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32회 임방울국악제 대상을 거머쥔 소리꾼 정은혜씨. 이날 정씨는 춘향가 중 ‘방안이별’ 대목을 선보였다. 몽룡을 향해 비통한 이별의 심정을 쏟아내는 춘향, 이를 목격한 춘향의 어머니를 능수능란하게 오가는 팔색조 소리 연기로 객석 혼을 쏙 빼놓았다. /김영근 기자

“아들, 엄마 2등 아니고 1등 했어!”

9일 제32회 임방울국악제 판소리 명창부 대상(대통령상)을 받은 소리꾼 정은혜(40)씨의 외침에 현장 객석이 함박 웃음으로 물들었다. 그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얼굴로 “어안이 벙벙하다. 아직 어린 제 아들이 오늘 아침 ‘엄마, 2등 상 타더라도 저 공룡 사주세요’ 하길래 ‘그러마’ 했는데…. 1등을 했다”며 “스승님들의 가르침을 따라 대중의 아픔을 달래주는 에술가가 되도록 정진하겠다”고 했다. 장내 긴 박수가 이어졌다.

이날 정씨는 명창부 본선에서 ‘춘향가’ 중 ‘방안 이별’ 대목을 불렀다. 이몽룡에게 ‘한양으로 떠난다’는 말을 들은 춘향이가 비통한 심정을 쏟아내는 대목이다. “이별 말이 웬 말이오, 답답허니 말을 허요~.” 풀썩, 한복 치마와 함께 무대에 주저앉은 정씨는 때때로 곧추세운 부채로 객석을 훑었다. 그때마다 관객들은 마치 자신이 이몽룡이 된 듯 “하이고” 안타까움 섞인 추임새를 내뱉었다. 이날 총 일곱 명의 심사위원 중 무려 다섯 명이 정씨에게 만점에 가까운 ‘99점’을 줬을 때는 기다렸다는 듯 환호성이 터졌다.

정씨는 올해 예선부터 유력한 대상 후보로 점쳐졌다. 7세에 소리를 시작해 최승희, 송순섭 등을 사사했고, 18세부터 판소리 다섯 바탕을 완창한 횟수만 도합 10번. 국립창극단 출신으로 배우 황정민과 함께 선 연극 ‘리처드 3세’ 등 다양한 대표작에서 대중에게 눈도장을 찍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현대무용가 안은미, 국악밴드 이날치의 리더 장영규, 오징어게임의 음악감독 정재일, 재즈 가수 나윤선 등 국악 외 다양한 장르 음악인들도 그를 자주 뮤즈로 꼽아왔다.

하지만 경연 직후 무대 뒤편에서 만난 정씨는 “스스로는 수상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간 임방울국악제 이전 다른 지역대회 명창부에도 숱하게 도전했지만, 계속 2등에만 머물렀고 수차례 고배를 마셨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중 2016년 고향 전주에서 열린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명창부 대회에 나갔을 땐 “3등을 했고, 긴 슬럼프가 찾아왔다. 큰 벽을 느껴 소리를 그만두려고까지 했다”고 말했다.

다양한 창극 역할에 도전한 것도 “삶의 가장 어두운 숲속을 헤매는 심정에서 시작한 것”이라고 했다. 그가 2017년 첫 창작 판소리 낭독극으로 선보여 평단 호평을 받았던 ‘단테의 신곡-지옥’도 “신이시여, 제가 정말 소리를 할 수 없는 사람일까요?”란 스스로에 대한 질문을 담은 것이라고 했다. 이 작품에서 단테를 비롯해 1인 6역을 직접 연기했던 정씨는 “판소리가 심해를 헤엄치며 깊이를 찾아가는 일이라면 창극은 그 심해 속 시야를 더 확장하는 개념”이라며 “동·서양의 변화무쌍한 역할들을 창극에서 경험하면서 판소리 메시지를 어떻게 관객에게 전달할지에 대한 식견도 함께 넓어진 것 같다”고 했다. 이날 정씨가 무대에서 관객들을 감탄하게 만들었던 절절한 춘향이의 표정도 그가 수년간 창극을 넘나들며 이어온 소리 공부가 빚어낸 것이었다.

정씨는 이날 경연 무대 위에서 “‘정정렬제 춘향가’를 제대로 선보이고 싶다는 책임감을 갖고 있었다”고도 했다. ‘정정렬제 춘향가’는 정씨가 일곱 살 때 가장 첫 소리 스승으로 모신 최승희 명창(전북도 무형유산 제 2호 판소리 춘향가 보유자)이 맥을 이어온 소리. 그는 “날 때부터 소리 맥을 잇는 게 당연한 국악인 집안은 아니었다”라고 했다. “어릴 적 ‘동백아가씨’를 즐겨 부르며 춤추는 절 아버지가 전북 도립국악원의 최승희 선생님께 데려갔고, ‘우리 딸 명창 만들어 주십시오’ 하면서 소리길이 시작됐죠.”

정씨는 “그렇게 멋모르고 전수받은 ‘정정렬제 소리’가 알고 보니 야질자질(몸을 방정맞게 흔들 만큼 흥이 오른다는 경기민요식 표현)한 기교가 많고, 장단이 변화무쌍한 게 매력적이지만, 전승이 활발하지 않아 희소해진 소리더라”라며 “이런 귀한 소리의 ‘맥을 잇는다’는 사명감이야말로 소리꾼 생을 살아갈 가장 큰 동기 부여”라고 했다. “그만큼 저에겐 이 상이 고지에 올랐단 ‘끝점’이 아닌 ‘네 길을 믿고 자유롭게 항해해도 된다’고 확인받은 ‘시작점’ 같아요. ‘소리길이 외로워도 슬퍼도, 끝까지 이어가보자’란 용기를 얻었습니다.”

◇제32회 임방울국악제 수상자

판소리 명창부▷대상(대통령상) 정은혜▷최우수상(방일영상) 김윤아▷우수상 신새봄▷준우수상 김정훈

판소리 일반부▷최우수상 이병욱▷우수상 이정현▷준우수상 오지은

가야금병창▷최우수상 김윤진▷우수상 윤세인▷준우수상 정찬미

농악▷대상 빛고을 영무장 농악단 넌실▷최우수상 굿패비단▷우수상 지산농악보존회▷준우수상 호남여성농악보존회

시조▷최우수상 김광남▷우수상 이아름▷준우수상 이웅환

무용▷최우수상 홍지선▷우수상 김동호▷준우수상 임정민

기악▷최우수상 김정민▷우수상 김태식▷준우수상 정해성

퓨전 국악▷최우수상 에루화▷우수상 초화▷준우수상 그리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