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29일 일본 가와구치의 자택에서 주간조선과 만난 하정웅 광주시립미술관 종신 명예관장. photo 이동훈

지난 8월 15일 광복절부터 시작된 정치권 일각의 ‘반일(反日)’ 몰이가 여전한 가운데, 한평생 모은 전 재산을 들여 수집한 미술품을 고국에 들여온 재일교포 2세 사업가가 있다. 광복 전인 1939년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재일교포 2세로 태어난 하정웅(85). 지금까지 그가 국내로 들여온 미술품만 줄잡아 1만2000여점으로 그의 컬렉션에는 요즘 엄청난 고가를 자랑하는 재일교포 이우환 화백의 작품 등 진귀한 목록들이 빼곡하다. 이런 작품들은 자신의 말대로 “한·일 관계 개선과 재일교포 지위 향상을 위해” 일본에서 한국으로 보내진 것이다. 문화 양성론을 앞세운 노(老) 재일교포의 또 다른 극일(克日)이라 할 수 있다.

덕분에 그의 부모가 태어난 고향 전남 영암에는 그의 이름을 딴 ‘영암군립 하정웅미술관’이 조성됐고, 2017년에는 광주시립미술관이 광주광역시 서구에 있는 옛 전남도지사 공관을 미술관으로 조성하면서 ‘하정웅미술관’이라고 명명했다.

그가 기증한 미술품은 양은 물론 질적으로도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때 불문(佛門)에 귀의해 ‘미륵보살’ ‘백제관음’ ‘아수라상’ 등 불상을 그리는 데 탁월한 솜씨를 뽐낸 북한 출신의 재일화가 전화황(1909~1996)을 필두로, 이우환, 곽인식, 곽덕준, 문승근, 송영옥, 조양규, 손아유 등 재일교포 화가들은 물론이고, 피카소, 샤갈, 달리, 뭉크, 앤디 워홀 등 세계 유명 작가의 그림도 망라한다. 도쿄의 주일 한국대사관에는 그가 기증한 곽인식 작가의 작품이 걸려 있다. 그는 서울 경복궁 내 국립고궁박물관에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과 그 부인 고(故) 이방자 여사의 유품 691점을 기증하기도 했다.

특히 부모의 고향이자 고대 일본에 천자문과 논어를 전해준 백제 왕인(王仁) 박사의 고향인 영암에는 그가 학창시절을 보낸 아키타현의 벚나무 묘목을 보내기도 했다. ‘도쿄 왕인 라이온스클럽(옛 수도 라이온스클럽)’ 회장을 지낸 그는 지난 2016년 도쿄 우에노(上野)공원에 왕인 박사 각화비를 건립할 때는 ‘건립자문위원장’을 맡았다. 당시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도쿄도지사로부터 인허가를 받는 등 왕인 박사를 일본에 ‘심는’ 데 전력을 다했다. 한·일 교류의 상징인 왕인 박사의 표준영정이 새겨진 각화비는 인근에 서있는 ‘정한론(征韓論)’의 주창자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개를 끌고 있는 동상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지난 8월 29일 찾아간 도쿄 인근 사이타마현 가와구치(川口)에 있는 하정웅 선생의 자택. 점당 경매가만 수십억원에 달하는 이우환 화백의 작품 등 1만2000여점을 국내외 미술관에 흔쾌히 기증한 ‘슈퍼컬렉터’의 자택이라 으리으리한 규모의 저택과 휘황찬란한 미술품을 내심 기대했지만 그의 집은 의외로 소박했다.

‘하공방(河工房)’이란 목각 문패가 달린 자택으로 들어가니 응접실에는 돌아가신 양친을 모신 작은 불당과, 한국을 상징하는 무궁화 그림이 걸려 있었다. 서재로 쓰는 공간에는 각종 미술서적 및 재일교포 관련한 책자들이 빼곡했다. 거실 한편에는 부인 윤창자 여사가 직접 그렸다는 다홍치마에 색동저고리를 입은 큰손녀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2001년부터 광주시립미술관 종신 명예관장으로 있는 그와 인터뷰를 한 지난 8월 29일은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한일병합’이 공포돼 재일교포들의 ‘디아스포라’가 시작된 날이었다. 마침 이날 초강력 태풍 ‘산산’이 일본 열도에 상륙해 도쿄와 사이타마가 최고경계에 들어간 상태였다.

하정웅 관장은 “태풍을 뚫고 한국에서 찾아왔다”는 기자의 너스레에 “하늘은 하늘의 일, 나는 나의 일이 있다”며 “태풍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마침 가와구치 자택에는 그의 일대기를 집필하기 위해 20년 넘게 따라다녔다는 사이타마신문의 일본인 기자도 함께 와 있었다.

2016년 도쿄 우에노공원에 건립한 백제 왕인 박사 각화비(오른쪽). 왼쪽은 각각 1940년과 1941년에 건립된 비석. photo 이동훈

- 지금까지 미술품을 몇 점이나 고국에 기증했나. "줄잡아 작품은 1만2000여점, 책자와 도록은 2000여점이다. 광주시립미술관을 시작으로 영암군립 하정웅미술관 등 한국에 13곳, 일본 10곳에 미술품을 기증했다. 공립미술관에 기증한 것들만 이 정도다. 다른 곳에 기증한 것까지 합치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국립고궁박물관에도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의 유품 691점을 기증했고, 신축된 도쿄의 주일본 한국대사관에도 내가 기증한 작품이 들어가 있다."

- 왜 이런 일을 하나. "재일교포 화가들이 그린 그림을 사모으자 처음엔 다들 나를 미쳤다고 했다. 쓰레기 같은 작품들을 왜 모으냐고. 다른 야심이 있어서 작품을 사모아 기증한다고 나를 욕하는 사람도 있었고, 나한테 정신병원에 가보라는 사람도 있었다. 하도 그래서 한번은 도쿄 인근 도다(戶田)에 있는 정신병원을 찾아간 적도 있다. 일본인 의사가 왜 왔냐고 해서 이유를 설명하고 뇌검사를 해달라고 했더니, 손짓으로 그냥 돌아가라고 하더라. 그때부터는 더 자신감을 가지고 작품을 모았다."

- 미술품을 사모으는 데 들인 돈은 얼마나 되나. "당시만 해도 미술품의 가치를 모르던 시절이다. 그래서 모을 수 있었다. 내가 사들인 작품 중 재일교포 화가 이우환의 그림도 있다. 아마 지금은 내 재산을 전부 팔아도 이우환의 그림 한 점을 못 살 것이다. 따지고 보면 당시 나를 미쳤다고 욕했던 사람들이 진짜 미친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림을 못 알아보고 쓰레기라고 취급했으니 정말 미친 것 아닌가."

- 막대한 돈을 어떻게 모았나. "1963년 결혼하고 가와구치에서 가전대리점을 했다. 이듬해인 1964년 도쿄올림픽이 열리자 컬러TV가 진짜 미친 듯이 팔렸다. 당시만 해도 '월부' 개념이 잘 없었는데, 나는 '월부' 개념을 도입했다. 가령 40만엔 하는 컬러TV를 4만엔씩 10개월, 1만엔씩 40개월 월부로 구입할 수 있게 했다. 그때만 해도 가전이 고장이 잘 날 때라 가깝고 잘 아는 집에서 구입해야만 했다. 당시 재일교포들을 비롯한 사람들이 내 가게로 몰려왔고 운좋게 돈을 끌어모을 수 있었다."

- 가전대리점 운영만으로 그 정도 기부를 할 수 있나. "쉬지 않고 일하다 한번 감기가 걸렸다. 감기가 6년 가까이 이어졌다. 그래서 내가 갑자기 죽더라도 가족들이 먹고살 수 있게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땅을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일본 땅값이 지금처럼 높지 않았다. 컬러TV와 땅을 바꾸자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도쿄, 가와구치, 오미야 등지에 있는 땅을 끌어모았다. 마침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총리가 '일본열도 개조론'을 밝히면서 지가가 폭등하기 시작했다. 어머니한테 한식당을 운영하시라고 마련한 도쿄 아카바네(赤羽)의 건물은 신칸센 철도부지로 수용되면서 막대한 보상을 받았다. 다른 건물은 지금도 상가, 주차장 등으로 잘 쓰이고 있어 고맙게도 먹고사는 데 큰 문제가 없다."

하정웅 관장의 첫 수집품인 전화황 화백의 ‘미륵보살’. photo 영암군립 하정웅미술관

- 1939년 오사카에서 태어났는데, 왜 아키타로 갔나. "아키타에 어머니의 외가 친척이 있었다. 목탄 등을 캐는 일을 했다. 아버지는 거기서 마부로 일했고, 어머니는 아키타현 다자와호(田澤湖) 인근의 오보나이(生保内) 수력발전소 댐과 도수로 건설현장에서 일했다."

- 부모님은 왜 광복 후에도 일본에 남았나. "1945년 8월 15일 광복 직후 귀국을 준비하고 영암으로 이불과 가재도구까지 다 보냈다. 한데 귀국선 표를 못 구했다. 돈 있고 빽 있는 사람들이 귀국선을 먼저 탔다. 우리 가족은 가재도구를 이미 영암으로 보낸 상태에서 귀국선 배표를 끝내 못 구해서 빈털터리로 일본에 눌러앉았다. 결국 아키타에 있는 외가 친척 밑으로 다시 들어갔다. 마침 친척이 내 공부까지 시켜준다고 했다."

- 당시 고등학교에 진학할 형편이 못 됐나. "우리 집안 형편으로 나는 고등학교에 갈 수 없었다. 당시 집안에 마구간이 같이 있었는데, 어느날 마구간에 말이 두 마리가 있더라. 나를 공부시켜 준다고 했던 외가 친척이 마음이 바뀌어 아버지의 대를 이어 마부를 하라고 준비한 말이었다. 그래서 학교에 가서 고등학교에 갈 수 없다고 했더니 선생님이 펑펑 울더니 '하군(河君), 꼭 고등학교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학교에서 일어난 일을 집에 가서 설명했더니 어머니가 고등학교는 내가 보낸다고 하고 쌀 밀거래에 나섰다."

- 쌀도 밀거래를 하나. "일본의 패전 직후 물자가 부족할 때다. 쌀 거래는 정부가 엄격히 통제하고 있었다. 허가받지 않은 사인 간의 쌀 거래는 불법이었다. 하지만 아키타의 쌀은 맛있어서 도쿄의 고급음식점 등에서 인기가 많았다. 재일교포들도 쌀 밀거래를 많이 했다. 어머니는 아키타에서 쌀을 80~100㎏씩 짊어지고 10시간 증기기차를 타고 도쿄 아카바네까지 가서 쌀을 넘겼다. 오른손과 왼손에 각각 20㎏, 등짐으로 40㎏을 짊어지고 쌀을 도쿄로 가져가 아카바네역에서 넘겼다. 쌀 밀거래 단속이 심해서 경찰서에 붙들려 간 적도 있다."

- 그렇게 고등학교에 보냈는데, 그림을 그리니 모친 속이 터졌겠다. "화가가 되려 했던 것은 아니다. 당시 직업으로 그림을 그려서는 먹고살 수 없다는 것을 나도 잘 알았다. 그냥 취미로 그렸을 뿐인데, 어머니는 내가 그림을 그리자 '너는 장남인데 환쟁이가 되려고 하느냐'며 붓과 물감 등 그림도구를 모두 강물을 내던져 버렸다."

이우환 화백의 ‘선으로부터’. photo 영암군립 하정웅미술관

- 고등학교 진학 후에는 어땠나. "내가 나온 아키타공고는 명문 고등학교다. 고3 때 다른 친구들은 4~5월쯤 이미 직장을 다 구했다. 한데 공부를 잘한 나 혼자만 취직이 안 됐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을 안 했지만 '조센징(朝鮮人)'이란 것이 발목을 잡았을 것이다. 그래서 어차피 고3 때 취직도 안 되길래 졸업장에 그때까지 써왔던 '가와모토 마사오(河本正雄)'란 일본식 이름 대신 '하정웅', 국적 '조선'이라고 써달라고 했다. 졸업장을 받자마자 집에도 안 들어가고 기차를 타고 도쿄로 떠났다. 아키타는 다시는 돌아오기도, 쳐다보기조차 싫었다."

- 도쿄에서 어떻게 직업을 구했나. "재일거류민단(현 민단)에 내 사연을 써서 직장을 좀 알아봐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덕분에 도쿄에서 재일교포가 운영하는 '메이코샤(明工社)'라는 전기회사에 취직할 수 있었다. 당시 일급으로 260엔 정도를 받았다. 당시 최저임금이 254엔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도 직장을 구할 때 사장님한테 '앞으로는 디자인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디자인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당시 한 달에 6000엔가량을 벌었는데, 3000엔은 요요기에 있는 디자인스쿨에 다니며 학비를 썼고, 나머지 3000엔은 교통비, 식비 등으로 썼다."

- 한때 조총련에 몸담았다고 들었다. "1959년 일본 역사상 최대 태풍인 이세만(伊勢灣) 태풍이 덮쳤다. 가와구치의 아라카와(荒川)강 제방 옆에 집이 있었다. 어머니가 쌀을 넘기던 사장님이 자기의 땅을 쪼개서 쌀값 대신 넘겨받은 집이다. 한데 태풍에 아라카와강 제방이 터져 홍수가 덮치면서 집이 완전히 침수됐다. 그때 배가 한 척 오더니 구호식량을 주고 갔다. 가와구치에는 동포들이 많이 살았는데 조총련에서 동포들을 구호하기 위해 배를 띄운 것이다. 가와구치는 에도시대 때부터 주물공업이 발전한 곳이다. 6·25전쟁 전후로 주물공업이 활황을 이뤘다. 재일교포들은 가와구치에서 철을 수거해 주물공장으로 넘기는 넝마주이나 고물상을 많이 했다."

- 재일동포 북송사업 때 왜 북으로 안 갔나. "당시 밤낮으로 일하고 공부하니 실명위기가 찾아왔다. 어머니가 쌀값 대신 받은 땅에 마련한 가와구치의 집마저 홍수로 침수돼 남은 것이 없었다. 마침 1959년 재일동포 북송사업이 시작됐다. 북한으로 가면 집도 주고, 공부도 시켜주고, 병도 고쳐준다고 해서 북송선 만경봉호를 타려고 가와구치의 조총련 지부를 제 발로 찾아갔다. 그랬더니 북으로는 언제든지 갈 수 있으니 우선 여기 있는 동포들을 위해 일을 좀 해줄 수 있느냐고 했다. 아마 고등학교를 졸업해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가와구치의 조총련 지부에서 사무원으로 일했다."

- 무슨 일을 했나. "정치적인 일은 아니었다. 재일동포들을 위해 상공업 조합과 위생조합을 결성하고, 납세, 경찰 등을 상대하는 법률업무를 지원했다. 위생조합은 재래식 변소의 대소변을 수거하는 조합이다. 당시 북한과 구소련으로부터 선철을 도쿄 하루미(晴海)부두로 들여와 가와구치에 주물공장에 넘기는 무역도 했다. 6·25전쟁 전후로 가와구치에 주물공장들은 대호황을 맞았다. 일을 잘한다고 김일성 초상화가 박힌 배지도 2개나 받았다."

- 조총련과는 왜 결별했나. "결혼하면서 신혼살림으로 가전제품을 장만했는데, 가전대리점 사장한테 사기를 당했다. 결국 떼인 돈 대신 가게를 내 명의로 넘겨받게 돼 조총련 일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조총련 일을 관두겠다고 했더니 간부들끼리 화장실에서 '저 녀석은 간첩'이라고 말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됐다. 4년 가까이 동포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는데, 일순 간첩으로 매도당해 너무나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가지고 있던 김일성 배지까지 버리고 조총련에 발길을 끊었다."

- 현재 국적은 무엇인가. "한국이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때 '조선적(朝鮮籍)'으로 남는 것, 일본으로 귀화하는 것, 한국 국적을 얻는 것 등 세 가지 선택이 있었는데 나는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부모님 고향이 전남 영암이라 별다른 망설임은 없었다."

- 광복 후 한국을 언제 처음 방문했나. "1973년쯤이다. 마부로 일했던 아버지는 술만 드시면 고향에 꼭 가보고 싶다고 나를 졸라댔다. 그때 사업하느라 너무나 바빴는데 민단을 통해 귀국허가를 받아 광복 후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다. 아버지가 조상들 산소를 돌아보시더니 어린아이처럼 펑펑 우셨다. 그때 '좀 더 빨리 올 것을…' 하고 후회했다. 이후 영암에 땅을 600평 정도 사서 조상들 묘지를 다시 모셨다."

- 재일동포 지위 향상에 발벗고 나선 까닭은. "아키타의 우리집 옆에 조선인 무연고 무덤들이 있었다. 부모님은 내가 소학교 다닐 때부터 무덤 앞의 바윗돌 위에 음식들을 놓고 기도하고 오라고 시켰다. 자기들은 무서워서 직접 못 가겠다고 어린 나를 대신 보냈다. 그때부터 생긴 '동정심'이 아닐까 한다. 다자와호 옆에 있는 '히메관음(姬觀音)상'이 오보나이 수력발전소와 도수로를 건설할 때 사망한 조선인 강제동원 노동자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도 결국 밝혀냈다. 그 옆의 사찰 덴타쿠지(田澤寺)에 조선인 무주고혼(無主孤魂) 위령비도 세웠다."

- 내년은 광복 80주년,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이다. 양국에 바라는 점은. "나는 1930년대생이고, 기자는 1980년대생이지만 연결이 되고 이야기가 전달되지 않나. 인간의 역사라는 것이 그렇다.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말이 있다. 옛날에 우리가 살아왔던 기록을 잘 발굴해서 소리도 없고 말도 없이 묻혀 있는 인물들을 찾아내서 이런 사람들로부터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 특별한 좌우명이 있나. "'노당당(露堂堂)'이란 말이다. '숨김 없이 당당하다'는 정도의 말이다. 이 말은 광복 전 일본 교과서에 실렸던 아베 요시시게(安倍能成·전 일본 문부대신)가 쓴 '청구(靑丘·조선의 다른 말)잡기'에 나오는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를 애도함'이란 글에 나온다. 비록 광복 후에 이 글은 일본 교과서에서 사라졌지만, 내가 이 글을 처음 접했을 때는 너무나 감동이 컸다. '조선의 소반' '조선도자명고'를 쓴 총독부 임업기사 아사카와 다쿠미는 일본인으로 조선을 누구보다 사랑한 사람이다. 그의 묘도 서울 망우리 묘역에 있다. 나도 아사카와 다쿠미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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