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정순, ‘코끼리걷는다-물과 풀이 좋은 곳으로 3′(2021). 캔버스에 아크릴릭 오일 스틱, 228×362cm. /학고재

코가 없는 거대한 코끼리가 전시장에 들어섰다. 15년 전 동남아 여행 중 야생에서 마주친 코끼리가 본인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는 작가는 귀국 후 코끼리 연구에 매진했다. 엄정순 작가가 코끼리 연작을 만들게 된 배경이다.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란 화두를 들고 작가는 시각장애 어린이들이 청각과 촉각, 후각으로 느낀 코끼리를 재해석해 대형 설치 작품으로 만들었다.

보통 작품은 만지지 않는 것이 상식이지만, 이 작품은 예외다. 관객들은 대형 코끼리를 이리저리 만지며 감상한다. 작품의 표피는 울실로 직조한 태피스트리. 여러 사람들의 터치와 체온이 뭉쳐져 보푸라기를 만들지만 그는 “사람들의 터치가 담긴 보푸라기도 코끼리”라고 했다. “코끼리에게는 코가 제일 중요하지만 그 절대적 존재가 사라진 후에야 비로소 다른 것들을 볼 수 있다. 시각장애 어린이들과 작업하면서 나는 결핍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결핍은 없어서 나쁜 게 아니라 상상력으로 가는 좋은 통로다.”

엄정순 작가의 대형 설치 작품 '코 없는 코끼리'가 전시장에 놓인 모습. 오른쪽 뒤로 작가의 회화 '코끼리걷는다- 물과 풀이 좋은 곳으로2'가 보인다. 사진 양이언. /학고재

서울 소격동 학고재에서 한·중·일 작가 3인을 조명하는 전시 ‘잃어버린 줄 알았어!’가 열리고 있다. 엄정순(한국), 딩이(중국), 시오타 치하루(일본)가 회화와 조각, 드로잉 등 60여 점을 선보인다. 광주비엔날레 대표를 지낸 이용우 중국 상하이 통지대 교수와 왕리인 독립 큐레이터가 공동 기획했다. 이용우 교수는 “예술이 금융이 된 시대, 작품을 시장 투자 가치로만 보는 이들이 많아졌지만 제일 비싼 그림이 가장 좋은 그림이냐고 묻는다면 쉽게 답할 수 없을 것”이라며 “예술의 근본 가치, 공동체 정신과 사회적 포용성을 돌아보자는 취지”라고 말했다. 전시 제목은 중의적이다. “잃지 말아야 할 것을 잃어버렸다는 반성, 혹은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안도감”이다.

딩이, '십시 1989-7'(1989). 캔버스에 아크릴릭. 100×120cm. /학고재

세 작가의 공통점은 인간이 숙명적으로 안고 살아가는 자아정체성에 대해 묻고 도전해왔다는 것. 딩이는 1986년부터 수학적 기호를 연상케 하는 십자(+)와 격자(x)를 이용해 중국 현대미술사에서 기하학적 추상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1980년대 이후 서구 현대 미술의 영향을 강하게 받거나 반대로 중국의 전통을 추구했던 중국 현대 작가들과 달리 서구 영향도, 중국성에도 거리를 둔 채 묵묵히 자기 길을 걸었다. 이용우 교수는 “모두가 거대한 ‘의미’를 찾던 시대에 ‘무의미’를 대안으로 제시하면서 역설적으로 거부 의사를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시오타 치하루, 'Endless Line'(2024). 캔버스에 실. 162.2×390.9cm. /학고재
시오타 치하루 , 'State of Being (Binocular)'. 2022, 메탈 프레임, 실, 쌍안경. 45×45×25cm. /학고재

시오타 치하루는 붉은 실과 검은 실로 삶과 죽음을 이어온 설치미술가. 실을 활용하는 그의 작품에는 열쇠, 창틀, 헌 옷, 신발, 보트, 여행 가방 같은 일상 소품들이 자주 등장한다. 모두 작가의 기억과 연결된 물건들이다. 이번 전시에는 생명을 상징하는 붉은 피 색깔의 실로 책, 쌍안경 등을 얽은 설치물 등이 나왔다.

'잃어버린 줄 알았어!' 전시 전경. 왼쪽부터 엄정순의 대형 설치 작품 '얼굴 없는 코끼리'와 딩이의 회화 '십시 2024-14', 시오타 치하루의 'State of Being (Book)이 전시된 모습. 사진 양이언. /학고재

엄정순은 ‘코 없는 코끼리’ ‘얼굴 없는 코끼리’를 비롯해 회화 연작 ‘들리지 않는 속삭임’ 등을 선보인다. 시각장애 어린이들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은 코끼리를 보는 것. 이 교수는 “권력의 상징인 코를 본 적이 없거나 잘 모르는 사회적 약자들이 코가 없는 코끼리를 만드는 아이러니는 권력이나 위계와는 관계없는 우화가 된다”고 했다. 10월 5일까지. 무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