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신영이 펴낸 '조선요리제법' 1943년판. 한성도서에서 나왔다. 조선요리제법은 1917년 초판이 나온 이래 일제때만 12판까지 발행된 당대 베스트셀러였다. 2만4000부 넘게 팔렸을 것으로 보인다. 국립 한글도서관 소장

1933년 유별난 저작권 소송 하나가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다. 당대 베스트셀러를 멋대로 베껴 출간한 출판업자를 상대로 저자가 제기한 재판이었다. 원고는 당시 이화여전 교수인 마흔 셋 방신영. 1917년 최남선이 운영한 신문관에서 ‘조선요리제법’을 펴낸 음식학자, 영양학자였다.

‘이화전문학교 교수 방신영씨가 원고가 되어 종로2정목 84번지 책장사 강의영씨를 상대하여 저작권 침해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의 소송은 21일에 경성지방법원에서 ‘피고는 원고에게 350원을 지불하고 이로부터는 원고의 지은 ‘조선요리제법’이란 책을 발매하지 말라’는 판결을 내려서 원고 방신영씨가 승소하였다. 원고가 처음에 손해배상으로 2500원을 청구하였던 것인데 결국 재판소에서는 350원을 지불하라고 판결하였다.’(’요리법작권(作權) 침해, 방신영씨가 승소’, 조선일보 1933년 7월23일)

방신영은 조선일보 1928년 1월1일자에 '영양문제에 대하여 1천만 자매에게 드림'이란 제목으로 영양의 균형을 갖춘 음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칼럼을 썼다. 방신영은 당대 가장 영향력있는 음식 칼럼니스트였다.

◇'조선여자 요리계의 첫 손가락’

방신영(1890~1977)은 신문·잡지에 자주 등장한 유명인이었다. 요즘의 백종원처럼, ‘요리’하면 방신영을 떠올릴 정도였다. ‘방신영 여사-기자가 먼저 그를 소개하기 전에 독자 여러분은 반드시 그의 특장인 조선요리 만드는 법을 연상할 것이다. 실상 그렇다. 그는 조선요리로 유명한 유일한 요리사이요, ‘조선요리제법’이라는 책을 저작한 사람이다. 누구든지 그의 요리 만드는 솜씨를 부러워하지 않는 이가 없을 것이요, 그의 만든 음식을 한번 맛보려고 애쓰지 않는 이가 없을 것이다.’

조선일보는 1924년 11월 선구적 여성들을 소개하는 특집 ‘첫 길에 앞장선 이들’(11월23일~12월19일·총26회)을 연재했는데, 방신영은 ‘조선여자요리계에 첫 손가락을 꼽게 된 정신여학교 교사’(조선일보 1924년12월11일)로 등장한다. 정신여학교 바자회 때 그가 만든 음식을 식당에 진열하자 구경꾼들이 몰렸다는 일화도 소개했다. ‘어려서부터 상당한 가정에서 여러가지 음식을 규모있게 배웠을 뿐 아니라 그것이 자기가 가장 취미있는 생활이라고 생각한 이상 더 연구하고 더 조직적으로 만들어보리라는 결심으로 하나씩 하나씩 일부터 실습을 하여가면서 뺄 것은 빼고, 더 넣을 것은 더 넣어가며 여러 번이나 시험한 후에 그것을 일일이 글로써 책까지 만들었다 한다.’

방신영이 1926년 도쿄 사이키 영양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다는 소식을 알린 조선일보 1926년 3월23일자 보도. '조선요리제법' 저자 방신영은 당대 유명인사였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고치에서 실뽑듯 솔솔…'

신문은 방신영이 ‘14년 전에 정신 여학교를 졸업하고 그 후에 광주와 군산과 김천-그 세 지방학교로 다니며 열 한해 동안을 여자교육계에 몸을 바쳐 일하였으며 3년전에 자기의 모교인 정신여학교로 와서 학교 전체의 가사를 맡아서 가르치는 것이다’고 소개했다. 취재기자가 본 방신영의 인상은 이랬다.

‘그는 천성이 온순하고 참으로 여자다운 여자이다. 말 한마디를 하려도 앞뒤를 꼭꼭 눌러 생각하여가며 아주 나지막한 목소리로 고치에서 실뽑듯 솔솔 풀려나오는 것이다. 그의 방도렷한 얼굴, 그의 정다운 눈은 만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연히 간절한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그는 여자로서 더 할 수 없는 여자이요, 사람으로서 가장 얌전한 사람이다.’

◇손맛 뛰어난 어머니 솜씨 물려받아

방신영은 경성 출신으로 아버지 방한권과 어머니 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0년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뒤, 광주, 군산, 김천 등 3곳의 학교에서 가르치다 1921년 모교 교사로 금의환향했다. ‘조선요리제법’의 후광이 컸을 것이다. 1929년 이화여전 가사과 창설교수로 임용됐다.

음식 솜씨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듯하다. 방신영은 1931년 펴낸 ‘조선요리제법’ 5판 서문에 이렇게 밝혔다. ‘때는 연소하였고 경험도 없었으나 자연으로 일어난 붉은 마음 하나로써 어머님 무릎 앞에서 한가지 한가지를 여쭈어보고 조그마한 손으로 적어 만들었던 것입니다.’

◇'규합총서’ ‘부인필지’ 계승한 근대적 요리책

어머니에게 귀동냥으로 들은 비법만 담은 것은 아니다. 1908년 명신(1909년 이후 숙명)여학교 교사 이숙은 우문관에서 한글 요리책 ‘부인필지(婦人必知):대한 요리와 재봉의 필요한 법’을 출간했다. 숙명여학교 가사 과목 교재로 사용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부인필지’는 실학자 빙허각 이씨가 1809년 펴낸 ‘규합총서’의 음식과 재봉 분야만 간추려 정리한 한글 책이었다.

1908년 우문관서 펴낸 이숙의 요리책 '부인필지' 광고. 황성신문 1908년 6월16일자에 실렸다. 눈에 잘띄게 하기 위해선지 광고를 거꾸로 실은 게 흥미롭다. '부인필지'는 19세기 초 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 중 음식과 재봉 부분만 간추려 출간했다. 방신영의 '조선요리제법'은 '부인필지'를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부인필지’는 약주, 장초, 반죽, 다품, 침채, 어육, 상극류, 채소류, 병과류, 과채수장법, 제과독, 제유수취법 등을 다뤘다. ‘부인필지’는 황성신문에서 1908년 6월9일자를 비롯, 여러 차례 광고를 실었다. 이 신문 광고를 통해 널리 알려졌을 것이다. 방신영의 1917년 ‘조선요리제법’에서 어육장, 청태장, 팟(팥)고추장, 고초장, 즙장, 청국장, 급히 장만드는 법 등이 나오는데, 팟고추장을 제외하곤 ‘부인필지’의 내용과 똑같다. 19세기초 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가 구한말 이숙의 ‘부인필지’를 거쳐 20세기 전반 베스트셀러 음식책 ‘조선요리제법’으로 전승된 것이다.

◇민간 전승 음식조리법 체계적으로 정리

방신영은 일반 가정주부가 가족이나 손님을 접대하는 상차림에 도움되는 실생활 위주로 조리법을 정리했다. 장, 국, 찌개, 지짐이, 나물, 무침, 포, 전유어, 산적, 찜, 회, 기타 반찬 순으로 소개했고, 다식, 정과, 어채, 화채, 유밀과, 강정 등의 후식, 그리고 밥, 죽, 미음, 암죽, 떡, 김치, 젓 담그는 법, 차 만드는 법을 기술했다. 특이한 사실은 1917년 초판에 벌써 일본요리, 서양요리, 중국 요리 만드는 법을 소개했다는 점이다.

◇일제 때만 2만 4000부 이상 팔려

‘조선요리제법’은 얼마나 팔렸을까. 방신영은 1931년 5판 서문에서 1917년 초판이 나온 이래 매번 2000부씩 인쇄했고, 4판까지 모두 8000부가 팔렸다고 적었다. 윤정란 교수는 조선요리제법은 1943년까지 총 12판을 찍었으며, 최소 2만4000부 정도 팔렸다고 본다.(’근대 여성지식의 계승, 확산, 그리고 국제교류’, 196쪽) 1930년대 최고 베스트셀러인 박계주의 ‘순애보’가 1945년 이전까지 47쇄, 최소 20만부를 찍었고, 심훈의 ‘상록수’는 총 1945년 이전까지 1만부 이상이 팔렸다고 한다. ‘조선요리제법’은 ‘순애보’엔 미치지 못하지만 ‘상록수’보다는 많이 팔렸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 사이키 영양학교 유학

방신영은 1925년 도쿄 사이키(佐伯) 영양학교에 1년간 유학했다. 일본 영양학의 아버지로 꼽히는 교토제대 출신 사이키 타다스(佐伯 矩)가 1924년 설립한 학교였다. ‘방신영 여사는 작년 봄에 동경으로 건너가 좌백(佐伯) 영양학교에 입학하였던바 지난 15일에 동교에서 남녀 15명의 졸업생을 내게 되었는데, 여사는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업을 마치었다더라.’(‘금년 해외에서 업을 마칠 여성들’8, 조선일보 1926년3월23일)

사이키 영양전문학교로 이름을 바꾼 이 학교는 올해 개교 100주년을 맞아 여전히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영향력 1위 음식 칼럼니스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방신영은 정신여학교에 출강하면서 ‘영양학 전도사’로 나섰다. ‘영양이 불량하거나 부족한 여자는 강건한 아동을 생산할 수가 없습니다. 선량한 자손을 낳고 제2국민을 성육하는 데는 마땅히 선량한 체질을 가져야겠습니다. 그럼으로 먼저 건전한 아동을 성육시켜서 국민의 건강와 사회와 가정의 행복을 증진하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많은 연구를 하시기 깊이 바라는 바이올시다.’(‘영양과 가정과의 관계에 대하여’, 조선일보 1926년11월28일)

방신영은 1928년 신년특집 ‘영양문제에 대하여 일천만 자매에게 드림’으로 영양이 국민의 건강, 사회 발전에 미치는 영향을 본격적으로 전파했다. ‘영양학은 실로 일 개인의 건강과 안전을 좌우할 뿐 아니라 널리 사회와 인류의 행복을 도모하는 데 중추문제가 되는 것’(조선일보 1928년 1월1일)이라고 못박은 그의 칼럼은 27회나 연재됐다. ‘위생상으로 본 우리의 음식-여러가지 개량할 점’1~3(조선일보 1932년 1월8일, 12~13일), ‘조선 음식의 재음미’1~5(조선일보 1934년3월24일~25일,27일~29일) 등 방신영은 당대 가장 영향력 큰 음식칼럼니스트였다.

◇생활개신운동, 근우회, 조선어표준어사정...

1929년 봄 조선일보가 대대적으로 펼친 ‘생활개신운동’ 위원으로 활약했다. ‘생활부터 달라져야 힘을 기를 수있다’며 조선인의 각성과 변화를 촉구한 운동이었다. 색의단발(色衣短髮,색깔 있는 옷을 입고 머리 짧게 자르기), 건강증진, 상식보급, 소비절약, 허례폐지 등 5대 개선사업을 펼쳤다. 위원장 윤치호를 선두로, 허헌 신흥우 최현배 김병로 한용운 방정환 박길룡 정세권 정인보 백낙준 홍명희 등 당대 각계의 저명인사 100여명이 참여했다. 방신영은 김활란과 함께 위원으로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본사와 협력할 100여名士위원’, 조선일보 1929년5월12일)

방신영은 조선 YWCA와 직업여성의 친목도모를 위한 망원구락부, 좌우 여성단체를 아우른 근우회 등 여성운동에도 뛰어들었다. 조선어학회가 1935년 표준어제정을 위해 꾸린 조선어표준어사정위원회 위원으로도 활약했다.

◇1962년 34판 발간, 판마다 내용 수정

광복 이후에도 ‘조선요리제법’ 개정판을 계속 냈다. 1954년 ‘우리나라 음식 만드는 법’으로 책 제목을 바꿨고, 1962년 34판까지 냈다. 책을 찍을 때마다 내용을 수정했기 때문에 매번 다른 ‘조선요리제법’이 나왔다고 할 수있다. 연구자에 따라 ‘판’과 ‘쇄’를 혼용해서 쓰는 바람에 다소 혼란이 있지만, 반세기에 걸쳐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지킨 것만은 분명하다.

1967년 재단법인 과학기술후원회(이사장 윤일선)는 첫 사업으로 한국 과학기술진흥에 일생을 바친 과학기술자 9명을 선정, 이들에게 생활비와 연구지원금을 지급했다. 영양학자 방신영은 9명 중 유일한 여성으로 선정됐다.(‘68년유공자 9명’ 과학후원회 선정, 조선일보 1968년8월11일). 위대한 생애였다.(*다음 주 ‘모던 경성’은 휴가로 쉽니다)

◇참고자료

방신영, 만가필비 조선요리제법, 신문관, 1917

방신영, 주부의 동무 조선요리제법, 한성도서, 1931

한식재단, 근대 한식의 풍경, 한림출판사, 2014

김성은, 신여성 방신영의 업적과 사회활동,여성과 역사 제23집, 2015

윤정란, 근대 여성지식의 계승, 확산, 그리고 국제교류-’조선요리제법’과 Korean Recipes를 중심으로, 숭실사학 49,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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