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경기도 구리의 자택 거실에서 소설가 박완서의 맏딸 호원숙이 사진 속 어머니와 같은 포즈로 앉았다. 그는 외할머니가 어머니에게 물려준 마고자, ‘미망’ 작가노트, 부모님의 결혼식 영상,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선물한 노리다케 접시 등을 ‘나의 현대사 보물’로 꼽았다. /고운호 기자

소설가 박완서(1931~2011)가 1970년 불혹의 나이로 등단했을 때, 맏딸 호원숙(70·수필가)은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큰 충격이었죠. 엄마가 내가 모르는 세계로 날아가 버린 것 같았어요. ‘엄마가 더 이상 나만의 엄마가 아니구나.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생각했어요.”

호원숙은 박완서가 집필실 겸 자택으로 지어 말년을 보낸 경기도 구리시 ‘노란집’에서 어머니를 기리며 살고 있다. 지난 2일 기자와 만난 그가 ‘나의 현대사 보물’로 꼽은 것도 모두 어머니 박완서와 관련된 것. ①외할머니가 어머니에게 물려준 마고자 ②장편소설 ‘미망’ 작가 노트 ③부모님의 결혼식 영상 ④생전 어머니가 아끼던 ‘노리다케 접시’ 등이다.

박완서의 어머니가 물려준 마고자. /고운호 기자

◇박완서의 뮤즈, ‘엄마’의 마고자

“엄마는 이렇게 몸서리를 치면서도 그 꼭대기에 새로 장만한 집이 대견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기둥 서까래까지 손수 양잿물로 닦아내고 구석구석 독한 약을 뿌리고 도배장판도 새로 했다. (…) 엄마는 미장이 도배장이 칠장이…. 못 하는 게 없었다.”

박완서는 자전적 소설 ‘엄마의 말뚝 1′(1979)에 자식들 공부시키겠다고 바느질 솜씨 하나만 믿고 개성에서 서울로 이사 와 현저동 산비탈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한 ‘엄마’를 이렇게 묘사했다. 박완서의 어머니 홍기숙 여사는 딸의 여러 작품에 영감을 준 ‘뮤즈’였다. 교육열 높고, 생활력 강하고, 자식들에게 헌신적인 홀어머니. 호원숙은 “외할머니는 키가 크고, 당당하며 유머가 뛰어난 분이셨다. 글 모르는 사람들의 편지를 대신 써주곤 하셨고, ‘삼국지’며 ‘수호지’ 구절들을 다 외우셨다”고 말했다.

앞섶에 반짝이는 금단추가 달린 옥색 양단 마고자는 1960년대 초반 어머니가 박완서에게 물려준 것이다. 박완서는 생전 한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엄마 마고자를 왜 저한테 주세요?” 만류하는 자신을 눈물 그렁한 눈으로 바라보던 어머니의 말을 이렇게 적었다. “거기 금단추가 달렸어, 이것아. 시집갈 때 은수저 한 벌도 못 해 보낸 게 늘 걸려싸서 주는 거니까 암말 말고 가져가라니까….”

‘미망’ 작가 노트. /고운호 기자

◇갈 수 없는 고향 그린 ‘미망’

장편 ‘미망(未忘)’은 박완서의 유일한 역사소설이다. 조선 말부터 6·25 이후 분단에 이르기까지 개성의 한 상인 집안 일대기를 다룬다. 박완서는 생전 “내 작품 중 오십 년이나 백 년 후에도 읽힐 게 있다면 ‘미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고 했다.

박완서는 1985년 3월 월간지 문학사상에 ‘미망’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호원숙은 “’미망’을 집필하던 시기에 어머니 인생에 가장 혹독한 시련이 닥쳤다. 1988년 5월 아버지가 암으로 세상을 뜨셨고, 석 달 후인 8월 남동생이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충격으로 연재를 중단했던 박완서는 1989년 4월 다시 집필을 시작해 1990년 책으로 완결한다. 지난 8월 개정판이 나왔다.

작가 노트는 1985년 다이어리에 참고 서적, 인물들의 나이 설정, 역사적 상황 등을 자필로 적은 것. 호원숙은 “어머니는 ‘미망’에 다시는 갈 수 없는 고향 개성에 대한 사랑을 담았다. 역사적 고증을 얼마나 치밀하게 했는지가 여기에 담겨있다”면서 “어머니는 뭐든지 잘 버리는 분이라 이 작가 노트도 가죽 표지를 벗겨내고 쓰레기통에 버렸는데, 내가 보고 냉큼 주워 왔다”고 했다.

결혼식 영상 테이프. /고운호 기자

◇‘나목’의 연장전인 결혼식 영상

박완서는 1953년 4월 21일 미군 PX에서 근무하던 시절 만난 측량 기사 호영진과 결혼식을 올린다. 장소는 서울 소공동의 고급 중식당 아서원. 신랑·신부 들러리에 화동까지 있는 이 서양식 결혼식을 신랑은 6㎜ 필름 영사기로 찍어 남겼다. 동영상 촬영은 당시로서는 극히 예외적인 일이었다. 부부가 PX에서 근무한 인연으로 하객 중 서양인도 눈에 띈다.

호원숙은 “‘나목’은 허구이지만 6·25 전쟁 중 서울의 모습, 특히 PX라는 공간을 리얼하게 기록했다. 그래서 PX에서 함께 일하던 사람들이 하객으로 나오는 이 영상은 ‘나목’의 연장전인 셈”이라고 했다. “’나목’의 이해심 깊은 남편은 어머니에 대해 절대적 사랑과 신뢰를 보낸 아버지를 반영해요. 아버지는 부자는 아니었지만, 어머니에게는 무엇이든 최고로 해 주고 싶어 했어요. 결혼식도 마찬가지였죠. 이 영상을 보면 1950년대 ‘최고의 결혼식’이 어떤 건지를 알 수 있어요.”

박완서의 유품인 노리다케 접시에도 남편의 사랑이 담겨 있다. “결혼 후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노리다케 홈세트를 갖고 싶다’고 졸랐대요. 그 말을 들은 아버지가 백화점에서 그릇을 사 오셨는데, 알고 보니 노리다케가 아니었던 거예요. 어머니가 재차 ‘나는 노리다케가 갖고 싶다’고 하셔서 아버지가 다시 사 오셨는데, 어머니는 평생 그 그릇을 사용하시며 만족하셨죠.” 일본 도자기 브랜드 노리다케는 1950년대 중산층 주부들의 ‘로망’이었다. ‘도시의 흉년’ 등 한국 사회 중산층의 욕망을 반영하는 세태소설을 즐겨 쓴 박완서의 작품 세계와도 이어진다.

호원숙은 “결국 이 모든 물건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사랑’”이라고 말했다. “어머니에 대한 외할머니의 사랑, 고향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 이번에 ‘미망’을 다시 내면서 어머니 작품을 관통하는 건 결국 ‘사랑’이라 느꼈어요. 그 사랑이란 건 쉬운 사랑이 아니라는 것, 굉장한 의지를 가지고 노력할 때 빛을 발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