적인 저항의지를 보인다. 아직 ‘세상의 모든 바다’의 팬이냐는 물음에 대답할 수 없다고 하거나, 세상의 모든 바다는 분명 이어져 있는데 이제 그 사실이 다소 무섭다고 하거나, 그런 걸 몰랐던 이전의 근시의 사랑이 차라리 그립다고 한다(37쪽).

‘속’의 요구, 즉 표상체계의 요구에 훼방을 놓는 방식이란 아무래도 표상을 흔들거나 지우는 것, 즉 언표나 기표로서의 ‘겉’을 교란하는 것이다. 출전이 분명치 않거나 분명하더라도 맥락은 어이없는 ‘기립하시오 당신도!(135쪽)’를 비롯해 ‘어쩔티비, 어쩔시크릿쥬쥬리미티드에디션, 어쩔엘지트롬스타일러, 어쩔다이슨V15디텍, 어쩔메르세데스벤츠에스클래스내돈내산(132쪽)’과 같은 밈들을 양산해 내는 일이 그것이다.

좀 더 적극적인 대응은 <로나, 우리의 별>의 로나에게서 보인다. 폐지 리어카 할머니를 돕는 빵또아에게 불쑥 나타나 거두절미 천만 원 이상 가는 기타를 덥석 안기는가 하면, ‘We Are The World’라는 표상체계를 정면으로 훼방하는 ‘We Are Not The World(196쪽)’라는 앨범을 낸다.

그러고 보니 <롤링 썬더 러브>나 <보편 교양>에서는, 하도 써서 의심의 여지조차 없어 보이는 러브니 보편이니 교양이니 하는 언표들에 딴지를 걸 듯 물고 늘어진다.

‘나는 활주로 위에 있다’나 ‘나는 보일러를 껐다’와 같이, ‘해방이나 구원처럼 모호한 단어는 하나도 포함하지 않’은 속없는 피상적 언표들을 주문처럼 한 번씩 욀 때마다 왠지 모르게 맑고 개운해지는 기분이 든다. 아무래도 김기태 소설의 묘한 매력 덕인 것 같다.


이승우·소설가

소설가 이승우
♦247의 모든 것

열 감지 드론이 표준보다 체온이 높은 사람을 찾아내고, 해열제는 금지되고, 마스크를 하지 않는 것은 속옷을 입지 않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인식되고, 병은 악으로, 타인은 잠재적 보균자로, 적으로 간주된다. 격리와 통제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감염에 대한 두려움이 미신과 음모론과 편향된 믿음을 퍼뜨린다.

김희선이 그린 소설 속 세상은 이처럼 암울하다. 불과 몇 년 전에 우리가 겪은 코로나 팬데믹의 후일담으로 읽힐 수도 있지만, 그보다 더 두렵고 절망적인 일이 닥칠 거라는 일종의 어두운 예언으로 읽히기도 한다.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미래 대한민국이 소설의 무대이다. 훨씬 강력한 변종 니파바이러스가 몰고 온 공포를 끝내기 위해 우주로 보내졌다가 홀로 외로움 속에서 사망한 것으로 공표된 슈퍼전파자 247의 ‘모든 것’에 대한 기록이 소설의 내용이다. 다양한 화자들이 나와 다양한 증언을 한다. 처지와 입장과 신분이 다른 만큼 목소리들도 다양하다. 이 이야기 방식은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진실을 흐리기 위한 방법으로 유용하다. 아니, 진실 부재를 선언하기 위해 더 효과적인 서술방법이다.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가 믿는, 믿고 싶은 것을 말한다. 나타난 현상으로부터 원인을 도출해내려고 할 때 생길 수 있는 온갖 억측과 망상과 해석들이 난무한다. 명쾌한 답이 부재할 때 인식은 믿음의 문제가 된다. 증언들이 더해질수록 사실들이 충돌하고, 슈퍼전파자인 247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 변종 바이러스는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어진다. 자료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사람들이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에 대한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 하나는 그가 믿고 싶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팬데믹에 따른 공중보건과 통제에 대한 소설이라기 보다, 오히려 인식과 믿음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 소설로 읽힌다. 인식의 생성과 변질, 믿음의 기원 같은 것. 팬데믹 현상은 이 주제를 다루기 위해 꽤 유용한 재료였을 것이다.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이론이 소설의 전반적인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소설에는 최후의 변종 바이러스 숙주인 247을 ‘희생양’으로 호칭하는 대목이 여럿 나온다. 지라르에 따르면 공동체가 위기를 맞을 때 인류는 대중들의 폭력 욕망을 해소할 수 있는 희생양을 찾아낸다. 사회적 약자나 눈에 띄는 특징을 가진 사람이 희생양으로 선택된다. 그리고 희생양으로 선택된 이가 희생당한 뒤에 사람들은 그 희생양을 공동체를 위기에서 구한 존재로 신성화하고 숭배한다.

『247의 모든 것』의 247 역시 마침내 신화적 존재가 되고, 어떤 종교 집단에 의해 숭배의 대상이 된다. 모스 부호로 풀어진 그의 말은 인류를 향한 신의 메시지로 전해진다. 그러나 소설은 247이 정말로 우주에 유폐된 뒤 사망했는지 의심하게 하는 에피소드를 첨가함으로써, 안도하려는 우리의 인식을 다시 휘젓는다. 소설적 기법으로서의 반전은 음모론과 손을 잡고 있다. 작가는 어쩌면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모든 것은 그저 당신들의 망상이거나 확신일 수 있다. 그러니 믿고 싶은 것을 믿으시라. ‘보이지 않는 손’은 보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무언가를 본다면, 그것은 당신이 거기서 그것을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귀를 기울이면 확신이 사실을 대체하는 이 세상을 향한 작가의 귓속말이 아마 꽤 크게 들릴 것이다.


김인숙·소설가

소설가 김인숙
♦247의 모든 것

우리는 모두 감염병의 시대를 살았다. 코비드19.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펜데믹의 엄혹한 시대를 거쳐 우리는 생존했다. 그러나 누군가는 목숨을 잃었다. 우리가 누군가의 목숨을 잃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옳을 수도 있을 것이다. 상처와 기억은 모두에게 남았다. 그렇다면 이 소설 ‘247의 모든 것’은 모든 것이 지나간 후의 회고록인 걸까.

이 소설은 코비드 19에 대한 기록이 아니다. 미래 사회에 도래할 또 다른 펜데믹에 대한 이야기이다. 코비드 19보다 더 강력하게 온 감염병. 그리고 슈퍼전파자의 존재. 환멸과 편견과 공포와 혐오. 소설의 도입부가 인상적이다. 펜데믹의 최초 보균자로 알려진 슈퍼전파자는 자발적으로 우주로 추방된다. 우주선을 타고 지구의 궤도를 한없이 돌다가 마침내 홀로 사망할 것에 대한 동의다. 그리고 마침내 사망한다.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무엇일까. 고독일까, 편견일까, 혹은 우리에게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일까.

그가 슈퍼전파자로 밝혀진 이후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는 시종일관 247로 불린다. 이름을 잃었다. 당연히 그의 죽음은 한 사람의 죽음이라기보다 바이러스의 종말, 펜데믹의 종식을 뜻한다. 인간에 대한 애도는 없다. 이것은 미래의 사회에 다가올 또 다른 펜데믹에 대한 울적한 암시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미 경험했던 코비드19에 대한 회한이기도 하다. 우리는 무엇을 건너서 오늘에 이르렀나. 과연 이르기는 한 것일까.

소설의 구성이 흥미롭다. 슈퍼전파자 247과 관계된 인물들의 인터뷰로 소설이 이어진다. 모두 같은 것을 겪었음에도 모두에게 달랐던 펜데믹. 모두에게 달랐던 혐오와 공포. 모두에게 달랐던 247.

‘247의 모든 것’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은 우리가 몰랐던,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사실이나 정보에 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소설이 알려주는 것은 우리가 모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에 대한 사실이다. 알면서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혐오와 공포에 감금했다.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도 또 그렇게 할 것이다. 247을 가두고 영원히 지구 궤도를 떠도는 우주선처럼 우리 모두를 가두는 것은 감염되는 병균이 아니라 감염되는 정서다.

소설은 무엇에 대한 것을 쓰기보다 그 무엇의 이면에 주목한다. 김희선의 ‘247의 모든 것’이 그렇다.


김동식·문학평론가

김동식 문학평론가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이데올로기들을 불러들이는 또는 호명(呼名)하는 소설. 김기태의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을 읽는 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던 구절이다. 이데올로기라는 단어는 매우 낡았고 오해의 여지도 많다. 허위의식을 불러오는 조작된 관념이라는 전통적인 의미는 잠시 괄호 속에 넣어 두고자 한다. 그보다는 우리의 현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회적인 말들, 그러니까 보수와 진보로 나뉘는 정치적 입장들처럼 전쟁, 환경, 난민, 중산층, 동성애, 결혼, 공산주의, 세계화, 지역 등에 대한 다양한 입장과 가치를 제시하는 사회적인 담론을 이데올로기라고 하자. 그리고 이데올로기가 말을 걸고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하나의 예를 든다면 반전(反戰)과 환경보호를 지지하고 중산층은 한국사회의 사라진 꿈이라고 생각하는 정치적 보수주의자와 같은 자기 서사를 구성하게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승인하자. 그럴 때 특정 이데올로기를 비판할 수도 있고 미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나 현실에서 이데올로기를 분리하는 것은 근원적으로 불가능하다. 달리 말하면 이데올로기의 그물망에서 벗어난 바깥은 존재하지 않는다. 김기태의 소설을 읽기 전에 이데올로기에 대한 사전 지식을 갖추어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김기태의 소설이 현재 한국사회에서 생산 또는 재생산되고 있는 이데올로기들을 소설의 공간으로 불러들이고 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단편 「세상 모든 바다」는 세계적인 아이돌 그룹 세상 모든 바다(이하 세모바로 약칭)가 펼쳐놓은 이데올로기적 풍경과 그 주변에 배치되어 있는 자기 서사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세모바는 아홉 살 때 청력의 반을 잃은 송희, 후쿠시마 출신이라는 이유로 차별의 대상이었던 가스미, 독일에서 태어난 쿠르드족 소녀 레하나 등 세계 곳곳에서 태어나 그곳의 아픔과 상처를 대변하며 성장해 온 11명의 소녀들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세계 곳곳의 아픔과 상처를 대변하고 또한 극복해 온 자기 서사에 근거해서,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는 의지를 춤과 노래와 영상을 통해 확산시켰다. 세모바의 콘서트장에 이르는 길에는 차별금지법을 지지하는 배지, 폐식용유로 만든 재생 비누, 아프리카의 기아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스티커 등이 배포된다. 그뿐인가. 반전과 세계평화의 메시지를 충격적인 퍼포먼스를 통해 전달하려는 박규영, 원전 반대의 가치를 공유해 온 세모바를 보기 위해서 경상북도 해진에서 올라온 고등학생 백영록, 자이니치 4세대로서 지금은 귀화 일본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정체성과 관련된 고민을 끌어안고 있는 하쿠 등도 세모바 콘서트로 모여들었다. 인류, 평화, 환경에 대해 세모바가 보여준 꿈들이 그들을 불러 모은 것이다.

문제는 콘서트가 끝난 다음에 일어났다. 반전 퍼포먼스에서 사용한 총소리 음향을 진짜 총격으로 오해한 군중이 놀라서 급격하게 움직이면서 많은 사상자가 생긴 것이다. 사망자 중에는 해진에서 올라온 고등학생 백영록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쿠는 백영록을 추모하기 위해 해진을 방문하는데, 그곳에서 그는 원전 건설 재개를 촉구하는 서명을 요청받는다. 하지만 하쿠는 자신에게는 서명할 이름도 권리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해진의 바다 앞에서 관광객처럼 잠시 머물다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 그렇다면 세모바는 무엇이었을까. 세상의 모든 바다는 인류를 상상할 수 있게 하는 통합의 바다이겠지만, 그와 동시에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이데올로기의 바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하쿠는 잠시 생각한다. 좋은 것이 있으면 주변의 상황은 보지 않고 그냥 좋다고 외치는 오타쿠적 감성 또는 ‘근시의 사랑’이 문득 그립다고.

사회적 이데올로기의 호명들에 응답하는 과정에서, 이데올로기들의 연쇄나 조합에 근거하여 자기 서사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정체성(주체)은 자리를 부여받는다. 김기태의 소설에서 이데올로기에 관한 알튀세르적인 논변의 흔적을 발견하는 일은 흥미로우면서도 즐거운 일이다. 그리고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과 현실을 구성하는 이데올로기를 추상적인 개념의 수준에서가 아니라 소설의 육체성과 함께 재현해 내는 일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우리의 삶과 현실을 다시 들여다보게 하는 힘이 김기태의 소설에 있다. 문학상 심사를 위해 다시 읽어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